세상의 모든 골목 | 변종모
고요히 나를 빛내며 스스로를 사랑하기 좋은 곳
비에이, 일본 Biei, Japan
바다 위를 날던 비행기가 홋카이도의 경계에 들어서면서부터 기체가 자주 흔들렸다. 대부분의 승객들은 긴장된 자세로 창밖을 보며 애써 딴청을 피우고 있었지만 나는 아랑곳없이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그저 빨리 착륙하기만을 바랐다. 부정기적으로 편성된 아사히가와행 티켓을 얻은 것만으로 행운이라 생각했기에 무사히 도착만 할 수 있다면 흔들리는 비행기쯤이야 아무렇지 않았다.
그렇게 들어선 설국은 차갑지도 단단하지도 않았다. 거울에 비친 듯 신비롭게 산란하는 눈의 빛들이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추위를 끔찍하게 싫어한다는 이유로, 겨울이면 일부러 따뜻한 나라를 찾아다니거나 아예 여행을 접고 집 밖을 나서지 않던 내가 설국 행 티켓을 손에 넣고 이렇게 즐거워하게 될 줄은 몰랐다. 더군다나 때는 겨울의 절정으로 치닫는 일월 말이었고 뉴스는 오십 년 만의 폭설이라고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춥지만, 추위를 좋아하진 않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설국으로 이어지는 작은 마을의 골목에 서서 손을 비비며 호호 즐거운 입김을 불고 있다.
따뜻함과 다정함으로 촘촘한
비에이는 그야말로 작은 소도시다. ‘작은’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마을들이 모여 만들어진 도시다. 도시지만 마을 같았다. 조금 과장을 하자면, 크리스마스 카드만 한 마을이다. 집들은 모두 경사가 심한 지붕을 이고 있었다. 그 사이로 난 좁은 골목들은 길게 이어지지 못하고 군데군데 끊겼다. 어느 방향으로 가더라도 다시 돌아오기만 하면 출발점이었다. 이곳으로 도둑이 도망쳐 온다면 숨을 곳이 없을 것 같았다. 초보 여행자라도 여기서 길을 잃고 헤맬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비에이역을 중심으로 낮게 펼쳐진 집들은 저마다 이마에 숫자를 이름표처럼 달고 있다. 이 숫자는 주소가 아니라 집이 태어난 연도다. 적게는 몇십 년부터 많게는 백 년이 넘는 집들이 동화책 속의 삽화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다. 새하얀 눈에 덮인 집들의 자세와 표정은 마음씨 좋은 백발의 노인처럼 다소곳하고 따뜻하다.
이 골목은 소박하다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린다. 높은 담도 없고 넓은 마당도 없다. 골목에는 그저 눈이 쌓여 있고 또 쌓여 간다. 바람이 불면 눈이 날리는데, 꼭 꽃잎이 날리는 것만 같다. 여기서는 바람이 분다고 하지 말고 눈이 분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온통 겨울로 가득 찬 곳이지만 전혀 떨리지 않는다. 추운 건 사실이지만 견딜 만하다. 이 골목을 걷는 것은 반가운 사람에게 온 반가운 카드를 펼쳐보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단정한 옷차림으로 걷는다. 작은 우동 가게 주방장은 이방인에게 친절한 인사를 건넨다. 기념품 가게의 아주머니는 먼저 달려 나와 문을 열어준다. 그들의 따뜻한 어깨에는 오래된 친절이 배어 있었다. 약국이나 주유소에서도 그랬고 모든 카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마을을 꼭 닮아 있었다. 작고 다소곳했다. 이곳의 집들이 자신의 이마에 제 생년을 떳떳하게 달고 있듯이, 사람들도 얼굴마다 각기 다른 따뜻함을 달고서 눈처럼 환하다. 일 년에 반 이상이 겨울인 이곳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따뜻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어서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아주 촘촘한 마음의 간격으로 온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덕분에 나 역시 잠시나마 따뜻함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이 작은 마을의 골목에서 잠시나마 몸과 마음을 녹인다. 다시 눈이 내린다. 이 순간만큼은 눈이 아니라 꽃이라 생각한다.
눈은 한밤중에도 끊임없이 내렸다. 이 도시에 내리는 눈은 쌓이기 위해 내리는 것 같았다. 눈 때문에 밤은, 별도 달도 없지만 오래도록 환했다. 덕분에 나는 몇 번의 뒤척임 끝에야 겨우 잠들었고 하얀 꿈을 꾸다가 다시 눈을 뜨곤 했다.
바깥세상은 여전히 하얗다. 무채색의 풍경이 펼쳐질 뿐이었다. 겨울이 끝나면 다시 각각의 색으로 아름답겠지만, 지금은 오로지 흰 눈뿐이다. 지금까지 내가 본 풍경 가운데 가장 하얀 풍경이다. 며칠째 꿈 같은 세상 속에 놓여있다. 아니다 꿈과 현실을 동시에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