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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13 세상의 모든 골목 | 변종모
 
 
 
 
 
 
 
 
 
 
 
 
 
곧 출간될 변종모 작가님의 『세상의 모든 골목』을 사전 연재합니다.

세상의 모든 골목 | 변종모


고요히 나를 빛내며 스스로를 사랑하기 좋은 곳

비에이, 일본 Biei, Japan


바다 위를 날던 비행기가 홋카이도의 경계에 들어서면서부터 기체가 자주 흔들렸다. 대부분의 승객들은 긴장된 자세로 창밖을 보며 애써 딴청을 피우고 있었지만 나는 아랑곳없이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그저 빨리 착륙하기만을 바랐다. 부정기적으로 편성된 아사히가와행 티켓을 얻은 것만으로 행운이라 생각했기에 무사히 도착만 할 수 있다면 흔들리는 비행기쯤이야 아무렇지 않았다.

  그렇게 들어선 설국은 차갑지도 단단하지도 않았다. 거울에 비친 듯 신비롭게 산란하는 눈의 빛들이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추위를 끔찍하게 싫어한다는 이유로, 겨울이면 일부러 따뜻한 나라를 찾아다니거나 아예 여행을 접고 집 밖을 나서지 않던 내가 설국 행 티켓을 손에 넣고 이렇게 즐거워하게 될 줄은 몰랐다. 더군다나 때는 겨울의 절정으로 치닫는 일월 말이었고 뉴스는 오십 년 만의 폭설이라고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춥지만, 추위를 좋아하진 않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설국으로 이어지는 작은 마을의 골목에 서서 손을 비비며 호호 즐거운 입김을 불고 있다.


따뜻함과 다정함으로 촘촘한


  비에이는 그야말로 작은 소도시다. ‘작은’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마을들이 모여 만들어진 도시다. 도시지만 마을 같았다. 조금 과장을 하자면, 크리스마스 카드만 한 마을이다. 집들은 모두 경사가 심한 지붕을 이고 있었다. 그 사이로 난 좁은 골목들은 길게 이어지지 못하고 군데군데 끊겼다. 어느 방향으로 가더라도 다시 돌아오기만 하면 출발점이었다. 이곳으로 도둑이 도망쳐 온다면 숨을 곳이 없을 것 같았다. 초보 여행자라도 여기서 길을 잃고 헤맬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비에이역을 중심으로 낮게 펼쳐진 집들은 저마다 이마에 숫자를 이름표처럼 달고 있다. 이 숫자는 주소가 아니라 집이 태어난 연도다. 적게는 몇십 년부터 많게는 백 년이 넘는 집들이 동화책 속의 삽화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다. 새하얀 눈에 덮인 집들의 자세와 표정은 마음씨 좋은 백발의 노인처럼 다소곳하고 따뜻하다.


  이 골목은 소박하다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린다. 높은 담도 없고 넓은 마당도 없다. 골목에는 그저 눈이 쌓여 있고 또 쌓여 간다. 바람이 불면 눈이 날리는데, 꼭 꽃잎이 날리는 것만 같다. 여기서는 바람이 분다고 하지 말고 눈이 분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온통 겨울로 가득 찬 곳이지만 전혀 떨리지 않는다. 추운 건 사실이지만 견딜 만하다. 이 골목을 걷는 것은 반가운 사람에게 온 반가운 카드를 펼쳐보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단정한 옷차림으로 걷는다. 작은 우동 가게 주방장은 이방인에게 친절한 인사를 건넨다. 기념품 가게의 아주머니는 먼저 달려 나와 문을 열어준다. 그들의 따뜻한 어깨에는 오래된 친절이 배어 있었다. 약국이나 주유소에서도 그랬고 모든 카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마을을 꼭 닮아 있었다. 작고 다소곳했다. 이곳의 집들이 자신의 이마에 제 생년을 떳떳하게 달고 있듯이, 사람들도 얼굴마다 각기 다른 따뜻함을 달고서 눈처럼 환하다. 일 년에 반 이상이 겨울인 이곳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따뜻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어서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아주 촘촘한 마음의 간격으로 온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덕분에 나 역시 잠시나마 따뜻함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이 작은 마을의 골목에서 잠시나마 몸과 마음을 녹인다. 다시 눈이 내린다. 이 순간만큼은 눈이 아니라 꽃이라 생각한다.

  눈은 한밤중에도 끊임없이 내렸다. 이 도시에 내리는 눈은 쌓이기 위해 내리는 것 같았다. 눈 때문에 밤은, 별도 달도 없지만 오래도록 환했다. 덕분에 나는 몇 번의 뒤척임 끝에야 겨우 잠들었고 하얀 꿈을 꾸다가 다시 눈을 뜨곤 했다.

  바깥세상은 여전히 하얗다. 무채색의 풍경이 펼쳐질 뿐이었다. 겨울이 끝나면 다시 각각의 색으로 아름답겠지만, 지금은 오로지 흰 눈뿐이다. 지금까지 내가 본 풍경 가운데 가장 하얀 풍경이다. 며칠째 꿈 같은 세상 속에 놓여있다. 아니다 꿈과 현실을 동시에 걷고 있다.

  이곳으로 와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크리스마스 나무’라는 제목이 붙은 한 장의 사진 때문이었다. 눈으로 뒤덮인 언덕에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아름다운 나무 한 그루. 세월의 흔적을 감춘 듯 비밀스러운 둥근 언덕 위에 표정을 알 수 없는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언덕과 나무가 어울려 빚어내는 풍경은 분명 겨울이었지만 따뜻하게만 느껴졌다. 눈의 언덕 가운데 홀로 선 나무는 거대하게 보이기도 했고 하얀 케이크 위에 꽂힌 작은 장식품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풍경이 소설의 한 문장처럼 마음 깊이 박혔고 나는 결국 비행기를 타고야 만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나무와 마주하고 나무처럼 미동도 없이 서 있다. 눈이 오는 날이기도 했고 해가 지는 저녁이기도 했다. 마주하는 풍경은 사진에서 보던 것보다 더 깊고 거대했다.


  수시로 달라지는 눈의 힘을 본다. 거대한 나무는 폭설에 잠시 사라지기도 했고 커다란 그림자를 앞세우고 성큼 다가오기도 했다. 사진에서는 알 수 없었던 나무의 일상을 대면하고 있으니 나무의 비밀을 엿본 기분이다. 아무것도 없는 세상으로 들어온 기분이다. 능선을 나타내는 표식처럼 간혹 한 그루의 나무가 서 있거나, 어쩌다 숲을 이루어도 황량하고 휑한 풍경은 그대로였다.

  나무는 아무것도 없는 풍경 속에서 스스로 아름다운 풍경이 되어 서 있었다. 나무 앞에서 사람들은 행복하고 포근한 웃음을 피워 올렸다. 그들이 날린 웃음이 겨울 하늘에 구름이 되어 두둥실 떠 있었다. 눈 쌓인 언덕과 나무는 모두를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눈은 스스로 빛나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빛내거나 함께 빛내는 일로 더욱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았다.

  나무 앞에서 내가 이곳에 오고 싶었던 이유를 알게 됐다. 단지 사진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아마도 사진 속의 나무를 닮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새롭게 자신을 써나가기에 안성맞춤인 곳


  안으로나 밖으로나 잠시의 고요도 없이 분주하게 산다. 그렇게 살며 이곳저곳 모퉁이에 마음을 긁힌다. 그걸 막고자 또는 위로하고자 동굴처럼 은밀하게 살아도 생채기가 나지 않을 방법은 없다. 동굴 속으로 자주 눈보라가 치고 돌멩이가 날아들어 적막을 깬다.

  이곳처럼 아무것도 없는 풍경 앞에 서서 이 겨울나무처럼 서 있고 싶었다. 저 나무는 심하게 바람이 불어도, 거칠게 눈발이 날려도 잠시 흔들리면 될 일이었다. 넘어지거나 주저앉은 적 없는 저 나무를 닮고 싶었다.

  이곳엔 아무것도 없다. 아니, 오직 새하얀 눈만이 있다. 그래서 나를 새롭게 써나가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그러니 깨지고 상처 난 당신도 이곳으로 오라. 이 고요의 풍경에 몸을 담그고는 도시에서 얻은 몸살을 해열시켜라. 잠시 고요하고, 고요한 가운데 스스로를 돌아보라. 그게 스스로를 조금 더 사랑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나도 그럴 것이다. 눈보라 가득해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날이 오면 나는 좁고 소박한 이 골목으로 숨어들어 새하얀 눈의 세상에 발자국을 찍으며 또렷한 한 걸음 한 걸음을 천천히 걸을 것이다.


  그곳으로 돌아가면 당신에게 “눈이 많이 오는 어느 겨울에 우연히 만나자”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 말이 아마도 영 부질없지는 않을 것이다. 허공 같은 그 말이 이곳에서는 결코 거짓이 되지는 않을 테니까.

📌 순도 백 퍼센트의 겨울 풍경

홋카이도의 중심 삿포로에서 북쪽으로 기차를 타고 한 시간 반이면 도착하는 곳. 우리나라에서 겨울철엔 부정기적으로 비에이와 가장 가까운 아사히가와 공항으로 직항이 운항하기도 한다. 하지만 변덕스러운 날씨가 관건이다. 홋카이도는 렌트카를 이용하면 어렵지 않게 다닐 수 있다. 여름에는 아름답게 펼쳐진 라벤더가 장관을 이루며, 시원한 날씨 때문에 내국인 여행객들이 많아서 오히려 호텔 예약이 힘들다. 비에이는 삿포로에서 하루 코스로 다녀오기도 하지만 1박 2일 코스나 그 이상 며칠 여유롭게 머물며 순도 백 퍼센트의 겨울 풍경을 만끽하길 권한다. 작은 도시지만 인터넷에 소개된 유명 맛집이나 카페가 생각보다 많아서 이를 찾아다니는 재미 또한 크다. 

변종모 | 오래도록 여행자

쓴 책으로 당분간 나는 나와 함께 걷기로 했다』 『여행도 병이고 사랑도 병이다』 『아무도 그립지 않다는 거짓말』 『같은 시간에 우린 어쩌면』 등이 있다. 지금은 길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유튜브 ⟨모처럼, 여행⟩(https://www.youtube.com/@maldive9)에서 여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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