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마음이 텅텅 소리를 낼 때면 함께 걸었던 길들을 곱씹어본다. 그 기억을 풍경처럼 바라본다. 그러니 나를 열면 그런 것들이 있지 않을까. 사랑한 것, 외로운 것, 슬픈 것, 기쁜 것, 얻은 것, 잃은 것 모두. 시간이 더 흘러 이 모든 것이 반딧불이만큼 작아지면 좋겠다. 그러면 나는 나를 활짝 열어 나의 밤을 펼쳐 보일 수 있을 것 같다. -신유진 <창문 너머 어렴풋이>
색색의 기억들이 마음 가득 차올라 머릿속을 춤추며 뛰어다녀. 어떤 날은 모든 게 너무 선명해.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어느새 나는 수국과 라일락으로 가득한 정원에 있어. -파니 뒤카세 <곰들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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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곰이 초대한 정원의 수국과 라일락을 보며 활짝 열린 제 안의 창문 너머로 기억 속 최초의 나무를 떠올려요. 제게도 커다란 라일락 나무가 있습니다. 어쩐지 사시사철 꽃을 피우고 있죠. 향은 얼마나 아찔하고 달콤한지. 라일락 아래에서 저와 동생이 웃기도 울기도 놀기도 싸우기도 합니다. 그 옆에는 옥수수 밭이 있고요. 누구도 돌보지 않는 공터를 밭으로 가꾼 엄마가 우리보다 훌쩍 큰 옥수수를 따고 있습니다. 엄마의 손이 닿으면 황폐한 모든 것이 생생해졌어요. 그 손으로 만들어내 난생 처음으로 먹어본 도나쓰(라고 써야죠!)와 피자의 맛은 앞으로도 잊을 수 없을 테고요. 또 젊은 시절 폭군이었다던 할아버지가 제게는 하얗고 긴 수염을 쭉쭉 잡아당길 수 있는 놀이터였던 것, 알츠하이머로 정신이 온전치 않았던 할머니가 종일 건네던 한마디와 그 맑고 다정한 음조, 멋진 어른으로 보였던 이모뻘의 사촌언니가 준 모든 선물, 가장 좋아했던 장소인 도서관과 오래도록 저를 지켜봐주고 책의 길을 틔워주었던 사서 선생님, 집을 나올 때까지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주었던 커다란 곰 인형… 끝나지 않을 풍경들. 내 안에 이토록 생생한 풍경들이 있었다니. 이 풍경들을 발견해낸 건, 어쩌면 꼬마곰의 이야기와 더불어 신유진 작가의 이야기가 함께 도착한 덕분일 거예요. 아련하면서도 명징한 문장들로 보여준 중앙시장 골목 빨간 벽돌 이층집, 미자의 목소리와 냄새, 유리창에 입김 불어 적은 ‘안녕’이라는 말, 테주강을 바라보는 언덕의 여자들, 엉덩이 그림, 엄마의 라캉 책, 가운뎃손가락… 조금 웃기면서도(?) 조금 슬픈 그런 것.
“짐작했을지 모르겠지만, 이 글은 나의 파두다. 그러니까 그리움의 노래. 나는 지금 그리움을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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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전 일이에요. 한 그림책 원서를 보고 반했으나 안팎으로 고민되는 지점이 있어 판권 확보를 주저하고 있던 차, 누군가 제게 속삭입니다. 최근에 본 가장 사랑스러운 작가이자 정원 그림책이다, 그림이 너무 귀여운데 이야기는 차분하다, 기타 등등. 그 대화가 있고 곧바로 계약한 책이 네, <곰들의 정원>이고요. 그 누군가는 네, 옮긴이 중 한 분인 무루(박서영) 님입니다. 껄껄. 마냥 귀엽기만 한 이야기였다면 고민은 좀 더 길게 이어졌을 것 같아요. 하지만 너무나도 귀여운 그림들이 귀여움과 더불어 그 너머까지 품고 있다면 기꺼이 빠져들고 말지요. “사랑한 것, 외로운 것, 슬픈 것, 기쁜 것, 얻은 것, 잃은 것” 그러니까 “그리움의 증언”.
무루님과 저 말고도 또 다르게 빠져든 분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겠어요. 책 속 곰 할아버지는 정원을 돌보고, 요가(로 보이는 체조)를 하고, 막장 드라마를 즐긴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사랑하는 분이 네, 옮긴이 중 한 분인 기린(정원정) 님입니다. 옮긴이 후기도 이렇게 쓰시지 않았겠어요?
— 좋은 그림을 그리는 이는 좋은 이야기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각자의 느낌대로 자연을 사랑하고, 몸을 돌보고, 좋아하는 일에 시간을 쏟고, 중요하게 여기는 일을 씩씩하게 해나가는 곰 할아버지들. 정반대의 캐릭터들처럼 보이지만 곰곰bear bear이 생각해보니 별로 다르지 않다. 간단한 대사 몇 마디로 모든 내용을 유추할 수 있는 막장 드라마*의 애청자로서, 나도 모르게 곰 할아버지와 나를 동일시하게 되었다. 내 장래희망 같은 그림책. -옮긴이 정원정
(*책을 아직 안 보신 분들을 위해, 파피 할아버지가 즐겨 보는 <사랑과 영광과 미녀>의 대사: “그래, 나 살아 있었어, 자기. 나야, 내가 돌아왔어!” “세상에 이럴 수가, 말도 안 돼!”) —
좋은 이야기는 ‘동일시’와 ‘장래희망’을 동시에 불러오곤 합니다. 거울이 되고 창문이 되고 또 길이 되어요. 기린님이 그러했듯 저 역시 파니 뒤카세의 이야기 속에서 파피 할아버지와 페페 할아버지가 되고 또 꼬마곰이 되며 “진딧물도 별꽃도 없는 정원”을 가꾸고 싶어집니다. 그뿐일까요. 뒤카세의 귀엽고도 오밀조밀한 그림은 들여다보면 볼수록 새롭게 것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솜씨 좋은 파피 할아버지가 요리를 하는 장면에서는 부엌 구석구석에 눈길이 가지만, 특히 냉장고에 붙은 그림에 오래 머물렀어요. 표지에서 꼬마곰이 정원에 엎드려 그림을 그리고 있지요. 체리일까요, 나무에 열매를 그려 넣고 있어요. 그 완성본이 마치 정원과 다름없는 파피 할아버지네 부엌을 장식하고 있는 거예요. 이 책이 실은 현재진행형의 재현이 아니라 꼬마곰의 기억이라는 것임을 알고 보면, 그 장면은 더 뭉클해집니다. <창문 너머 어렴풋이>에서 신유진 작가는, 우리가 본다는 것이 실은 “빛에 의해 ‘보이는’ 것이지 ‘보는’ 것이 아니”며, 그리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언가를 본다는 것에 대해 씁니다. “망막이 아니라 기억의 반응”, “현상이 아니라 심상”으로 본 풍경들을.
“창가에서 보는 모든 풍경이 그렇듯 적절한 거리를 두고 알맞게 그리웠습니다. 여기, 빛이 없는 서향 창에서 나는 때때로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다녀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은 창 너머로, 바라보는 일만으로도 가능합니다.”
<곰들의 정원> 속 장면들 역시 돌아갈 수 없는 그리움의 시간이라 할 수 있어요. 그리고 꼬마곰이 창 너머로 바라본 기억 속에서 파피 할아버지는 그가 자주 머무르는 장소에, 하루에도 몇 번이고 들여다보는 곳에 아이의 그림을 붙여두었습니다. 자기 작품을 특별하고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을 아는 아이는 뿌듯하고 기쁜 마음으로 계속해서 그림을 그려나갔을까요. 실제로 파니 뒤카세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 책을 지었다고 했어요. 그러니 파피 할아버지가 간직한 꼬마곰의 체리나무 그림은 뒤카세의 유년 시절 작품일지도 모르죠.
그러나 이제 꼬마곰보다 파피 할아버지에 이입하고 마는 저는, 그 그림을 간직하는 애틋한 마음을 짚어보게 되고 제 공간과 마음에 자리한 어린이들의 그림을 떠올립니다. 제게 선물하겠다고 그려준 멋진 자동차, 저마다의 특징이 잘 살아 있는 저희 집 고양이들, 놀랍도록 세세히 구현된 상상 속 세계, 종이 한 장을 꽉 채운 색, 자유분방하고 삐뚤빼뚤한 선, 비율이 맞지 않는 재미난 묘사, 때로는 심심함이 때로는 즐거움이 묻어나는 그림들. 그때가 아니라면 다시 그릴 수 없을 찰나의 얼룩들. 그들은 잊을 테지만 저는 오래 기억하고 싶어요. 제가 기억함으로써 제 기억을 창 삼아 그들도 잠시나마 그 시절을 상기하게 된다면,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느끼고 품게 된다면, 삶에서 새로운 것들을 창조할 작은 힘이 되어준다면, 무엇보다 웃게 된다면, 무척 기쁠테죠. 훌쩍 자라난 꼬마곰에게는 분명 힘이 되었던 것 같아요. 번역 원고를 받고 입가에 미소가 걸린 채 읽어내려가다 마지막 문장에서 그만 작은 숨이 터졌습니다. 귀엽고도 사소한 기억들이 적층되어 “진딧물도 별꽃도 없는” 커다란 정원을 만들어냈듯, 꼬마곰은 그 정원을 집 삼아 새로운 길을 떠날 수 있을 거예요. “사랑과 긍정과 본보기를 강력한 끈”으로 이어나가는 신유진 작가의 말처럼, 끈을 길이라고 바꿔 읽어도 된다면.
“이제 나는 막 이어받은 끈 하나를 나만의 방식으로 다시 엮는다. 조금 더 튼튼하게, 더 자유롭게. 끈과 끈을 연결하며, 나는 조금 더 멀리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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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옮긴이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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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이면 지천에 작고 흰 별 모양의 꽃들이 핀다. 이름도 별꽃인 이 식물은 석죽과 별꽃속의 두해살이풀로, 길가에든 풀숲에든 저 홀로 피어나 잘도 자란다. 가꾸는 이 없이도 어디서나 자라는 풀을 잡초라 한다. 그러니 꼬마곰이 말하는 ‘진딧물도 별꽃도 없는 나의 정원’이란 아마도 이런 뜻이겠다. 벌레도 잡초도 생길 틈 없이 온 마음을 다해 정성스레 돌보는 정원. 혹은 이런 뜻일까.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상상 속의 정원. 이 특별한 정원에는 파피와 페페라는 이름의 두 세계가 혼재해 있다. 하나는 세심하고 단정한 질서의 세계다. 다른 하나는 흥과 낭만이 넘치는 감각의 세계다. 이들의 관계에 대해 독자는 알 길이 없다. 가족인지, 이웃인지, 친구인지, 혹은 연인인지. 그래서 좋다. 꼬마곰의 두 할아버지는 독자의 마음속에서 어떤 관계라도 될 수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두 사람의 삶이 그들의 털 색깔만큼이나 다르다는 것. 그 덕분에 꼬마곰은 각각의 방식으로 풍요로운 두 세계의 토양 모두에 깊게 뿌리내린 나무로 자란다. 두 가지 색 모두를 품고서. 정원의 모습으로 완성되는 생의 이야기들이 있다. 그곳에서는 언제나 한 아이가 자라고 있다. 생의 끝과 시작에 선 두 존재가 함께하는 순간은 찰나에 가깝다. 아이는 머잖아 정원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러고 나면 진딧물도 별꽃도 없는 낙원 하나를 마음에 품게 될 것이다. 그러다 언젠가 낙원 또한 잃게 될 것이다. 잃어버린 것들이 모여 아이가 만들 정원의 토양이 될 것이다. 그렇게 끝없이 이어질 길고 긴 시간의 매듭을 우리는 아마도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옮긴이 박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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