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인간에 대한 이토록 가없는 신뢰
두어 달 전 가까운 T시에서 영화로 상영 중인 뮤지컬 〈웃는 남자〉를 관람했다. 17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쓰인 이 대본은 어릴 때 인신매매단에 납치되어 입이 찢긴 아이가 기이하게 미소 짓는 모습의 광대가 되었다가 운명이 반전된 드라마다. ‘웃는 남자’라는 제목이 마음을 끌었다. 막을 내린 뮤지컬 대신 영화를 보게 됐지만 극장을 나서면서 나는 뜬금없이 나쓰메 소세키가 쓴 ‘웃는 사진’에 대한 글을 떠올렸다. 고질인 위궤양으로 집에서 요양하고 있을 때 어느 잡지사에서 사진을 찍고 싶다고 연락했다는데 웃는 사람의 사진만 가득 실린 잡지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당신의 잡지에 실리는 사진은 웃지 않으면 안 되지 않소?”
그렇지 않다고 하여 승낙했고 사진사가 집에 왔다. 두 컷을 찍었는데 그는 두 번 다 “약속을 했습니다만” 살짝 좀 웃어달라 부탁했다. 작가는 묵묵히 평소의 포즈를 취했고 나흘 뒤 우편으로 사진을 받았다. 사진사의 주문대로 웃는 듯한 낯선 사진이었다. 아무리 봐도 의구심이 들었는데 사진을 본 모두가 ‘웃는 것처럼 손질한 사진’이라 결론 내렸다는 얘기였다.
《도련님》은 나쓰메 소세키가 서른아홉 살에 쓴 첫 장편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가 발표되고 다음 해인 1906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1895년 스물아홉 살에 현의 작은 마을 마쓰야마 중학교 교사로 근무한 경험이 소재가 되었다. 튀김 메밀국수 네 그릇을 저녁에 먹고 다음 날 교실에 들어가면 칠판에 ‘튀김 선생’이라 크게 쓰여 있고 기차를 타고 온천에 가면 탕에서 학교 동료를 만나는 “좁아터진 동네”였다.
숙직실의 이부자리 속에 메뚜기를 잡아넣어 골탕 먹이는 학생들, 붉은 셔츠만 입는 모사꾼 교감, 연예인 분위기의 미술 교사 살살이 등 각양각색의 인물들과 좌충우돌하면서 “세상에 정직 말고 달리 무엇이 이기겠는가”라는 도련님의 신조를 고지식하게 밀고 나가는 해학적인 소설이다.
소설을 구성하는 필연적 요소이며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흥미 요소는 역시 캐릭터가 아닐까. 압화처럼 페이지 여기저기 흔적이 남아 있고 마지막까지 등장하는 기요 할멈은 주인공 도련님에게도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소설 제1장에 꽤 많이 서술된 늙은 하녀는 ‘장난꾸러기에 고집쟁이’인 막내아들을 골칫거리로 여기는 부모와 달리 도련님을 무턱대고 귀히 여겨주는 지원자다. “도련님은 성품이 바르고 참 착합니다” 칭찬하고 자기 쌈짓돈으로 간식과 공책도 사주고, 사랑에 눈이 먼 탓에 도련님은 “장차 출세해서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고” 굳게 믿는다. 입만 열면 호의의 말이지만 “뭐가 되긴 되겠구나” 자긍심을 가지니 든든한 병풍이었다.
도쿄를 떠나 시골에서 교사 생활을 할 때도 기요 할멈의 꿈을 꾸고 편지를 쓰며 수없이 옛일을 반추하니 그녀의 존재는 도련님의 뇌에 거의 붙박여 있는 듯하다. “이렇게 시골에 와보니 기요 할멈은 역시 훌륭한 사람이다. 그토록 마음씨 고운 여자는 일본 열도를 탈탈 털어도 잘 없다”라고 평가하고 낚시터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며 “돈만 있으면 기요 할멈과 이렇게 경치 좋은 곳으로 놀러 오고 싶다” 하며 그리워한다. 문득 5년 전 기요 할멈이 쓰라며 준 3엔을 떠올리며 “내가 돈을 갚지 않는 것은 기요 할멈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할멈이 나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해서다”라고 독백한다. 한 인간에 대한 이토록 가없는 신뢰라니. 성장기에 결여된 부모의 사랑을 대신 준 것에 대한 의리일까.
독자에게도 알려져 있다시피 소세키는 두 살 때 양자로 입양 보내지고 양부모의 이혼으로 아홉 살에 생가로 돌아온다. 작가의 회상에 따르면 친아버지는 막내아들을 가혹하게 취급하고, 형을 편애한 어머니에게서도 귀여움을 받지 못한 듯하다. 부모를 조부모로 알고 할아버지, 할머니라 불렀던 소세키가 안방에서 자고 있던 어느 날 밤 하녀가 머리맡에서 사실을 알려주는 회상 장면이 말년의 수필집 《유리문 안에서》에 그려져 있다. 연신 도련님을 불러 잠을 깨운 하녀는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귓속말하듯 속삭였다. 도련님이 할아버지 할머니라 생각하는 분이 사실은 도련님의 부모님이라고. “아마 저래서 이 집을 좋아하는 모양이야. 참 묘하지” 하고 두 분이 말씀하는 걸 좀 전에 들었기에 도련님한테 알려드리는 거라고. 하녀는 “아무한테도 말하시면 안 돼요. 아셨죠?” 다짐했다. 소년은 누운 채 꿈속의 말이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장래 국민 작가가 될 소년 긴노스케는 “응,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게”라고 말할 뿐이었다. 동화 같은 아름다운 장면이다.
“마음속으로는 굉장히 기뻤다. 그 기쁨은 사실을 가르쳐준 데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단지 하녀가 나에게 친절한 데서 오는 기쁨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토록 나를 기쁘게 해주었던 하녀의 이름과 얼굴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기억하고 있는 것은 오직 그 사람의 친절 그것뿐이다.”
“어차피 글러먹은 놈”이라고 아버지가 외면했던 아이가 하녀의 ‘친절’에 이토록 감응하다니. 나쓰메 소세키가 기요 할멈을 ‘자신의 일부’라고 여기는 것은 부모조차 모르는 자신의 진가를 알아본 그녀의 맑은 눈과 진정성에 대한 감동에서일 것이다. 기요 할멈의 햇살 같은 친절이 기쁨의 첫발로 외로운 아이에게 다가섰을 것이다.
소세키가 어린 시절 동네의 세이칸지 절에서 울리던 아침저녁 예불 소리를 추억하는 만년의 글에는 《도련님》에도 그려지지 않은 아이의 내면이 드러나 있다.
“가을부터 찬바람이 부는 겨울에 걸쳐 땡땡 울리는 세이칸지의 종소리는 내 마음 깊이 슬프고도 시린 그 무엇인가를 울려 넣는 듯 어린 내 마음을 외롭게 했다.”
작가로서도 희로애락의 삶은 녹록지 않았던 것 같다. “불유쾌함으로 가득 찬 인생을 터벅터벅 걷고 있는 나”라고 비감하게 표현했지만 사후에 일본에서 가장 사랑받는 국민 작가로 추앙받으니 천상에선 미소 짓고 있지 않을까. 기요 할멈이 맞는다. “장차 출세해서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고” 했던 기요 할멈의 예지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