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실력보다 체력이 더 뒷받침 되어야 하는 시절을 건너는”
2023.11.23. 목요일
같은 공연장에서
1세대 아이돌과 3세대 아이돌을
봐버렸다
ㅎㅇ's comment : 

 오늘 '못다 한 이야기'는 《아무튼, 아이돌》의 저자 윤혜은@y_sunsliver 님을 게스트 에디터로 초대했습니다. 혜은 님은 메신저 창이나 인스타그램 피드에서 신나는 기분을 표현하고 싶어 풍선 이모티콘을 누르는 와중에 한때 목숨처럼 지켰던 하늘색 풍선을 떠올리는 사람이에요. 초등학교 3학년 때 god 데뷔곡 '어머님께'에 입덕했고, 20년이 지난 어느날 본가 화장실에서 팬지오디 굿즈였던 god 수건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기도 하고요. 

 OPPA의 본명 중 한 글자와 출생년도를 조합한 'wildwan79'를 아직 메일 주소로 쓰고 있는 중인 저로서는, 그 시절 하늘색 풍선의 감성을 가장 현대적으로 재현한 블루투스 하풍봉을 들고 god 콘서트에 가는 혜은 님을 포함한 지인들이 조금은 부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저희 OPPA들은 팬들과 기싸움도 많이 하고 사회면에도 종종 나옵니다.) 데뷔 25주년을 맞이한 god 콘서트를 보며 "어느새 실력보다 체력이 더 뒷받침 되어야 하는 시절을 건너는 멤버들에게서 나는 그들이 통과한 세월을 체감하기보다 그들 작품에 쌓인 시간에 집중할 수 있었다."는 혜은 님의 후기는 1세대 아이돌을 좋아해본 적 있는 사람들이 한 번은 들었어야 할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던 혜은 님은 "마치 어느 시점부터 보다 만 마블 시리즈의 가장 최신편을 갑자기 관람하는 기분"을 느끼면서도 기꺼이 NCT 127 콘서트에 빠져듭니다. 이 모든 일이 겨우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 사이에 일어났다는 걸 듣고, 못다 한 이야기를 청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아무튼, 아이돌》에 적혀 있는 혜은 님의 사인을, 이 글을 읽어주시는 여러분들과도 나눕니다. "현생에 새롭게 도착할 '최애'라는 행복♥♥ 현생도, 불시에 들이닥칠 덕생도 순항만 하시기를!"



우리가 다시 들은 것

  인생의 어느 한 지점에서 문득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 왜 이렇게 됐지? 라는 생각이 들 때, 그 시작을 제대로 집어내기란 쉽지 않다. 인생에 끼어 있는 수많은 변수 하나하나에 우위를 정하며 거슬러 올라가는 게 불가능할뿐더러, 보통 이런 의문은 못마땅한 현재를 대신해서 탓하기 위한 구실로써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가끔 생각한다. (아이돌팝으로 대표되는) 케이팝을 씹고 뜯고 맛보다 주체할 수 없는 뻐렁침을 허공에 (SNS에) 소리 지른 뒤 까만 화면 위로 비친 내 얼굴에 다소 머쓱해질 때, 왜 이렇게까지 케이팝이 좋은 거지? 어떻게 아직도 좋아할 수 있지? 라고. 진심으로 의아하지만 뚜렷한 답을 찾을 필요는 없는 일. '어차피 이게 나다!' 라고 밀고 나갈 기세 같은 게 필요해서, 자조적일지언정 스스로 그러하기를 원한다는 걸 다시금 일러주기 위한 응원에 더 가깝다고 여겼으니까. 그러므로 자신의 궤적을 훑어보는 유쾌하지 않은 일에 단 하나 예외가 있다면, 그건 충실한 케이팝 리스너로서의 나를 찾아가 보는 일일 것이라고 막연히 짐작해 왔다.


  그리고 god의 데뷔 25주년을 기념하는 콘서트 [god’s MASTERPIECE]가 열리는 KSPO DOME(올림픽체조경기장) 한 구석에서 나는 어떤 주마등을 느끼고 있었다. 무대가 계속될수록 처음으로 한 앨범의 전곡을 참을성 있게 들어본 경험, 그리하여 익숙한 타이틀곡과는 또 다른 짜릿함으로 편애하게 될 노래를 발견한 순간, 아낌없이 열광하고 감탄하는 마음의 출발이 모두 god의 1집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말하자면 god의 25주년은 내 케이팝 라이프의 25주년과 일치한 셈이었다. 첫 최애로 우연히 god를 만난 뒤 그들의 디스코그래피를 따라가며 케이팝을 들었으므로. 운명처럼 정해져서 그대로 생활이 된 취향이었다.


  콘서트의 오프닝으로 '나는 알아(Produced by. 박준형)'를 선택했을 때부터 심상치 않았다. 이어서 ‘그 남자를 떠나’로 넘어갈 땐 빠르게 확신했다.* 이 콘서트는 (여전히 이 수식을 뿌듯해하는 내가 조금 웃기지만) 국민가수 타이틀을 단 25년 차 그룹의 아는 맛 파티가 아니라, 정확히 fangod를 향해 god가 응답하는 시간이 될 것 같다고 말이다. 시작부터 메가히트곡 대신 잠들어 있던 신곡을, 후렴 구간을 다름 아닌 윤계상과 김태우가 주고받으며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 특별히 반가워하고 애틋해 할 팬이 대중(그 경계를 구분하는 게 무의미한 그룹이라도)보다 많을 거란 기대를, 꼭 god도 한 것만 같았다.

* god 스페셜 앨범에 실린 '나는 알아(Produced by. 박준형)’(2019)는 god 4집 수록곡인 ‘나는 알아'(2001)를 그들이 18년만에 셀프 리메이크한 버전이다. 같은 앨범의 타이틀곡인 '그 남자를 떠나’는 발매 3년 후인 2022년 god 완전체 콘서트 [ON]에서야 첫 무대가 공개돼 현장을 뒤집어놓은 적이 있다. 


  그 기대란 사실 나의 것이었겠지만. 셋리스트 중 첫 두 곡만으로 남은 공연에 멋대로 김칫국을 마실 법한 시간이 내 안에 쌓여 있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관람에 앞서 공연 콘셉트인 '마스터피스'를 대하는 마음도 그랬다. 아무리 그만한 시간과 궤적을 지녔더라도 스스로를 걸작이라 일컬을 때에는 디스코그래피를 훑는 것 이상의 공연이어야 하지 않을까, 잠깐 우려했던 것도 같다. 그랬더라도 저항 없이 환호했을 텐데. 이런 너그러움이 실례라고 느껴질 만큼 잘 짜인 공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환영, 사랑, 축제, 조각, 그리고 걸작. 총 5부로 나눠진 관마다 멤버들이 도슨트가 되어 관객들에게 god 뮤지엄을 안내하는 구성은 정신을 놓을만하면 공연의 컨셉을 상기시켰다. 각각의 셋리스트를 멤버들이 복선처럼 흘려놓고 무대를 여는 스토리텔링은 주제에 충실하면서도 개별 공연을 높은 완성도로 수행하도록 보이지 않게 시간을 버는 영리한 기획이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나태하게 우려먹어도 지루하지 않은 커리어인데, 아티스트가 무대를 만들고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들이 지나온 시간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 새 공연을 올리기까지 팬들의 마음을 얼마나 섬세하게 관찰했는지, 이 사랑에 얼마나 성의 있게 응답하는지. 덕분에 어느새 실력보다 체력이 더 뒷받침 되어야 하는 시절을 건너는 멤버들에게서 나는 그들이 통과한 세월을 체감하기보다 그들 작품에 쌓인 시간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아주 세련되지는 않아도 밴드와 함께 처음부터 끝까지 올라이브 무대로 채워진, 충실함이 오롯이 전해지는 공연이라는 데에서 오는 감동이 컸다. 충실하면 허투루 할 수 없고, 허투루 하지 않기 위해서는 진심이 필요하니까. 


  그런 진심이 깜찍하게 구현된 무대들이 참 재미있었다. 윤계상이 부재한 시절에 발매한 6집 무대가 처음으로 등장했는데 하필 그게 '반대가 끌리는 이유'였고 제목에 걸맞게도 이 곡을 유구한 '톰과 제리' 관계성을 유지하는 데니와 태우 조합으로 풀어냈다. 팬들의 아픈 손가락 같은 앨범을 이렇게 유쾌하게 달래주다니… 현역 아이돌 버금가는 능청스러움에 웃음이 터지는 것도 잠시, 이내 대표곡 중 하나인 '0%'를 호영과 계상이 소화하는 충격이 장내를 휩쓸었다. "모두 우리 둘을 붙잡고 어떻게든 헤어지라고/축하는 커녕 안타까운 눈빛들만 주지만"이라는 금지된 사랑 노래를 1인 1리프트를 타고 어긋난 동선을 유지하며 부르는 두 사람 앞에서는 아직 '하늘색 풍선' 타임은 오지도 않았는데 단숨에 열네 살의 심정이 돼버렸고. 한편 'god 파티'를 솔로 무대로 채운 박준형의 춤사위와 그를 감싸는 랩 "바로 여기 마냥 흐르는 음악처럼 멈추지 않는 시간 속에 살아가리"로 마무리 되는 무대에서 느껴지던 뭉클한 무게랄지, ‘사랑해 그리고 기억해’ 마지막 후렴에서는 태우와 호영이 마이크도 반주도 없이 흘려보내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결국 눈물이 주륵.


  1+1+1+1+1의 합으로 다섯 명을 유지한 게 아니라 각자가 5인분 몫을 해냈기에 맞이할 수 있는 25주년이었구나, 그냥 알아진다. 한 시절을 나눈 사람들이 내 근사한 추억저장소 이상의 역할을 해내는 순간, 오래된 노래는 계속해서 새로운 무대가 된다. 저마다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룹으로 엮이는 시간에 대해서라면 모두 전문가가 되어주는 것이 이 연차의 미덕 같기도 하다. 진정 마스터피스로서의 god가 아닌, god의 마스터피스를 완성해준 오랜 팬들에게 헌사하는 공연이었음을, 곱씹을수록 그 의미가 진해진다.


  본무대의 마지막 곡은 ''이었다. 너무 어린 시절의 노래라는 점이 항상 놀랍다. 한참 이 노래를 들었던 때의 나는 물론이고, 그걸 불렀던 god도 너무 어렸다. 모두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지. 순식간에 25년이 지나갔다는 가뿐함마저 든다. ''은 god의 모든 노래 중 가장 그들다우면서도, 듣는 이로 하여금 (어쩌면 부르는 god 자신들조차도) god를 잠시 잊게 만드는 노래이기도 하다. "나는 왜 이 길에 서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이 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여전히 물어오는 저들이 있고 듣는 우리가 있다. 무대와 객석 사이의 거리를 잊고, 그저 각자의 삶의 층위를 헤아리기 위해 모였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뜨거운 마무리였다.

© 아이오케이컴퍼니 l god's MASTERPIE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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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지인들은 SNS에 쏟아낸 내 주접도 그날로 마무리될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4일 후, 나는 보란 듯이 KSPO DOME(올림픽체조경기장) 2-1 게이트로 재입장을 하게 된다. 같은 공연장 같은 층에서 NCT 127의 콘서트 [NEO CITY : SEOUL - THE UNITY] 관람이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 god 콘서트 좌석배치도ㅣ2층 24구역에서


© NCT 127 콘서트 좌석배치도ㅣ2층 2구역에서


  2층 24구역에서 2층 2구역으로, 본무대 시야를 조금 더 확보하는 블럭으로 가까워지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확실히 NCT는 god보다 내 현생의 덕질에 더 붙어 있는 그룹이기는 했다.


  올해는 별안간 NCT 공연에 꼬박꼬박 지분이 생긴 한 해였다.

•초여름, NCT DREAM의 [THE DREAM SHOW 2] 투어를 마무리하는 앙코르 콘서트를 관람했다.

•초가을, NCT 첫 단체 콘서트 [NCT NATION: To The World]을 관람했다.

•초겨울, NCT 127의 [NEO CITY : SEOUL - THE UNITY]를 관람했다. 

 

  이건 1년 간 내가 만난 여러 처음 중 가장 난해하고 난감한 처음들이다. 마치 하나로 공명하기가 무섭게 여럿으로 쪼개져 활동하는 NCT라는 그룹처럼. 평소 그들의 음악을 즐겨 듣기는 해도, 그룹에 대한 내 정서적 유대가 적은, 그런데 어느새 데뷔 8년 차인 아이돌의 공연을 관람하는 일은 마치 어느 시점부터 보다 만 마블 시리즈의 가장 최신편을 갑자기 관람하는 기분과 같았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올해 열린 NCT 산하의 공연을 모두 본 이후였지만). 이번 콘서트도 진입장벽을 각오했는데, 뜻밖에도 특정 멤버를 향한 관심에만 기대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번 관람을 호기심이 승리한 공연이었다고 회상한다.

 

  곧장 눈에 들어온 건 오른쪽을 장악하다시피 세운 전면 전광판이었다. 체조경기장은 전반적으로 좌석마다 시야 확보가 평균 이상은 되는 공간이지만, 조명이나 스피커 장치 등으로 가려지는 부분 없이 매끈하게 드러난 패널이 믿음직스러웠다. 후에 정면에서 바라본 본무대는 트라이앵글 형태로, 양 옆으로는 사다리꼴 모양의 전광판이 퍼즐처럼 맞춰 전체적으로 거대한 직사각형을 이루고 있었다. 며칠 전 공연에서는 본 적 없는, 돌출 무대로부터 왼쪽, 중앙, 오른쪽 구역으로 올라가도록 설치된 계단에도 자꾸만 시선이 갔다. 아직 그곳에 아무도 서 있지 않았지만, 경험한 공연 레퍼런스가 없으므로 머릿속으로 돌릴 시뮬레이션이 없는데도, 2층 관객석을 둥근 캣워크처럼 에워싼 까만 단상은 이미 설레기 충분한 거리감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오프닝을 채운 'Punch' 'Superhuman' 'Ay-Yo' '불시착'의 연결고리를 알지 못해도 괜찮았다. NCT 127 음악에 대한 몰이해는 문제가 아니라는 듯, 여백 없는 전광판으로 화려한 비주얼이 쏟아졌다. 조명과 연출은 그냥 압도당하면 되는 장치였다. 심장은 아직 어리둥절한데 시선을 휘어잡는 퍼포먼스에 조금 얼얼했던 기억이 난다. 예컨대 'Skyscraper(摩天樓; 마천루)'는 아예 초면인 노래였지만 마천루라는 부제답게 각각의 블럭 위에서 멤버들이 층층이 상승하는 역동성을 보여준 무대라서 감탄하며 보았다.

 

  나는 오랜 NCTzen처럼 NCT 127을 체험한 게 아니라 최근에 학습한 서사를 따라가야 했고, 모든 걸 알지 못해도 그저 공연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관찰할 만한 환경이길 바랐는데 이 공연은 그걸 가능케 한 구성이었다. 전광판이 거대한 카메라 이상의 무대가 돼주었기 때문이다. 화면 설정에 대한 팬들의 입장은 각기 다르겠지만(어설픈 시각 효과로 공력을 낭비하는 것보다야 깔끔하게 멤버들만 담는 게 나을 수 있으니까), 노랫말의 서사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데 적합한 그래픽이 많았던 것 같아 제법 괜찮은 볼거리였다. 만약 솔로나 유닛이 더해졌더라면 어떤 그림이 나왔을까, 살짝 궁금하기도 했지만 다인원 그룹에서 오직 단체 무대만으로 힘주어 달리는 지금의 장점이 더 컸겠지 싶다. 맞는 해석인지는 모르겠으나 "THE UNITY"라는 주제를 되새겨봐도 NCT 127로서의 결속을 돋보이는 데 초점을 맞춘 것처럼 느껴졌고.

 

  올해 발매한 정규 5집의 수록곡부터 멤버들은 본격적으로 무대 구석구석을 활용했다. 덕분에 가을 내내 흥얼거리던 'Yacht' 때는 가장 관심 있는 멤버의 이목구비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친구가 내 후기를 듣고는 '극왼블(공연 시 주로 왼쪽 블럭에서 퍼포먼스를 한다는 뜻)'인 멤버가 웬일로 오른쪽 구역을 갔냐며 축하한다고 했다. 저마다 고정된 무대 동선이 있을 텐데 이번 공연에서는 변경된 것 같다고 덧붙이면서. 그런데 이런 건 부수적인 행운이었다. 내게 진짜 행운은 이런 것이었다. 총 6회로 예정된 공연의 첫 회차를 관람했으므로 셋리스트 스포를 당하려야 당할 수 없어서 조마조마했는데, 작년 가을 발매한 정규 4집의 수록곡 '윤슬'을 한 번은 꼭 직접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유독 힘들었던 그해, 늦은 퇴근길마다 작게 반짝이는 천가를 걸으며 이 노래를 들으면 하루를 달리 기억하고 내일로 넘어갈 수 있었으니까. 다행히 오래 전부터 적립한 제 1의 목적은 이뤄졌고 이 노래만큼은 한 순간 천장이 열리거나 벽이 허물어져 야외 공연이 되기를 바랐지만… 대신 차분하고 단정한 라이브가 흘러나왔다. 헤드셋으로 들을 때처럼 마음이 미어지지 않고 오직 음악으로만 감상할 수 있는 시기를 맞이했다는 기쁨도 함께했다.

 

  낯선 호기심으로 달리는 공연은 계속됐다. 문득 문득 형광초록빛으로 넘실거리는 객석을 바라볼 때면, 느슨하게 연결돼 있는 기분에 외롭지 않았다. 얼마나 스며들 수 있을까? 불신하면서도 굳이 가보고 싶은 마음을 확인하면서. 가장 사적인 욕심이 채워지고 나니 남은 무대는 아무려나 더 여유롭게 즐기게 되었다. 무대 한가운데에서 리프트를 타고 떠올라 반투명 커튼 스크린에 가려진 채, 전광판 화면 보조 없이 부른 '신기루'는 제목 그대로 환영처럼 존재하는 듯한 연출이 과감해서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이후 회차부터는 전광판에 멤버들의 얼굴을 띄웠다고.) '윤슬' 만큼이나 기대했던 사적인 취향의 셋리스트를 만날 순 없었지만, 오케스트라로 편곡된 'Favorite (Vampire)'의 웅장함이 일말의 아쉬움을 태워주었다. 지독하게 빨간 의상, 빨간 화면, 컨페티(공연장에서 날리는 작은 색종이 조각)마저 빨갛게 터지는 불꽃 같은 광경으로.

 

  NCT 127은커녕, NCT DREAM이라든가 WayV라든가, 이 모든 것을 새롭게 합친 NCT U, 그리고 최근에 결성된 NCT NEW TEAM을 끝으로 마침내 종료된 무한확장 시스템까지……. 그러니까 여러분이 NCT의 환장할 세계관 같은 건 모르겠고 앞으로도 알고 싶지 않았더라도, 지난날 한 번쯤은 스치듯 들어봤을 '영웅 (英雄; Kick It)' '질주 (2 Baddies)' 'Fact Check (불가사의; 不可思議)'가 본무대 마지막 섹션으로 몰아쳤을 땐 그 에너지가 엄청나서 내가 다름 아닌 NCT 127 콘서트에 와 있다는 사실이 다시금 선명해졌다. 취향을 덮어버리는 '네오한' 힘에 박자를 맞추고 크게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 SM엔터테인먼트ㅣNCT 127 3RD TOUR THE UNITY

 

 3시간 가까이 네오시티를 관광하다 빨간 광역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길, 문득 'Chain''Cherry Bomb'으로 이어지는 셋리스트가 묘하게 인상적이었단 생각을 했다. 'Chain'의 마지막 가사는 "지금부터 새로 시작되는 역사"인데 이후 등장하는 'Cherry Bomb'으로 이들이 음악방송 첫 1위를 했다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 혹시 그래서인가? 라고, 확인할 길 없는 짐작에 홀로 만족하는 기분이 괜히 상쾌했다. 한 번도 완곡으로 들어본 적 없는 노래를 나란히 재생해 봤던 어느 금요일, 첫눈이 지나간 뒤 불어 닥친 강풍 속에서 "더워요"라고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올렸다. 그리고 못다 한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냈다.


월요일에는 대중문화를 큐레이션 하고
목요일에는 못다 한 이야기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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