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들과 함께 짓고 나누는 농사
가을이 한참 무르익어가는 10월의 어느날, PDC 교육을 받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밭 가장자리에서 곤충들이 살 곳을 만들었다. 이른바 ‘곤충호텔’ 짓기. 아이들이 어렸을 때 쓰던 원목 싱크대 장난감, 구멍 뚫린 벽돌, 나무 상자, 작은 토분, 대나무, 볏짚, 양파망, 나무조각 등등 주변에서 흔히 찾을 수 있고 재활용될 수 있는 재료들이 모였다. 밭에 모인 사람들은 원목 싱크대 장난감을 중심에 두고 나무 상자, 벽돌 등으로 공간을 크게 나누었다. 그리고 양파망에 볏짚을 담아 공간 사이 사이에 넣어주고, 작은 빈틈들을 나무조각 등으로 메꾸어 곤충들의 집을 지어주었다. 이러한 곤충호텔은 마르고 구석진 곳을 좋아하는 육식 곤충들의 서식처가 되어주며, 특히 식물의 수분을 도와주는 꿀벌, 나비, 나방 등의 겨울나기 집이 되어주기도 한다.
퍼머컬처에서는 곤충을 포함한 벌레를 채식 벌레와 육식 벌레로 나눈다. 채식 벌레는 응애, 진딧물, 배추흰나비 애벌레, 28점 무당벌레, 노린재, 민달팽이 등이 있는데, 이 벌레들은 식물의 살아 있는 잎을 먹기에 너무 번성하면 식물들의 식생에 커다란 피해를 입혀 보통 해충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채식 벌레에 의한 식물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채식 벌레를 잡아먹는 기생벌, 기생파리, 무당벌레, 사마귀, 거미류 등의 육식 벌레의 역할이 중요하다. 생태적으로 균형이 잡힌 밭을 지향하는 퍼머컬처 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의외로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해충 대처법을 잘 모른다고 한다. 왜냐하면 생태적으로 균형이 잡혀있는 밭은 천적(육식 벌레)으로 해충이 조절되어, 해충으로 인한 피해 경험이 적기 때문이다.
천적을 이용한 방충 방제는 문제가 일어났을 때 즉각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1~2년의 시간을 들여야 하는 것이기에 쉬운 방법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살충제의 악순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인내의 시간을 버틸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채식 벌레가 일시적으로 번성한 상태에서 손쉽게 살충제를 뿌리면, 그 천적인 무당벌레 등의 육식 벌레들까지 거의 죽인다. 빨리 번식하는 채식 벌레는 며칠 안에 그 수를 회복하지만, 번식에 에너지가 많이 드는 육식 벌레는 아주 적은 수만 살아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이때 다시 번성한 채식 벌레를 죽이기 위해 살충제를 투입하면 육식 벌레는 전멸되고, 이때부터 밭은 채식 벌레들의 천국이 된다. 더 많은 살충제를 뿌리고 또 뿌리는 살충제의 악순환!
거의 몇 년을 잡초만 자라던 밭을 뒤엎고 만든 나의 테라스 텃밭 1년 차 초반에는 달팽이와 진딧물에 의한 작물 피해가 있었다. 달팽이는 부지런히 손으로 잡아주고 진딧물은 제충국 등의 천연 원료로 만든 살충제를 희석해서 2~3번 뿌려주었다.(그러나 천연원료로 만든 살충제가 인간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해도 익충까지, 즉 모든 벌레들을 죽일 수 있으니 뿌리지 않는 게 좋다) 한 2~3개월 벌레로 인해 골치가 아팠는데, 어느 시점에서부터 달팽이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진딧물도 피해를 입은 작물 외에는 다른 작물로 옮겨붙지 않아 피해는 크지 않았다. 그리고 2년 차 올해 테라스 텃밭은 작년보다 눈에 띄는 벌레들은 더 많지만 다행히 별다른 벌레 피해가 없다. 아마 텃밭의 이 평온함은 다년생 작물의 비중과 채식 벌레들이 싫어하는 민트류 비중을 늘린 것이 주요한 이유일 것이다. 이에 덧붙어서 곤충 호텔까지는 아니어도 작년부터 텃밭 가장자리에 마른 가지, 마른 잎 등을 쌓아 두어 육식 곤충들의 서식지를 마련해 준 것도 테라스 텃밭의 생태 평형을 돕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생태계에서 아주 소수의 벌레만이 식물들에게 해를 끼치지 대부분의 벌레는 도움이 되거나 중립적이라고 한다. 벌레들 중에서도 특히 분해자라 불리는 토양생물들(노래기, 쥐며느리, 톡토기, 지렁이, 지네, 딱정벌레 등)은 유기물을 분해하여 식물이 잘 자랄 수 있는 비옥한 흙을 만들어주는 너무나 소중한 존재들이다. 어찌보면 벌레를 포함하는 동물들(발 달린 생명들과 새들)은 농사를 도와주는 하나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벌과 나비 등은 꽃가루를 옮겨 열매를 맺게 한다. 새는 잎을 뜯어 먹는 벌레들을 잡아먹고, 똥거름을 선물로 주기도 하며, 흙을 긁고 땅을 갈기도 한다. 닭, 오리, 토끼 등의 작은 동물들도 땅에 거름을 주고, 땅을 갈며, 풀을 베고, 부스러기나 음식 찌꺼기를 먹고, 민달팽이 등의 곤충을 잡고, 침입자가 나타나면 경고음을 울린다.
농사는 인간이 먹거리를 위해 특정 식물들을 키우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모든 것들의 연결되어 있다는 전일성을 강조하는 퍼머컬처는 생산자와 소비자, 분해자가 연결되어 에너지와 물질이 끝없이 돌고 도는 생태계의 순환 안에서 농사를 생각한다. 퍼머컬처의 윤리 중에는 “공정하게 분배하라”라는 윤리가 있다. 이는 밭에서 나오는 수확물은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을 포함하는 자연의 모든 것들이 함께 가꾼 것이기에, 그것은 인간들 사이의 공정한 분배를 넘어 동물, 자연과도 나누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나의 테라스 텃밭에는 까치, 비둘기, 참새, 그리고 이름 모를 새들이 날아온다. 이른 봄이 되면 테라스 가장자리에 놓인 대야에서 눈이 녹은 물을 마시고, 봄과 여름에는 식물들 사이사이의 흙을 쪼고 벌레를 잡아먹는다. 가을이면 쥐똥나무 가지에 앉아 쥐똥나무 열매를 따 먹고, 겨울이면 가지와 잎을 떨구고 휴식에 잠긴 식물들 옆에서 잠시 쉬었다 간다. 나의 테라스 텃밭이 퍼머컬처 밭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도시의 테라스 공간이라는 주어진 조건에서 곤충들, 새들과 함께하는 텃밭이 되고 있음이 나름 흡족하다.
그러나 아무리 퍼머컬처 농사라고 해도 동물들과 평화로울 수만은 없기에 염려되는 측면도 있다. 작년 가을에 탐방을 갔던 수락텃밭은 멧돼지로 인한 피해가 심해지고, 여러 방법을 써봐도 소용이 없자 누군가가 관에 신고를 하여 결국 멧돼지가 포수에 의해 사살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 사건 후 수락텃밭 공동체는 엄청난 고통 속에서 죽은 멧돼지를 위로하는 위령제를 지냈다. 수락텃밭이 경험한 것처럼 오늘날의 농사는 야생동물들의 먹이사슬과 서식처의 파괴로 고라니, 멧돼지 등과 언제든지 갈등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이 닥쳤을 때 농사를 짓는 입장에서 그들과의 공존과 평화는 어떻게 모색될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이는 벌레의 생태 균형을 도모하는 일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애씀을 요구하면서, 또 그렇다고 좋은 결과를 장담할 수도 없는 참으로 어려운 난제라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