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세상이 마치 어항 속 같다가, 물을 가르며 달리는 해저도시 같다가, 머리 위에 있던 공기가 물기운 때문에 후덥하게 무거워져서는 코랑 입 근처까지 내려와 있는 기분이 들어.

의 요새는 어때?

나는 한꺼번에 여러 ‘처음’들을 마주하면서, 그런대로 유야무야 어찌저찌 잘 해나가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마음이 달떠서 그런지, 선잠을 자고 입도 짧아졌다.

좋은 것 같으면서도 이게, 두 발바닥이 땅 위에 딱 붙어있는 안정의 느낌이라기보다는 그저 어버버 해. 좋은 느낌은 너무 분명한데 아직은 완전히 손에 익지 않아 자꾸자꾸 이것저것 매무새를 살펴보는 느낌이라 해야 하나.

새로 시작한 유미의 세포 2를 보면서 뜬금없는 장면에서 엉엉 울기도 하고, 의욕 넘치는 두 다리로 한강을 마구 걷기도 하는 나의 요즘이야. 6월이 정말 금방 갔다.

얼마 전에 말이야. 술을 마시고 정말 오랜만에 옛 습관이 다시 나왔어. 너도 알잖아, 나 술 마시면 어땠는지.

예전에 나, 술을 마시면 평소보다 (좋게 말하면) 사랑이 많아지는 타입이라 취할수록 보고 싶은 사람이 자꾸 떠올라 무작정 연락을 하는 피곤한 술버릇을 가지고 있었잖아. 연락을 해서는 보고싶다던지 사랑한다던지 끊임없이 고백하는 스타일.

어차피 평소에 그 말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 거기에서 거기니까 상관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기억이 가물한 전날의 통화목록이나 메시지 목록을 보면 얼마나 스스로를 패버리고(!) 싶었는지.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 중 하나가 술 먹고 나오는 모습이 그 사람의 가장 알맹이 같은 부분일 수 있다라는 건데, 그런 관점에서라면 괜한 시비가 아니라 사랑을 말하는 게 다음 날 창피할지언정 차라리 나을 수 있겠다 생각(혹은 합리화) 하며 그렇게 스스로에게 항마력이 생기려던 찰나였잖아. 그런데 이상하게 그 마음을 먹고 나서는 술을 마셔도 서서히 그런 식의 연락을 먼저 하지는 않게 되더라고? (그러나 술자리 중 우연히 연락 온 사람이 친하거나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한 번 이상은 보고 싶다고 함^^!)

오 역시 이렇게 나이에 걸맞는 격을 조금씩은 갖춰가는구나 믿고 있었는데, 역시, 사람의 버릇은 한 켠에 잠시 밀어 넣어두는 거라 언제건 불쑥 튀어나올 수 있는 거야.

그냥 연락에서 마무리했다면 오히려 나았겠지만, 이번엔 술을 얼마 먹지도 않았는데 취해서는 무작정 보고 싶은 사람을 찾아가버렸네. 같이 걷는다지만 혼자서는 사선으로 걷기도 하고 기분 좋아서 뭔가 뛰기도 했던 거 같은 게 드문드문 생각나 조금은 괴롭기도 하고. 어쨌건 많이 웃기는 했던 거 같은데 다음 날 그게 다 꿈같이 뿌연 필터 처리가 되어 있어서 다시 한번 나를 패고 싶었어. 완치된 줄 알았던 이런 버릇이 서른을 훌쩍 넘긴 지금 어째서 다시 나왔지 하고는.

받는 상대가 그걸 싫어하거나 힘들어한다면 당연히 안 하는 게 맞는 거야. 그건 안 하면 되는 건데, 그것과는 별개로 계속 전 날의 내 스스로가 싫고 열이 받길래 이게 왜 그럴까 생각해 봤거든?

먹은 내용물을 그대로 앞에서 게워내 보여준다던지 괜히 시비를 건다던지 속수무책으로 몸을 못 가눈 것도 아닌데. 분명 조금 더 많이 웃고 약간 더 까불고 살짝 더 애정 묻은 표현을 했을 텐데 말이야. 그럼 나쁜 건 아닌 거잖아?   

근데 왜 나는 그런 내가 싫었을까 생각해 보니, 아마 그 모습이 내가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점잖은 모습이 아니어서 였겠구나, 싶더라.

‘싫음’이 -10이고 ‘좋음’이 +10이라면, 내가 남에게 보이고 싶은 모습은 -2부터 +5까지의 영역. (그래도 좋은 걸 상대적으로 더 잘 표현하니까 점수를 조금 더 줘봄.)

0의 안정을 낀 채 그 사이에서 싫거나 힘들어도 크게 흔들림 없이 대하고, 너무 좋고 행복해도 그 이상으로는 팔랑거리지 않는, 그런 안정적이고 점잖은 모습이 내가 남에게 허용하고 싶은 내 모습인 거야.

그런데 술이 들어가서 좀 느슨해지면 내가 자꾸 6이고 8을 보여준다고 팔랑팔랑 걷고 헤실헤실 웃으니까. 그 모습을 잘 못 견디겠는 건가 봐 나는.

근데 아까도 말했지? 사람 버릇 어디 안 가고, 사람 원래 모습은 어디 안 가는 거. 그냥 싫어도 좋아도 그 사람의 알맹이는 몸속 어딘가에 잘 모셔져 있는 거야. 숨겼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모셔두고 있는 게 맞을지도. 언제건 그 모습께서 나오시고 싶으실 때 내 허락따윈 필요도 없이 불쑥 나오시니까 말이야. 내가 모시고 있는 나의 알맹이는 점잖지 않게 무게감 따위는 던져버리고 공기처럼 가볍게 호들갑을 떠는 그런 모습인가 봐.

그래서 어쨌건 결론은 뭐냐면, 그냥 예전에 스스로에게 항마력을 키우던 때를 떠올리면서 이제는 더더욱 그런가보다 하겠다는 거야. 모든 걸 다 컨트롤해 보려 하다가 자책만 늘리지 말고, 술이 들어가면 사랑한다는 말이 자꾸 나오는 사람들에게 그냥 그런대로 최대한 더 많이 표현해버리면 되지 뭐. 어쩌면 컨트롤 못했다고 속상해하기엔 꽤 좋은 술버릇일 지도.

언젠가 밤 11시쯤 뜬금없이 나한테서 나는 네가 너무 좋고 보고 싶다 라는 연락이 오면, 지금 이 친구의 알맹이 타임이구나, 하고 귀여이 여겨줘.   

불특정 미래 나의 호들갑에 대한 양해를 미리 구하며, 오늘 편지는 이렇게 마무리 해야겠다.

그럼

2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