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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론 앤 어라운드〉가 보내드리는

일과 삶을 성장시키는 에세이 뉴스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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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3' 시작 전까지 부정기적으로 보내드립니다.

강릉에서

일단 바다 쪽으로!


여기는 강릉 연곡이다. 당분간 머물 생각으로 왔다. 지난 열 달 동안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다. 12월 초, 사무실에 나가던 어느 날 영하 9도의 새벽, 얼어붙은 자동차에 시동을 걸다가 ‘아, 이건 아니야. 뭔가 약간은 잘못된 것 같아.’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오전 강릉의 숙소를 알아보고는 냅다 도망쳤다. 일단, 바다 쪽으로!


내가 빌린 집은 10층인데 해안도로 너머로 바다가 내려다보인다. 수평선은 완만하게 둥글고 흰 파도가 멀리서 달려온다. 아침에는 바다를 힘껏 밀어 올리며 떠오르는 해를 볼 수 있다. 일곱 시 무렵이면 먼바다가 연한 분홍빛으로 물든다. 나는 침대에서 부스스 빠져나와 가운을 걸치고 베란다로 가 창문을 살짝 열고 해 뜨는 바다를 엿본다. 문을 너무 많이 열면 추우니까 어쩔 수 없다. 지금은 한겨울이다. 바다에 왔으니 바다를 봐야지. 아무튼 오길 잘했어.


고단하고 바쁜 생에서 탈출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일거리를 아예 내버려 두고 오진 못했다. 아니 잔뜩 싸 들고 왔다고 해야 맞을 정도다. 노트북과 교정지, 이런저런 서류 뭉치를 백팩에 가득 담았다. 어제는 바다가 보이는 카페의 커다란 통유리 앞 책상에서 노트북으로 홈택스에 접속하다가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이지’ 하고는 화들짝 놀라 노트북을 덮었다.


예전부터 바다가 보이는 곳에 살아 보고 싶었다. (아마 누구나 이런 생각 한 번쯤 해보지 않았을까.) 딱히 이유는 없다. (이런 생각을 해본 대부분의 사람들이 딱히 이유는 없을 것이다.) 바다가 보이는 창문을 가진 집에서 사는 기분은 어떨까, 궁금했을 뿐이다. 그건 가끔 엄청난 부자로 태어났다면 어떤 기분으로 인생을 보낼까 하고 상상하는 것과 비슷하다. (돈을 많이 벌고 싶진 않아. 그건 피곤한 일이니까. 하지만 돈이 많았으면 좋겠어.)


연곡에서의 하루는 대충 이렇다. 아침에 일어나 바다를 엿본 후 커피 한 잔을 마시고는 외투를 입고 나가 바닷가를 성큼성큼 걷는다. 오늘은 어제보다 파도가 세군. 그러고는 날씨 앱으로 풍랑과 파고를 확인한다. 오늘은 바람은 북서-북(9-13m/s)으로 불고, 파고는 2~3.5m다. 음, 만만치 않은 날씨군. 그렇게 산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감자국이나 굴미역국 같은 음식을 만들어 따뜻한 아침을 먹고 책상 앞으로 가 노트북을 켠다. 오늘을 뭘 할까. 웹사이트를 뒤적거리다 이내 흥미를 잃고는 가지고 온 강석경의 경주 에세이 《이 고도를 사랑한다》를 펴고 읽는다. 다음에는 “영감이 날아다니는 신라 궁전 남쪽 동네”에서 며칠 살아 보고 싶어.


책을 읽다가 지루하면 낮잠을 잔다. 파도 소리를 듣고 있으면 신기하게도 잠이 잘 온다. 길게는 아니고 30분 정도만 잔다. 자고 일어나 부스럭부스럭 베란다로 가 다시 바다를 본다.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보고 있노라면 그럭저럭 인생을 잘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초콜릿 한 조각을 먹는다. 숙소 앞 카페에 갈 때도 있다. 어느새 단골 카페가 생겼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주인아저씨가 가볍게 목례를 한다. 내년에 찾아왔을 때도 딱 이 정도로만 아는 척해주면 좋겠다. 살면서 알게 된 사실 하나. 단골 카페나 레스토랑이 있고 주인이 슬쩍 아는 척을 해준다는 건 꽤 괜찮은 인생을 살고 있다는 증거다. 주인이 슬그머니 아는 척하며 쿠키나 새 메뉴를 슬쩍 내미는 건 분명 동행에게 으쓱해도 되는 일의 차원에 속한다. 그건 돈과 취향, 태도 등 당신이 가진 여러 가지가 꽤 훌륭하고 스무스하게 잘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바닷가에 산다는 건, 아주 화려하고 커다란 집에 사는 것과는 분명 다른 인생이다. 살면서 아주 부자로 한 번쯤 살아보는 것도 좋겠지만 그건 이미 불가능한 일이 됐고, 그냥 이렇게 바다가 보이는 집에서 약간 살아보는 날들이면 충분하지 싶다. 평생 살겠다는 것도 아니니까, 여름이면 습도도 높고 벌레도 많이 나오니 어쩌니 하는 불편은 그다지 신경 쓸 일도 아니다. 어쨌든 지금의 나는 매일 새벽 6시에 사무실로 나가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바다와는 대략 300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것 같은데, 베란다 문을 약 5센티미터만 열어 놓아도 집 안이 온통 파도 소리로 가득 찬다. 파도 소리가 이렇게 멀리까지 오는 줄은 몰랐다. 작업을 할 때는 주로 왈츠를 틀어놓는데, 이게 또 묘해서 파도와 왈츠가 어울려 배에 탄 듯한 느낌을 들게 해 준다. 나는 지금 배를 타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사실 다른 곳에서의 삶에 대한 환상과 기대는 없다. 이만큼 살아 본 사람은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그리도 나는 세상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이 사실을 더욱더 잘 알게 됐다. 세상 구석구석마다 고단과 피곤, 슬픔과 비탄, 무료와 권태가 숨어 있다는 것을. 런던과 오슬로, 오사카, 류블랴나, 루앙프라방, 케이프타운, 카이로, 리우데자네이루, 몰디브, 괌, 시애틀……. 세상 곳곳에는 그것들이 도사리고 우리를 덮칠 틈을 노리고 있다. 그것들에게서 도망칠 방법은 없다. 당하고 안고, 견디는 수밖에는. ‘사람이 사는 곳은 어디든 다 똑같다’는 말은 바로 이 뜻이다. 그러니까 여기에 사는 것과 거기에 사는 것의 차이는 다만 바다가 있고 없고의 차이일 뿐이다. 지하철이 있고 없고의 차이일 뿐이다. 덥거나 춥거나, 인터넷이 빠르거나 느리거나. 그 차이일 뿐이다.


내가 여기에 온 건 바다가 보이는 곳에 며칠 살아보고 싶었을 뿐이다. 다른 삶에 대한 기대같은 건 애초부터 없었다. 여행은 아무 것도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것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해결하지 못하는 건 그대로 두면 된다. 애써 해결하려 하지 말고, 영원히 해결되지 못하는 채로 남겨두면 된다. 그냥 모래로 슬쩍 덮어두고 해변을 따라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 문제가 해결이 된다면, 그건 행운이다. 운이 좋았다. 이렇게 생각하고 감사하는 거다.


나는 지금 연곡에 있고 약간 긴 여행을 떠나왔다. 여행이 아무 것도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여행을 왔다는 기분을 느끼고 있다는 것, 여기에서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일거리를 잔뜩 짊어 지고 왔지만 바다가 가까이 있고 문을 열면 파도 소리가 들리니까 괜찮다. 사랑이 우리에게 해준 게 뭐가 있을까. 사랑은 언제나 고통과 슬픔을 주지만 우리는 또 다시 사랑을 한다. 사랑에는 늘 실패하지만 또 사랑을 한다. 사랑을 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기 위해서다. 외롭고 고단하고 슬프지만 나는 지금 해변을 걷고 있다. 수평선 너머에서 파도가 끝없이 밀려오고 있다. 본질은 같지만 기분은 다르다.

여행작가가 본업이지만, 지금은 편집자와 기획자의 일을 더 많이 한다. 《음식은 맛있고 인생은 깊어갑니다》, 《어제보다 나은 사람》, 《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 《밤의 공항에서》 등을 썼다. @ssuchoi

💬 오랜만에 레터 보내드립니다. 강릉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

💬 '시즌 2'에 연재했던 '맛깊은 인생'이 음식은 맛있고 인생은 깊어갑니다라는 책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변종모 작가님의 '밀양 일기' 역시 당분간 나는 나와 함께 걷기로 했다 라는 제목의 책으로 나왔습니다. 변종모 작가님 책은 알라딘에서 친필 사인본을 판매 중입니다.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 '시즌 3'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더 좋은 콘텐츠로 찾아갈게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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