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독일 통일 과정과 한국에의 시사점

 

오준근(한반도평화연구원 연구위원,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대변인의 말실수 한 번, 기자의 오보 한 번으로 통일되었다.”
  “동독주민들의 데모로 통일되었다.”
  독일 통일이 가볍고 손쉽게 이루어진 것으로 취급되는 유튜브가 넘쳐나고 있다. 그러나 독일 통일은 오랜 시간의 준비와 과정이 축적되어 나온 결과물이다.

  나는 1985년 9월 30일 독일 Konrad-Adenauer 재단의 지원을 받아 독일 유학의 길에 올랐다. 1990년 10월 17일 박사학위 논문이 통과되었고, 11월 30일 귀국하였으니, 독일의 변혁과 통일의 현장을 생생하게 지켜본 산 증인이 된 셈이다. 내게 있어 독일의 통일은 국제·국내정치 뿐만 아니라 사회적·경제적·정서적 통합의 모든 요소가 짧은 기간에 총 망라된 엄청난 충격이었다. 독일이 통일된 날은 1990년 10월 3일이다. 현재 기준으로 32년이 되어간다. 한반도가 독일의 경우처럼 평화롭게 통일되고, 예멘과는 달리 내란이나 재분열의 조짐 없이 날이 갈수록 평화로운 통합을 공고하게 지속하는 날이 오기를 기도하며 이 글을 쓴다.

통일 전 동서독의 상황
  1986년 Konrad-Adenauer 재단이 주최하는 베를린 세미나에 참가하였다. Berlin은 동독의 한 가운데 있었다. 서베를린에 체류하면서 체크 포인트 챨리에서 25마르크를 주고 당일 비자를 받아 동베를린에서 반나절을 머무르며 동독 사람들과 사회적 분위기를 관찰할 수 있었다. 
  내가 진심으로 놀랐던 것은 '통일전에 서독사람에게 동독은 비용만 지불하면 언제나 갈 수 있는 곳'이라는 점이었다. 서독사람들이 동독에 있는 가족, 친척들에게 명절 때마다 선물을 보내는 일상, 서독 교회가 동독의 자매 교회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상, 이것이 서독과 동독의 통일 전 일상이었다. 동독 정부는 동독을 탈출하는 국민에게 총을 쏘았지만, 서독 정부는 동독과 교류하고자 하는 국민과 교회와 기업, 정당과 지방자치단체에게 별다른 제한을 가하지 않았다.
  남북한의 현 상황은 어떠한가? 대한민국의 여권은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국가를 무비자로 여행할 수 있는 '막강한' 여권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민이 여행하기를 원해도 정부의 승인 없이는 갈 수 없는 지역이 있다. 그곳이 바로 '북한'이다. 대한민국 국민이 정부의 승인 없이 북한지역을 방문할 경우, 북한에 선물을 보냈거나 북한 주민으로부터 선물을 받은 경우 3년이하의 징역형의 대상이 된다. 북한사람을 우연히 만났을 때 신고하지 않으면 300만원 이하의 과태료 대상이 된다.(주1)
  통일 전의 서독은 개인과 기업이, 정당과 지방자치단체가 동독을 방문하고, 접촉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았다. 서독사람들의 자유로운 출입은 동독 사람들의 민간차원의 경계심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대한민국은 이제 선진국을 자처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은 세계 시민이다. 정부 차원으로는 교류·협력이 어려울 수 있지만, 민간차원의 교류·협력을 국민들의 자유로운 의사결정에 맡기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 정부와 국민을 철저히 분리하고,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한 일체의 규제를 철폐하는 '규제완화' 내지 '규제철폐'를 선언하는 국민적 합의는 언제 이루어질 수 있을까? 국민적 역량을 철저히 신뢰함을 기반으로 하는 '대북한 규제철폐'가 통일의 기반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대한민국의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날이 속히 올 수 있기를 기도한다.

동독 주민들의 여행의 자유 회복 과정
  1988년까지의 동독은 현재의 북한과 그다지 다를 것 없는 철저한 '폐쇄' 국가였다. 1989년 3월 3일 당시 소련의 서기장이었던 고르바쵸프가 헝가리의 자유화를 승인하였던 것은 당시 엄청난 사건이었다. 소련의 통제하에 있던 동구권의 자유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가운데 동독 주민들도 이에 동참하기 시작하였다. 1989년 3월 13일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앞에 300명의 독일 주민이 모여서 “우리는 나가고 싶다(Wir wollen raus)”라는 단순한 구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하였다. 동독 정부는 데모대를 무자비하게 탄압하였고 다수를 체포했다. 이 데모가 동독 주민들의 여행의 자유를 향한 전국적 데모 행진의 기폭제가 되었다.
  1989년 9월 11일 헝가리 정부는 오스트리아 국경을 전면 개방하였다. 이날 하루 동안 동독주민 3천명이 개방된 국경을 통과하여 서독으로 향했다. 9월 한 달 동안 서독으로 들어온 동독 주민이 2만5천명에 달했다.(주2) 
  나는 지금도 서독 정부의 침착한 대응을 잊을 수 없다. 서독 정부는 “밀려 들어오는” 동독 주민들을 그들의 희망에 따라 독일 연방의 각 주에 보냈다. 각 주 정부는 각 기초자치단체의 협조를 받아 동독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서독 사회에 편입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라이프치히에서 3백명으로 시작된 동독 주민들의 데모 행렬은 동독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1989년 11월 4일의 베를린 데모는 50만명을 추산될 정도였다. 1989년 11월 9일 동독 정부는 여행의 자유를 허용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보도자료에 날짜가 명기되어 있지 않아서 “언제부터?”라는 기자의 질문에 무심코 “즉시”라고 발언한 것이 기폭제가 되어 동독 주민들은 베를린 장벽으로 달려갔고, 이날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내렸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가 곧 독일의 통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베를린 장벽'은 동독 주민들을 가두어 둔 것이었다. 장벽의 붕괴는 동독 주민의 여행의 자유를 회복시킨 사건이었다.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 북한 주민들에게 한국으로의 여행을 갈망하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있는가를 반문하곤 한다. 대한민국에는 현재 3만여명의 탈북민이 거주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Covid-19이후 북한의 국경이 보다 철저히 봉쇄되면서 탈북민의 숫자는 그다지 증가하지 않고 있다. 동독의 민주화, 이로부터 이어진 통일의 과정은 '여행의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북한 주민들이 자유로운 여행을 갈망하고, 이 갈망이 체제변화의 동력이 되도록 이끌 방법은 없을까를 생각하곤 한다. 탈북민이 아무리 급증하더라도 이들 모두가 대한민국에 자연스럽게 정착할 수 있는 시스템을 우리는 갖추고 있는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탈북민이 함께 섞여 사는 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문화적 정서가 형성되어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하여야 할까?
  당시 현지에서 경험한 나의 생각은 '철저한 분권이 완전한 통일과 연결된다'는 역설이었다. 독일의 민주주의는 기초자치단체에서 시작된다. 시·군정부가 기본으로 형성되고, 그 위에 주정부가 형성된다. 바이에른(Bayern)주와 같은 각 주 하나 하나가 헌법과 법률을 가진 완전한 국가 체제를 형성하고 있다. 독일연방공화국은 이들의 연합체이다. 서독의 시와 군 들은 동독에 자매 시와 군을 가지고 있었다. 통일 전에 동독과 서독의 교류를 담당했던 최전선에 서독의 교회가 있었다. 교회는 동독의 자매 교회에 선교사를 파견하였다. 통일 독일의 총리로서 2005년부터 2021년까지 16년간 독일을 이끌었던 앙겔라 메르켈의 아버지 카스너는 서독 함부르크에서 동독에 파견된 선교사였다. 그는 철저한 탄압과 통제 속에 힘겨운 목회자의 생활을 하며 앙겔라를 키워냈다. 동독에 민주화의 물결이 일었을 때 이를 격랑으로 만든 것은 동독의 지역 교회였고, 앙겔라와 같은 지방 정치인들이었다. 서독의 교회들과 서독의 지방정당들은 자신들이 자매결연을 맺은 지역에 인력을 파견하였고, 파견된 인력들을 통하여 재정을 지원하였다. 이들은 동독 각 지역의 리더들을 발굴하고 철저하게 도움을 주었다.
  대한민국에는 북한선교를 실천하기 위하여 기도하며 다각적인 방법을 모색하는 많은 교회와 선교단체가 있다. 이들이 북한 각 지역과 교회를 도와가며 복음을 전하는 일을 지지하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2022년 대한민국의 지방선거가 있었다. 대한민국의 15개 시도가 각각 제주도와 같은 '특별자치도'로 거듭나고 이들이 각 지역의 특징에 맞는 독립적인 자치를 형성해 나가는 역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다면 대한민국이 더욱 성숙한 민주국가로 격상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시장, 군수, 구청장에게 북한에 자매 시·군·구를 가질 수 있도록 충분한 자유를 주고, 이들이 북한의 자매 시·군·구를 오가면서 북한 주민들에게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꿈을 가득 심어주기를 희망한다. 

독일의 통일과정
  1990년 4월 12일 동독의회에서 로타 드 메지에르(Lothar de Maizière)가 동독의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독일 통일이 1990년 10월 3일에 이루어졌으므로 동독 민주정부 수립으로부터 독일의 통일까지 173일이 걸린 셈이다. 동독주민이 여행의 자유를 갖게 된 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일, 동독에 민주 정부가 수립된 일이 곧 동독과 서독의 통일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서독과 동독이 통일에 이르기 위하여는 국제정치적 및 국내정치적으로 다양한 노력이 수반되어야 했다. 
  국제정치적으로 독일이 분단된 이유는 1·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국가였기 때문이었다. 종전 후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4개국에 의하여 분할 점령되었다가, 서독과 동독이 각각 출범하였기 때문이다. 헬무트 콜 당시 서독 수상은 이들 4개국과 동서독이 포함된 6자회담을 수차에 걸쳐 개최하였다. 회담 전후에 각국 정부의 개별적 양해를 받기 위하여 이들 4개국을 개별적으로 방문해야 했다. 당시 서독이 나토의 주축에 해당하였기 때문에 소련의 양해와 동독지역에 주둔했던 소련군을 통일 전에 철수시키는 일은 엄청난 외교적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국내정치적으로 즉각적 통일론과 점진적 통일론이 대립하였다. “통일을 서두를 필요가 있는가?”, “세부적인 사항(Detail)을 구체적으로 고려하여 통일로 인한 후유증과 실수를 줄이려면 보다 철저한 준비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여론이 만만치 않았다. 먼저 통일방식의 선택이 필요했다. 서독의 경우 헌법을 제정할 때 통일을 대비하여 헌법이라 하지 않고 기본법(Grundgesetz)이라고 명칭을 정했다. 독일기본법은 두 가지 통일방식을 규정하고 있었다.(주3) 동서독 정부는 동독을 구성하였던 다섯 개의 주가 각각 독일 연방에 가입함으로써 동독이 해체되는 통일방안에 합의하였다. 동독의 각 지역이 다섯 개의 독립적인 국가 체제를 유지할 수 있고, 동독의 정치인이 자신의 출신 지역에서 자치적으로 정치활동을 지속함이 허용되었다는 점이 합의를 이끄는 가장 중요한 동력이었다.
  통일방식은 합의 되었지만 서독의 법령과 유럽공동체 규범의 동독지역에 대한 적용 범위, 서독의 지역계획, 경제계획, 교육계획 등 각종 계획의 실천 범위, 동독의 각 주와 기초자치단체의 재구성 및 그 행정체계, 동독 지역의 도로, 하천, 공항 등 사회 간접자본의 점검, 재구성 및 지원 문제, 주택과 학교의 점검 및 지원 문제, 동독 정부가 다른 나라 및 기업과 체결하였던 조약 및 각종 계약의 효력 및 그 승계 문제 등 다양한 현안에 대한 세부적 합의가 필요하였다. 더 나아가 동독에 재산을 남겨둔 서독사람 들의 재산권 회복 문제, 동독과 서독 화폐의 교환 비율 문제, 사회보장문제, 의료문제 등 통일 비용의 계산과 맞물려 있는 매우 전문적이면서도 구체적인 실무적 협상이 필요한 현안이 산적해 있었다. 동독과 서독의 공무원과 다양한 실무전문가들이 모여 협상을 거듭한 결과 172일 후인 1990년 10월 2일 통일조약과 164건의 법률이 동독과 서독의 국회를 통과하여 공포됨으로써 독일의 통일은 완성되었다.

  남북한의 상황을 생각해 보자. “남북한 주민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게 되면 즉시 통일이 된다.”, “북한에 자유총선에 의하여 민주정권이 수립되면 즉시 통일이 된다.”는 단순한 생각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걱정한다. 남북한과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가 참여하는 6자회담에서 통일을 위한 협력을 이끌어냄에 있어 문제가 될 수 있는 국제적 현안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발굴하고 대안을 준비하고 있는가, 남북한의 정치인이 모두 납득하고 합의할 수 있는 통일방식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가, 북한 행정구역과 선거구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북한지역에 남겨진 재산권 문제, 남북한 화폐의 교환비율, 북한 주민의 연금, 의료 보호등 각종 사회보장 문제 등 통일과 관계된 현안 하나하나에 대한 구체적인 공감대를 형성해 나가면서 통일을 체계적으로 주도면밀하게 준비하는 대한민국 사회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주1)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 제28조 내지 제29조
(주2) 이 글에 인용된 날짜 및 숫자는 https://deutsche-einheit-1990.de 에 기초하였다. 
(주3) 첫 번째는 제23조에 의한 통일방식이었다. “이 헌법은 우선(zunächst)…바이에른(Bayern)주…(이하 서독 9개 주명칭 생략)에 적용된다. 다른 지역은 독일 연방에 가입함으로써 그 효력이 발생한다.” 두 번째 방식은 제146조의 “독일 국민 전체의 합의에 의한 전면적 헌법개정” 방식이었다. 두 방식 중 첫 번째 방식이 채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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