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인스피아 저널, (19), 2021.12.8, 1-8 (8pages)

(Source)     Journal of the Inspia

2.제텔카스텐이란?

3.메모 상자의 효용 : 구조적 해찰

4.각자의 메모, 각자의 생산성 : 덴츠 B팀의 경우

5.맺음말

안녕하세요. 연구자님. 느릿하게 해찰하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 김스피입니다.👤 

오래 전 해리포터 영화를 보았을 때 제 마음을 사로잡았던 장면이 있었습니다. 호그와트 교장 덤블도어가 자신의 집무실에 놓인 세숫대야같은 장치를 들여다보고 있는 장면이었는데요. 자신의 관자놀이에 마법지팡이를 가져다댄 후 둥그런 '펜시브'에 흘려넣으면 자유자재로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고 생각을 재조합할 수 있었습니다. 줄거리 상 별로 중요한 장면은 아니었지만, 어린 맘에도 그 장면을 보면서 두근거렸습니다. '만약 저런 장치가 있다면 일기를 쓰느라 팔이 아프지 않아도 될텐데!' 물론 조금 더 나이를 먹은 후에도 여전히 그 장치는 매력적이었습니다. '만약 저런 장치가 있다면 읽은 책이나 자료를 뭐든지 다 소화해서 글로 풀어내기 편할텐데!' 

사람은 '잊어버리는' 동물입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메모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어떤 감상이 떠올랐을 때 곧장 적어두지 않으면 마치 물에 씻은 솜사탕처럼 금세 사라져버리기 때문이죠. 

'사회적 체계 이론'으로 유명한 독일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은 그의 학문적 성과 외에도 엄청난 다작과 그것을 가능하게 한 독자적인 메모법으로도 유명합니다. 수만개의 메모 카드들로 이루어진 메모 상자는 그의 '두번째 뇌'였습니다. 그는 평소에 꾸준히 책을 읽으며 자신의 생각을 메모, 체계적으로 정리했고 이를 통해 다양한 독창적인 글을 써낼 수 있었습니다. 

ㄱ.만들기 = 새로 알게된 착상을 완결된 글의 형식으로 간결하게 정리한다. 

ㄴ.위치짓기 = 만들어진 메모를 기존 노트 안에 위치짓는다. 

ㄷ.연결하기 = 특정 주제에 관한 메모가 충분히 모이면 이를 글로 연결한다. 

이 중에서 제가 주목한 부분은 두가지였는데요. '완결된 글의 형식'이라는 점과 '연결하기'였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나름의 메모법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만, 이 두가지가 어찌보면 니클라스 루만식 메모법을 특별하게 해준 핵심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우선 '완결된 글의 형식'이라는 점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메모를 할 때 '대충'하곤 하죠. 보통 어떤 것을 하는 도중에 메모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대표적으로는 '책을 읽으면서'입니다. 혹은 설거지를 하다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퐁퐁이 묻은 고무장갑을 벗고(!) 잠깐 메모장에 글씨를 휘갈긴다거나 걷거나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다가 카톡 나와의 대화창을 열어두고 간단하게 메모를 합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 완결된 글의 형태가 아니기 때문에 나중에 봤을 때 도통 무슨 생각으로 끄적여 놓은 건지 알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럴 때면 과거의 나에게 따져묻고 싶은 기분이 되기도 하죠(이봐 대체 뭐라고 쓴 거야!)

저 역시 이런 경우가 많아서 언젠가부터는 책을 읽고 나서 최대한 아이디어를 초벌 독후감 수준으로 남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책의 북마크나 밑줄 그은 부분만 보아서는 나중에 보고서도 대체 이걸 내가 왜 밑줄을 쳐놓은건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거든요. 

요는 나중에 다시 책을 들춰보지 않아도 '써먹을 수 있도록' 아이디어를 정리하는 것입니다. 제텔카스텐 메모법을 분석한 숀케 아렌스 박사의 책 <제텔카스텐-글쓰는 인간을 위한 두번째 뇌>에서 니클라스 루만의 독서습관 중 눈에 띄었던 것은 두가지였습니다. 

첫째, 한번 읽은 책은 다시 읽지 않는다. 

둘째, 책에 낙서하지 않고 모든 것은 메모에 적는다. 

니클라스 루만의 이 특이한 독서법의 핵심은 결국 메모법과도 연결이 되는데요. '완결된 형태로' 착상을 메모하기 때문에 웬만하면 두번 다시 같은 책을 펼쳐보지 않아도 모든 것을 소화-기억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차피 착상은 완결된 형태의 글로 풀어내기 때문에 굳이 책에 낙서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죠. 개인적으로는 여백에 주렁주렁 낙서하며 읽기 위해 책을 사는 편이라 이 부분을 읽고는 놀랐는데, 확실히 별개의 메모로 만들어두면 책을 굳이 들춰보지 않아도 책 속 착상을 관리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아보였습니다. 꼭 책이 아닌 기사나 대화, 영화 등에서 얻은 착상도 주제별로 관리할 수 있는 점도 좋습니다.

이렇게 주제별로 모인 메모들은 '영구보존메모'로 나중에도 관련 주제가 나올 때마다 꺼내어 업데이트할 수 있습니다.

관심사를 정리한 뒤에는 한걸음 더 나아가 반증적 사실을 찾을 준비를 하면 된다[...]확증적이기만 한 데이터와는 달리, 반증적 데이터는 메모 상자 안에서 더 많은 연결 가능성과 논의 가능성을 열어주기 때문이다[...]흥미로운 텍스트는 편향적인 메모와 외견상 적합해보이는 인용문을 모아둔 곳보다는 찬반 의견이 생생히 오가는 논의의 장에서 훨씬 쉽게 발전한다.

저는 <제텔카스텐> 등 관련 자료들을 읽으며 기술적인 부분보다는 자료를 대하는 자세나 리서치 쪽에 더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메모 상자 방법론의 큰 효용 중 하나는 역시 체계적인 해찰이 가능하다는 점일 것 같습니다.

한 권의 책을 단위로 메모를 적는다면, 그 책에서의 '해찰'은 상대적으로 잊힐 가능성이 큽니다. 예를 들면 '물고기에 대한 책'의 내용을 제목 아래에 정리한다면 먼 훗날 그 책을 다시 거들떠 보지 않는 이상 기억 속에선 물고기라는 단어가 가장 크게 남겠죠.

저의 독서경험을 예로 들어본다면, 폴 그린버그의 논픽션 <포피시four fishes>는 제목 그대로 대구, 참치 등 네 종류의 물고기에 대한 책인데요. 이 책을 읽을 때 저는 완전 엉뚱하게도 책에서 짤막하게 등장한 9.11 관련 묘사(<참치> 챕터)에 눈이 끌렸었습니다. 저자는 9.11 테러 당일 배심원으로 출석하기 위해 뉴욕에 갔다가 먼 발치에서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게 되는데요. 이 부분의 서술은 놀라울만큼 감정이 배제되어있으며, 그는 이후 약 2주동안 집에 틀어박혀 '참치 웹사이트'에 골몰하는데 저는 어떤 과잉된 감정의 표현보다도 이러한 건조한 서술이 9.11에 대한 미국인들의 충격을 잘 드러내보여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밖에도 그의 치밀하고 촘촘한 취재를 보면서 '현장과 학계를 연결하는 덕후같은 리베로형 작가(기자는 아닌데 전업 작가도 아닌)'에 대한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메모 상자는 자신이 읽은 내용을 구조적으로 정리하는 것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핵심 방법론을 숙지한 채로 자기 관심사, 작업에 맞는 메모법을 만들어내는 것이 최선일 것입니다. 

위에선 주로 글쓰기라는 키워드를 통해 메모를 살펴봤지만, 정리-구획된 메모 정리의 방식은 비단 학자나 작가에게만 필요한 스킬은 아닙니다.

실제로 광고회사 덴츠 B팀의 리서치와 메모 방식은 제텔카스텐과 유사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일본 광고회사 덴츠의 'B팀' 팀원들은 모두 '검색해서 나오지 않는 정보'를 모으기 위해 각자 카드 형식으로 보고용 자료를 정리합니다. 예를 들면 '영국에서 진행된 이모지 피켓 시위'라는 키워드에 대해 리서치한다면, 영국에서 피켓에 문장 대신 이모티콘만을 사용한 시위가 열렸다는 사실, 그리고 이것을 '큐레이션'한 이유나 배경 등에 대한 지식을 간단하게 적는 것입니다. 

이런 리서치를 '잠재력 채집' 작업이라고 부르는데요. 이렇게 모인 자료들이 이후 연결되면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수 있는 잠재력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카드형식으로 메모를 공유할 경우 세 가지 이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자료를 '완결된 형태로' 가공하는 과정에서 정보를 한번 더 체화하게 된다는 것 둘째, 포맷이 정해져있기 때문에 형식에 대한 부담감 없이 자주 아이디어를 발굴-정리하는 습관을 들이기 좋다는 것. 마지막으로 일람하기 좋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모인 수천개의 메모들은 팀원들 사이에 '공유'되면서 창조적 영감의 재료가 됩니다. 

제텔카스텐의 경우 개인 머릿 속에서의 작동이었다면, 이것이 팀원들 사이에 공유될 경우 팀원들 내에서의 '연결짓기'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죠.

이번 해찰을 계기로, 다양한 현장에서 자기만의 창조적인 일을 위해 힘쓰고 계신 연구자님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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