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쯤 군 복무를 마치고 종이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2024년 2월 넷째 주: 7호
[안내] 지난주에는 뉴스레터를 발송하지 못했습니다. 〈복음과상황〉 지령 400호 기념호를 마감하느라 분주했고, 원고 취합에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구독자님께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죄송합니다😢 대신, 이번 주 뉴스레터는 조금 일찍 보내드립니다. 그동안 인사말 포함 3편 이상의 글을 보내 드렸는데요. 이제는 글 개수가 줄더라도 발송일을 지키는 것을 우선시해서 뉴스레터를 발행하려 합니다.
안녕하세요. 이예은입니다.

지난 한 주 어떠셨나요? 조금 늦은 감이 있는 안부 인사입니다만, 설 연휴도 잘 보내셨나요? 저는 오랜만에 친척들도 다 같이 만나고, 엄마와 단둘이 시간도 보냈습니다.

엄마와 긴 대화를 나눌 때면, 무조건 나오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이야기, 아빠 이야기, 그리고 오빠와 제 어릴 적 이야기죠. 같은 이야기여도 매번 재미있게 듣게 됩니다. 조금씩 바뀌는 포인트들을 찾아내면서요.

올해도 어김없이 제 어린 시절 에피소드를 들었습니다. 제가 걸음마를 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혼자 계단을 오르겠다고 우기다가 결국 넘어져 턱을 꿰맨 일, 오빠가 혼날 때면 책을 거꾸로 들고서 읽는 척하고 있던 일 등, 저는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에피소드였죠. 수없이 들었던 터인데, 이번에는 문득 엄마 마음속에 깊이 남은 이야기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에는 매 순간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대부분은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리잖아요. 하지만 어떤 이야기들은 마음속 어딘가에 계속 남아있죠. 엄마에게는, 제 예전 모습들이 그런 이야기인가 봅니다.

엄마의 말과 생각이 얹어져 다시 만들어진 이야기는 제 마음에도 남습니다.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할 때나 지켜왔던 신념이 흔들리는 일이 생길 때면, 엄마가 해주신 이야기들을 떠올릴 것입니다. 제가 또 살아가는 데도 큰 힘이 되겠죠. 수많은 이야기가 저에게 남아 지금의 제 모습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여러분을 만든 이야기들이 궁금합니다. 오늘도 이야기를 짓는 사람들의 글을 보내드립니다. 종이 공장에서 일한 경험으로 시작하는 이범진 편집장님의 글과 ‘쇄’와 ‘판’의 의미를 고찰하는 이재원 대표님의 글입니다.


표지와 구약 사이
이범진

  
20년 전쯤 군 복무를 마치고 종이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여러 장의 종이에 풀칠하고 합쳐 ‘두꺼운 종이’(합지)로 만들거나 도무송 작업을 하는 곳이었어요. ‘도무송’은 가수 이름 같지만, ‘톰슨 프레스’라는 인쇄기를 일본어로 발음한 것이라 합니다. 아무튼 이름이 어려운데요. 점선으로 칼자국을 내어 모양대로 잘 뜯어지도록 찍어내는 작업입니다. 종이 인형이나 딱지를 생각하면 금방 이해가 되겠지요.

합지를 만드는 작업은 예민한 과정이라 저는 근처에도 가지 못했고요. 주로 도무송 작업을 옆에서 도왔습니다. 기계 옆에서 기장님께 5장씩 종이를 집어 건네는 일이었어요. 너무 적게 드리면 칼선이 들어가자마자 종이가 후두둑 다 해체되어 버리고요, 너무 많이 드리면 칼선이 들어가다 말지요. 똑딱, 똑딱, 똑딱…. 리듬에 맞춰 드리지 않으면 혼나서, 손가락 끝 감각에 집중하며 다섯 장씩 떼어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분명 전역을 했는데 다시 입대한 듯한 이 느낌은?)
일주일에 한두 번은 트럭을 타고 도무송 작업이 된 합지를 배달했습니다. “회사 이름이 성경이네요?” “응, 성경 만드는 곳이야.” 그제야 우리가 배달하는 종이가 성경책에 사용되는 종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성경책 맨 앞과 맨 뒤, 주기도문, 사도신경, 십계명 등이 써있는 그 페이지 말입니다. 성경책 표지(가죽)와 붙어 있으면서도 인쇄가 잘되어야 하기에 합지를 사용해야 하고, 사이즈를 맞추기 위해 도무송 작업이 필요했던 거지요. 그곳 외에도 성경책 표지 작업을 하는 납품처가 몇 군데 더 있었다고 기억합니다.

이 사실을 알고부터 제가 하는 일의 가치를 되새겼다면 좋았겠지만, 일하면서는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고요. 성경책에 붙은 합지의 사도신경을 볼 때, 가끔 그때를 떠올리곤 합니다. 그 공장은 아직도 건재합니다만, 성경책 작업을 하던 거래처들은 대폭 줄어들었겠지요. 많은 사람이 스마트폰으로 성경을 읽게 되면서, 성경책 판매량도 급감하였다고 하니까요.

지난 1월 1일에는 오랜만에 어르신들이 많은 모교회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10명 중 8명이 어르신들인 대형교회였는데요. 10명 중 9명이 스마트폰으로 설교 본문을 읽고 있었습니다. 예배 중간중간 끊임없이 진동 소리가 들려와 신경이 곤두섰던 기억이 납니다. 취향과 성향 때문이겠지만, 스마트폰으로 성경을 읽으면 저는 자꾸 이 도구로 다른 게 하고 싶어져요. 영상 시청, 대화 용도로 쓰던 도구로 성경을 읽으려 하니 좀이 쑤시는 느낌입니다.
몇 년 전부터 다시 종이 성경책을 사용합니다. 밑줄도 긋고, 메모도 합니다. 주기도문과 십계명 쪽도 펼쳐 봅니다. 서점에서 여러 판형의 성경책이 진열되어있는 것을 보면 괜히 선물도 하고 싶어지고요. 비록 어머니 무릎 위에 앉아서 읽던 책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나의 사랑하는 책’이라고 말해도 되는 거겠죠?

이범진
〈복음과상황〉 편집장으로 일한다.


쇄와 판
이재원

  
1.
일본의 한 잡지에서 2012년부터 연재된 만화 《重版出来!》(‘중쇄를 찍자!’로 역간)는 인기를 끌어 2016년 TV 드라마로도 방영되었다. 만화는 우리나라에도 출간되어 마지막 권 번역까지 두 권을 남겨두고 있다.

모든 출판사의 희망 사항인 중쇄(重刷)는 2쇄부터의 모든 ‘쇄’를 일컫는 말이다. 2쇄도, 3쇄도, 100쇄도 중쇄다. 출판사들이 ‘중쇄를 찍자!’를 외치는 원초적 이유는 2쇄를 인쇄하지 못했다는 현실에서 찾을 수 있다. 초판 1쇄가 어두운 창고에 쌓여서 울며 이를 갈고 있다는 말이다. 보편적으로 단행본 1쇄는 초기 제작비 정도로 책정된다. 1쇄(초판) 판매는 출판사 생존 여부와 직결되는 지표다. 그래서 1쇄가 모두 판매되고 2쇄를 인쇄한다는 것은 출판사가 이번 신간으로 손해 보지 않았다는 의미다.

1쇄에는 종잇값, 인쇄비, 코팅과 같은 후가공비 등 순수 제작비뿐 아니라 디자인비, 편집비, 경상비가 포함된다. 하지만 2쇄부터 이후의 모든 중쇄는 순수 제작비만 적용되니 제작 단가가 현저히 낮아진다. 그만큼 출판사가 남는 게 많아진다. 쉽게 말해 책의 정가가 올라가는 가장 큰 이유는 출판사가 2쇄를 찍을 가능성이 없다는 판단 아래 1쇄에서 제작비라도 어떻게든 건져보려는 애처로운 심리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2.
책 좀 읽어보신 독자들은 제일 앞이나 뒤에 출간 정보가 들어간 ‘판권’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여기에 ‘초판 1쇄’ 또는 ‘개정판 2쇄’라는 식으로 ‘판’과 ‘쇄’가 표기된다.

‘쇄’는 한자로 ‘인쇄할 쇄’(刷) 자를 쓰니 ‘인쇄하다’와 같은 의미다. 그러니까 인쇄할 때마다 쇄가 늘어난다고 보면 된다. 1쇄는 한 번 인쇄한 것이고, 100쇄는 인쇄를 100번 돌린 것이다. 그러니 출판사에서 ‘중쇄를 찍자!’고 말하는 것은 2쇄만 찍어도 여한이 없겠다는 소박하고 순진한 마음이라기보다는 2쇄, 3쇄, 4쇄… 멈추지 않고 계속 인쇄하고 싶다는 욕망이 담긴 표현이다.

우리가 흔히 ‘초판’이라고 부르는 ‘판’은 ‘쇄’와는 전혀 다른 의미다. 판은 책 내용이 크게 변하거나 크기나 판형 등 형태가 전혀 달라질 때 사용하는 단어다. (단순한 오탈자 수정은 판이 아닌 쇄에 적용된다.) 그래서 책 내용과 형태가 확연히 달라지면 초판 00쇄가 아닌 ‘개정판’ 00쇄로 부른다. 정리하면, ‘판’은 책의 내용과 형태, ‘쇄’는 책의 인쇄 횟수를 말한다. 쇄가 ‘양’(quantity)이라면, 판은 ‘질’(quality)이라고 볼 수 있겠다.

나만 그런지 몰라도 유독 SNS에서 ‘판’보다 ‘쇄’와 관련된 포스팅을 많이 접한다. 내 상식으로는 책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몇 쇄를 인쇄했는가보다 내용과 형태가 어떻게 바뀌었는지에 더 관심을 보일 것 같은데 말이다. ‘개정판’ 관련 포스팅보다는 2쇄, 3쇄, 4쇄 등에 대한 포스팅이 더 많이 보인다. 내 안에 온통 ‘쇄’를 향한 욕망이 넘쳐 그것만 보이는지도 모르겠지만.

서점이나 출판사는 책을 팔아야 하는 주체이기 때문에 원래 그렇게 부풀려서 포장을 하거나 축배를 드는 신남을 연출하는 것이 직업적 과제인 것이다. 예전에는 누군가의 신간이 가령 ‘출간 즉시 2쇄!’ 같은 문구로 소개가 되면 괜히 시무룩해지거나 했는데 지금은 일말의 동요도 없다. 그것은 가령 5천 부를 찍어야 하는데 3천 부와 2천 부로 머리 가르마 타듯 나눠 찍으면 출간 즉시 중쇄를 성취하게 되는 말장난이니까. 그럴듯한 출판 마케팅 언어의 현실적 의미를 모를 때는 어쩐지 부럽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이제는 ‘모두 참 애쓰고 있구나’라고 덤덤하게 고개만 끄덕이게 된다. (임경선,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마음산책)

이 책을 읽으며 기독교 출판인으로서 얼마나 얼굴이 화끈거렸는지 모른다. 인용한 내용 때문만은 아니었다. 기독교 출판사가 아닌 종합 출판사를 다닐 때의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편집부가 10개 정도인 규모 있는 출판사였다. 한 편집부에서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기독교인 저자 때문에 고민이 있다고 했다. 자신이 담임하는 교회에서 구매하기로 약속하고 초판을 5천 부 인쇄하기로 했는데 1천 부마다 쇄를 바꿔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그러면 출간과 동시에 5쇄가 된다. 저자는 대형교회 담임목회자였고, 이전에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메이저 출판사 한 곳에서 몇 권의 책을 출간해왔다고 했다. 나에게 출간과 동시에 5쇄라고 홍보하자는 게 부끄럽다고 말하던 이들은 크리스천이 아니었고, 이를 요구한 저자와 나는 크리스천이었다.

3.
초판 ‘1쇄’를 몇 부 인쇄해야 한다고 정해진 기준은 없다. 출판사 맘이다. 같은 출판사라도 어떤 책은 초판 1쇄를 3천 부 인쇄하고, 어떤 책은 1천 부 인쇄한다. 중쇄도 마찬가지다. 2쇄는 1천 부 찍었지만 3쇄는 5백 부 찍기도 한다. 물론 베스트셀러인 경우 한 쇄를 1만 부 이상 찍기도 한다.(아, 진짜 중쇄 1만 부 찍으면 소원이 없겠다.)

어떤 책은 초판 5천 부를 찍으면서 5쇄가 되기도 하지만, 어떤 책은 5만 부를 찍었는데 3쇄인 경우도 있다. 출판은 지식산업이다. 이 말은, 기독교책 안에는 기독교의 ‘지식’ 곧 ‘정신’(ethos)이 담긴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정신은 기독교인의 모습(habitus)이 된다.(참고로 출판인들끼리는 판권을 책의 ‘이름표’라고 부르기도 한다.)

작은 소망이 있다면 책과 관련된 포스팅 중에 ‘쇄’에 대한 글이나 대화보다는 내용과 형태를 담은 ‘판’에 대한 글이나 대화가 더 많았으면 한다. 출판이란, 심지어 기독교 정신을 담은 기독교 출판이란, 양보다 질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정말이지, 우리가 돈이 없다고 ‘가오’까지 없어서야 되겠는가. 기독교 출판의 가오가 가르마 타듯 쇄를 늘려서 있어 보이게 하는 것으로부터 오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이재원
홍성사, 위즈덤하우스에서 근무했다. 현재는 선율 출판사에서 일한다.


지난 호 의견💌

🗣️ 이하나 님 글을 읽다가 떠오른 게 있어요. 요즘 슈메만의 〈우리 아버지〉를 다시 읽는 중인데, 그때 그은 밑줄에서 당시의 고민을 만나기도 하고 그땐 지나친 문장을 낯설게 마주하고 있거든요. 두 번째 독서는 저자뿐 아니라 밑줄 쳤던 나와 만나는 일이기도 하네요. 이하나 님의 독서와 책방 이야기가 더 듣고 싶어집니다. 

황재혁 님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다른 공군 방공포 부대에서 근무하면서 200권의 책을 읽고는 한 개의 기록도 남기지 않은 저의 게으름에 민망해집니다. 휘발된 책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황재혁 님의 유통기한은 성실함 때문에 없나 봅니다. 그 마음 배워갑니다.

읽는 분들의 이야기가 좋습니다. 연결도 되고 배움도 됩니다. 필자들을 만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지난 뉴스레터를 읽을 있도록 링크를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전 호에 접근하기가 훨씬 수월해졌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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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강동석 | 일러스트 이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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