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본의 한 잡지에서 2012년부터 연재된 만화 《重版出来!》(‘중쇄를 찍자!’로 역간)는 인기를 끌어 2016년 TV 드라마로도 방영되었다. 만화는 우리나라에도 출간되어 마지막 권 번역까지 두 권을 남겨두고 있다.
모든 출판사의 희망 사항인 중쇄(重刷)는 2쇄부터의 모든 ‘쇄’를 일컫는 말이다. 2쇄도, 3쇄도, 100쇄도 중쇄다. 출판사들이 ‘중쇄를 찍자!’를 외치는 원초적 이유는 2쇄를 인쇄하지 못했다는 현실에서 찾을 수 있다. 초판 1쇄가 어두운 창고에 쌓여서 울며 이를 갈고 있다는 말이다. 보편적으로 단행본 1쇄는 초기 제작비 정도로 책정된다. 1쇄(초판) 판매는 출판사 생존 여부와 직결되는 지표다. 그래서 1쇄가 모두 판매되고 2쇄를 인쇄한다는 것은 출판사가 이번 신간으로 손해 보지 않았다는 의미다.
1쇄에는 종잇값, 인쇄비, 코팅과 같은 후가공비 등 순수 제작비뿐 아니라 디자인비, 편집비, 경상비가 포함된다. 하지만 2쇄부터 이후의 모든 중쇄는 순수 제작비만 적용되니 제작 단가가 현저히 낮아진다. 그만큼 출판사가 남는 게 많아진다. 쉽게 말해 책의 정가가 올라가는 가장 큰 이유는 출판사가 2쇄를 찍을 가능성이 없다는 판단 아래 1쇄에서 제작비라도 어떻게든 건져보려는 애처로운 심리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2.
책 좀 읽어보신 독자들은 제일 앞이나 뒤에 출간 정보가 들어간 ‘판권’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여기에 ‘초판 1쇄’ 또는 ‘개정판 2쇄’라는 식으로 ‘판’과 ‘쇄’가 표기된다.
‘쇄’는 한자로 ‘인쇄할 쇄’(刷) 자를 쓰니 ‘인쇄하다’와 같은 의미다. 그러니까 인쇄할 때마다 쇄가 늘어난다고 보면 된다. 1쇄는 한 번 인쇄한 것이고, 100쇄는 인쇄를 100번 돌린 것이다. 그러니 출판사에서 ‘중쇄를 찍자!’고 말하는 것은 2쇄만 찍어도 여한이 없겠다는 소박하고 순진한 마음이라기보다는 2쇄, 3쇄, 4쇄… 멈추지 않고 계속 인쇄하고 싶다는 욕망이 담긴 표현이다.
우리가 흔히 ‘초판’이라고 부르는 ‘판’은 ‘쇄’와는 전혀 다른 의미다. 판은 책 내용이 크게 변하거나 크기나 판형 등 형태가 전혀 달라질 때 사용하는 단어다. (단순한 오탈자 수정은 판이 아닌 쇄에 적용된다.) 그래서 책 내용과 형태가 확연히 달라지면 초판 00쇄가 아닌 ‘개정판’ 00쇄로 부른다. 정리하면, ‘판’은 책의 내용과 형태, ‘쇄’는 책의 인쇄 횟수를 말한다. 쇄가 ‘양’(quantity)이라면, 판은 ‘질’(quality)이라고 볼 수 있겠다.
나만 그런지 몰라도 유독 SNS에서 ‘판’보다 ‘쇄’와 관련된 포스팅을 많이 접한다. 내 상식으로는 책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몇 쇄를 인쇄했는가보다 내용과 형태가 어떻게 바뀌었는지에 더 관심을 보일 것 같은데 말이다. ‘개정판’ 관련 포스팅보다는 2쇄, 3쇄, 4쇄 등에 대한 포스팅이 더 많이 보인다. 내 안에 온통 ‘쇄’를 향한 욕망이 넘쳐 그것만 보이는지도 모르겠지만.
서점이나 출판사는 책을 팔아야 하는 주체이기 때문에 원래 그렇게 부풀려서 포장을 하거나 축배를 드는 신남을 연출하는 것이 직업적 과제인 것이다. 예전에는 누군가의 신간이 가령 ‘출간 즉시 2쇄!’ 같은 문구로 소개가 되면 괜히 시무룩해지거나 했는데 지금은 일말의 동요도 없다. 그것은 가령 5천 부를 찍어야 하는데 3천 부와 2천 부로 머리 가르마 타듯 나눠 찍으면 출간 즉시 중쇄를 성취하게 되는 말장난이니까. 그럴듯한 출판 마케팅 언어의 현실적 의미를 모를 때는 어쩐지 부럽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이제는 ‘모두 참 애쓰고 있구나’라고 덤덤하게 고개만 끄덕이게 된다. (임경선,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마음산책)
이 책을 읽으며 기독교 출판인으로서 얼마나 얼굴이 화끈거렸는지 모른다. 인용한 내용 때문만은 아니었다. 기독교 출판사가 아닌 종합 출판사를 다닐 때의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편집부가 10개 정도인 규모 있는 출판사였다. 한 편집부에서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기독교인 저자 때문에 고민이 있다고 했다. 자신이 담임하는 교회에서 구매하기로 약속하고 초판을 5천 부 인쇄하기로 했는데 1천 부마다 쇄를 바꿔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그러면 출간과 동시에 5쇄가 된다. 저자는 대형교회 담임목회자였고, 이전에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메이저 출판사 한 곳에서 몇 권의 책을 출간해왔다고 했다. 나에게 출간과 동시에 5쇄라고 홍보하자는 게 부끄럽다고 말하던 이들은 크리스천이 아니었고, 이를 요구한 저자와 나는 크리스천이었다.
3.
초판 ‘1쇄’를 몇 부 인쇄해야 한다고 정해진 기준은 없다. 출판사 맘이다. 같은 출판사라도 어떤 책은 초판 1쇄를 3천 부 인쇄하고, 어떤 책은 1천 부 인쇄한다. 중쇄도 마찬가지다. 2쇄는 1천 부 찍었지만 3쇄는 5백 부 찍기도 한다. 물론 베스트셀러인 경우 한 쇄를 1만 부 이상 찍기도 한다.(아, 진짜 중쇄 1만 부 찍으면 소원이 없겠다.)
어떤 책은 초판 5천 부를 찍으면서 5쇄가 되기도 하지만, 어떤 책은 5만 부를 찍었는데 3쇄인 경우도 있다. 출판은 지식산업이다. 이 말은, 기독교책 안에는 기독교의 ‘지식’ 곧 ‘정신’(ethos)이 담긴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정신은 기독교인의 모습(habitus)이 된다.(참고로 출판인들끼리는 판권을 책의 ‘이름표’라고 부르기도 한다.)
작은 소망이 있다면 책과 관련된 포스팅 중에 ‘쇄’에 대한 글이나 대화보다는 내용과 형태를 담은 ‘판’에 대한 글이나 대화가 더 많았으면 한다. 출판이란, 심지어 기독교 정신을 담은 기독교 출판이란, 양보다 질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정말이지, 우리가 돈이 없다고 ‘가오’까지 없어서야 되겠는가. 기독교 출판의 가오가 가르마 타듯 쇄를 늘려서 있어 보이게 하는 것으로부터 오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이재원
홍성사, 위즈덤하우스에서 근무했다. 현재는 선율 출판사에서 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