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신학자 #93 장 칼뱅, 제네바로 가느니 차라리 죽겠습니다
#94 시몬 베유, 신을 기다리며
#95 장 칼뱅, 새로 온 목사님과 다투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96 슐라이어마허는 예수를 사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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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님, 안녕하세요.
복 있는 사람 편집자 B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가 아니다”(J. G. 메이첸)라는 제목으로 뉴스레터를 보낸 뒤, 많은 독자님들의 피드백이 있었습니다. 그중 기억에 남는 피드백이 하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와 신학에 자유주의 신학이 어떻게 들어와 있는지 궁금합니다.”(조이맨 독자님) 그리하여 오늘은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슐라이어마허’에 관한 내용을 준비해 왔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을 여러 가지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이 신학자를 빼고 자유주의 신학을 이야기할 수 없을 듯합니다.
제가 처음으로 슐라이어마허를 알게 된 건, 아이러니하게도 칼 바르트의 책을 읽을 때였습니다. 바르트는 어떤 주장을 할 때마다 슐라이어마허를 비판하며, 자신의 주장을 개진해 나갔습니다. 소위 바르트의 신학은 위로부터 신학,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은 아래로부터 신학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처럼 두 신학자가 신학을 하는 방법은 극명하게 다르지만, 재밌는 점은 두 신학자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사고하려 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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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7월 14일 성난 폭도들이 파리에 있는 바스티유 감옥의 안쪽 뜰로 들이닥쳤다. 프랑스 혁명이 촉발된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과 그로 인한 공포 시대는, 하나님과 그가 세운 왕과 권세자들에 대항하는 당시의 일반적인 시대정신이 가장 폭력적으로 표출된 것이었다. 이들은 종교적 회의주의를 위한 토대를 마련해 준 모든 철학자들이 더없이 고마운 세대였다. 바로 이 틈바구니로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라는 눈길을 끄는 지식인이 등장했다. 그는 남달리 예술적인 재능을 가지고 기독교의 성령과 자기 세대의 시대정신을 조화시키는 일을 시작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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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점은 대부분의 영어권 사람들이 슐라이어마허라는 이름은 모르는 데 반해, 그를 모르고는 신학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에게 큰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죽은 바로 다음날 베를린 대학의 신학 교수인 어거스트 네안더August Neander는 자신의 학생들에게 “언젠가 그에게서 기원을 찾는 교회 역사의 새로운 시기가 도래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가 옳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시기가 도래했다. 슐라이어마허의 정신은 19세기의 많은 부분을 지배했고, 곧 신학에 있어서 새 시대가 시작된 것이 분명해졌다. 자유주의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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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의 아버지로서의 슐라이어마허의 위치를 생각하면, 그가 보수주의자들의 공분을 샀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슐라이어마허는 그 생각이 얼마나 그리스도 중심적이었던지, 보수주의자들조차 그를 어떻게 이해해야 될지 고심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에게 노골적인 정죄 대신 “그리스도를 지키기 위해 그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는 칭송 아닌 칭송을 보냈다. 19세기 프린스턴 보수 신학의 보루 찰스 하지Charles Hodge는 그가 베를린에 있을 때 종종 슐라이어마허의 교회 예배에 참석했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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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부른 찬송들은, 항상 현저하게 복음적이고 경건하며 우리의 구속자에 대한 찬송과 감사로 넘쳐났다.……또한 저녁 예배 때 슐라이어마허는 옆에 앉은 아이들에게 종종 “쉿, 얘들아, 그리스도를 높이는 찬송을 같이 부르자”라고 말하곤 했다. 지금도 그가 그런 찬송들을 부르고 있을 것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수 있을까? 누구든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아는 사람은 또한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안다고, 사도 요한이 우리에게 확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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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림없이 슐라이어마허는 예수를 사랑했다. 여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사고가 굉장히 복합적이고 독창적인 사상가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실제로 그리스도를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생각했는지의 여부를 분간하기 위해서는 그와 조금 더 씨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슐라이어마허와는 그렇게 씨름할 가치가 있다! 사랑하는 독자여, 실제로 당신은 그가 마치 경멸당해 마땅한 거만한 사람이나 되는 것처럼 무시해 버리려는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한다. 슐라이어마허는 신학자들 중에서도 거인이다. 교회는 그로부터 막대한 영향을 받았다. 오만하게 그를 무시하거나 그의 신학에 설득될까 봐 조바심을 낸다면, 오늘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그의 유산을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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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 사이에서 프리츠라 불린 슐라이어마허Fritz Schleiermacher는 1768년 브레슬라우(당시는 프로이센 왕국의 일부였고, 지금은 폴란드 남부의 브로츠아프다)에서 태어났다. 친가와 외가 모두 수세대에 걸쳐서 개혁파 목사들을 낸 집안이었고, 그의 아버지 고틀리브Gottlieb는 군목이었다(프리메이슨단의 습관과 제도가 칼뱅주의 강령들보다 그의 마음에 더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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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프리츠가 9살이 되던 해, 그의 가족은 헤른후트파Herrnhuter 공동체 근처로 이사를 했고, 이는 나중에 그의 생애의 큰 전환점으로 드러났다. 헤른후트파(혹은 모라비아파)는 예수를 믿는 살아 있는 믿음이 필요하다고 믿고 당시의 냉랭한 정통주의에 반발했던 경건주의자들Pietists이었다. 그들은 정통주의에게 교리는 마치 죽은 나비들과 같이 한데 모아 분류해서 목록을 작성하는 것에만 소용이 있는 것처럼 느꼈다. 모라비아에서 쫓겨난 그들은 헤른후트에서 나중에 이들의 감독이 될 니콜라우스 친첸도르프 공작Count Niklaus Ludwig von Zinzendorf의 영지에 자리한 쉼터를 제공받았다. 슐라이어마허의 가족은 살아 있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기쁨이 넘치는 이 공동체에 큰 감화를 받았다. 먼저 아버지가 회심했다. 그들의 체험적 강조를 사랑했던 프리츠 역시 나중에 그가 ‘더 고상한 삶’으로의 출생이라고 언급한 경험을 곧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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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츠가 헤른후트파를 좋아했던 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의 부모가 자녀 교육을 그들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얼마 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의 아버지는 군대와 함께 늘 옮겨 다니느라 자녀들을 더 이상 돌보지 못했다. 그렇게 헤른후트파가 그의 새로운 가족이 되었고, 이후 지속적으로 그의 삶을 형성했다. 그들이 가진 교리의 엄격함에 점점 더 좌절감을 느낀 그였기에, 그는 항상 참된 신앙은 단순히 교육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체험되어야 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의 생애 말기에 그는 “나는 다시 더 고상한 질서만을 따르는 헤른후트파가 되었다”라고 말함으로써 스스로를 정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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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헤른후트파가 되었다……”는 말은 먼저 그 길을 떠났었다는 말이다. 이 모든 일은 슐라이어마허가 학교에서 시작한 비밀 철학 클럽으로 시작됐다. 거기서 루소Rousseau와 같은 철학자로부터 영향을 받은 그는 헤른후트파의 교리적 핵심에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고, 그중 일부(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대속의 희생, 성자의 영원한 신성)를 거부했다. 그는 이 교리적 족쇄를 벗어 버렸기 때문에 자신이 참된 기독교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죄로 인한 영원한 성자의 대속의 희생은 헤른후트파 경건의 핵심이었기 때문에, 이런 교리를 저버린 그에게는 거기에 따르는 대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새로운 관점을 설명하는 편지에 경악한 그의 아버지는 가장 무자비한 말로 그를 힐책했고 부자간의 연은 돌이킬 수 없게 멀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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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버지 고틀리브는 자신의 아들이 할레Halle 대학에 가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했다. 프리츠가 헤른후트 대학에서 하루 속히 벗어나 원하는 곳으로 가서 자유롭게 탐구하기를 원했다. 이곳에서 프리츠가 강의를 많이 들은 것은 아니다. 평범한 강의에 실망한 그는 자신만의 굉장히 도전적인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칸트 연구에 몰두하고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을 많이 읽으면서 그는 자신이 아주 독창적인 신학 작업을 하기 시작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할레에서 대부분 침울하게 보냈다. 어렸을 때 누이가 그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약간 몸이 굽고 기형이 된 이래로 작고 가냘픈 체격을 가졌던 그는 한 번도 건강했던 적이 없었다. 이제는 그가 행한 모든 은둔적인 연구의 결과 몸의 한계에 다다랐고 건강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었다. 독서를 통해 그는 회의적인 사람이 되었고 사람들과의 단절은 그를 고독하게 했다. 헤른후트에서 그가 누렸던 모든 사회적이고 영적인 온기가 온데간데없이 다 사라지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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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때 프리츠는 당시 자신과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흔히 선택하던 것처럼 프러시아의 슐로비텐Schlobitten에 있는 귀족 도오나 백작Count von Dohna 집의 가정교사직을 받아들였다. 이 행복한 대가족과 함께 지내면서 할레의 상아탑에 있는 동안 그를 사로잡았던 차가운 냉소주의가 눈 녹듯 사라지고 사랑의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다(예수를 향한 사랑과 한 젊은 백작부인을 향한 은밀한 사랑). 그는 다시 헤른후트파로 변모해 갔다. 정기적으로 설교도 하기 시작했다. 열정적인 그의 설교는 도덕적 도전을 쏟아냈고 우리의 모범과 이상이신 그리스도로 가득했다. 마치 “내면으로부터의 계시”를 가진 듯 했다고 그는 말했다. 이같은 직관에 힘입어 그의 신학은 급속한 발전을 이루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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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슐로비텐을 떠나 란츠베르그Landsberg에 있는 개혁 교회에서 2년 동안 부목사로 있었다(여기 있는 동안 그는 촌각을 아껴 가며 범신론 철학자 스피노자를 읽었다). 그 후 22살이 되던 1796년, 베를린에 있는 아주 크고 지저분한 자선병원의 원목으로 부임해 처음으로 책임 있는 목회를 시작했다. 슐라이어마허에게 베를린은 시인과 철학자와 낭만주의에 대한 이야기로 넘쳐나는 살롱들이 있는 프러시아의 에덴동산이었다. 좋은 모임과 교양 있고 재치 있는 대화가 있는 이곳에는 헤른후트에서 느낀 온정과 더불어 그렇게도 열망해 마지않던 ‘고차원’의 대화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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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하나님에 대한 여지가 없는 세상이었다. 어떤 신도 끼어들 만한 여지가 없는 세상이었다. 이렇게 슐라이어마허는 자신의 처녀작인 『종교론』On Religion: Speeches to Its Cultured Despisers을 쓰게 된다. 여기에서 그가 정의한 참된 종교는 교리의 죽은 문자와 계몽주의 회의론이 비아냥거린 역사적 사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신에 대한 살아 있는 경험에 관한 것이다(그중 기독교가 가장 고상한 종교의 형태다). 다시 말해, 낭만주의의 ‘세련된 종교 혐오자들’은 하나님과 인간의 불멸성과 같이 당혹스럽게 하는 교리 때문에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 참된 종교는 다름 아닌 인간이 무엇인지, 우주에 대한 직관과 감정을 갖고 무한을 맛보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모든 것이다. 낭만주의가 실제로 추구했던 이상은 다름 아닌 기독교가 말하는 비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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