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도의 지적 호기심과 내공이라면 아주 어릴 적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려진 것일 거라 짐작했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학자나 교수의 길을 꿈꾸지 않았을까? ‘파리지앵’이 되기 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들려달라고 부탁했을 때 예진은 자신의 학창 시절을 회고했다.
“고등학교 진학을 결정할 즈음에 빨리 경제적인 독립을 해야겠다고 결정했어요. 뭔가 하고 싶은 게 명확히 없었거든요. 포부가 없을 바에야 대학 진학보다는 취업을 택하자 싶었죠. 부모님한테 짐이 되느니 돈을 버는 게 낫다고 생각했거든요.”
예진은 어릴 적부터 혼자 결정하고 실행하는 아이였다. 당시 스스로 결정을 굳히지 않고 어른들에게 조언을 구했다면 분명 이런 말을 들었을 것이다. ‘좋은 대학에 가면 선택의 폭이 넓어져. 그때 가서 결정을 해도 돼. 쓸데없는 생각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 그러나 예진에게는 그녀의 결심을 인정하고 지지해 주는 부모님이 계셨다. 그녀는 특성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리고 19살 때부터 회사에서 일을 시작했다. 재무와 회계를 담당하는 팀 소속이었다.
“괜찮은 근무처였어요. 30년씩 근속하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저도 얼른 정규직으로 전환되었고요. 음, 어릴 때 일찍 안정을 추구하는 커리어 선택을 경험해 본 게 저에게는 참 다행이었던 것 같아요. 그게 저랑은 안 맞는 선택이라는 걸 빨리 깨닫게 해 줬으니까요. 회사에서 희망적인 미래가 그려지지 않았던 게 저의 다음 선택에 큰 영향을 끼쳤던 것 같아요.”
단조로운 업무와 시계추 같은 반복된 일상 속에서 예진은 자신이 앞으로 뭘 할 수 있을지, 어디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지 탐색해 보기 시작했다. 그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고등학생 시절 방송 영상 동아리에서 피디를 맡아 기획한 영상제였다. 기획부터 제작, 편집까지 내 손으로 다 해낸 것에 대한 성취감과 그것에 대한 관객들의 뜨거운 박수에 깊은 감동을 느꼈다. 기획이 재미있다는 걸 최초로 경험해 본 순간이었다. 인생 처음으로 가봤던 락 페스티벌도 떠올랐다. 어느 무더웠던 날 친구와 찾은 지산 락 페스티벌이었다. 숨 막히는 더위에 녹초가 되어있다가도 공연이 시작할 때면 기운이 솟았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흥분이었다. 그녀에게 희망과 미래란 그렇게 구체적인 과거 순간들이었다. 오감의 전율과 강렬한 소리와 시각적인 아름다움,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들을 가능하게 해주는 ‘무대'가 마음속에 타투처럼 선명하게 새겨져 있음을 깨달았을 때 그녀는 그것이 자기가 계속 따라가야 할 무엇임을 직감했다.
“어릴 때부터 음악을 좋아하긴 했는데 그것들로 제가 뭘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오랫동안 하지 못한 것 같아요. 상상을 해보더라도 비현실적인 일이라고 금방 접곤 했죠. 그런데 좋아하는 마음을 계속하다 보니 이런저런 경험도 함께 쌓여나가더라고요. 입체적인 경험들이 모여 ‘이거 내가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적인 자신감으로 치환되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