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호 - 길고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

안녕하세요. 독자님 :) 추석이 지나니 가을이 어느새 성큼 다가와 제 팔짱을 낀 느낌이에요. 사계절이 있어서 번거롭다고 투덜대다가도,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면, 이런 가을을 누리려고 태어났나 싶은 마음이 들곤 하죠. 아름다움, 빛과 그림자, 다가오는 날들을 힘껏 끌어안고 충만한 시월을 보내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안부와 계절 편지를 보내드립니다. 

박정은의 계절 ㅡ 아름다운 10월, 우리 모두 관상가가 되어

관상(the contemplation)이란 실재에게 보내는 길고 사랑스러운 시선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아름다움을 찾고 보는 것, 그 안에 깃든 오랜, 혹은 새로운 사랑을 발견하는 내면의 작업을 의미합니다. 그런 시간에는 누구나 시인이 되고 또 예술가가 됩니다. 길게 바라볼 때 우리의 시선은 감추어진 것, 그리고 새로운 것을 찾아냅니다.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것들, 아름다운 사람들, 그리고 아름다운 나를 찾아가는 일만큼 시월에 어울리는 영적 훈련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찬란한 시월의 빛 속에서 가만히 손 내미는 그림자를 발견하고 친해지는 일만큼, 부드러워지는 가을에 하기 좋은 영적 수업은 없을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달 시월에, 아주 오랜, 혹은 매우 새로운 아름다움을 찾아가 만나며 살아보면 어떨까요. 

 

1주: 아름다운 순간 찾기

 

이번 한 주는 내 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운 사물들을 만나보기로 합니다. 매일 10분에서 20분씩 산책을 하면서 마주치는 사물들을 주목합니다. 어떤 사물이 고유한 아름다움으로 당신에게 말을 건넵니까? 어느 집 담장에 얼굴을 불쑥 내민 한 송이 꽃일 수도 있고, 무뚝뚝해 보이는 전봇대에 붙은 포스터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벗어 놓은 장화 한 짝일 수도 있습니다. 그 순간 그 사물을 보고 멈추어 섭니다. 그리고 어느 부분이 아름다웠는지 생각해 봅니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 봅니다. 어느 각도에서, 어느 높이에서 이 사물을 찍을 때, 내가 발견한 그 사물의 아름다움이 그대로 전해집니까?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내게 어떤 느낌을 주는지 생각해 봅니다.


저녁에는 하루를 돌아봅니다. 찍은 사진들을 보며 이 아름다움이라는 선물은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봅니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그리움, 어떤 기대나 희망, 그리고 추억일 수도 있습니다. 그 아름다움은 나에게 어떤 기쁨을 주었는지 생각해 보고 노트에 적어 봅니다.


7일째에는 한 주간 만났던 아름다운 사물들을 하나하나 되돌아봅니다. 내가 적어 놓은 노트도 다시 한 번 찬찬히 훑어봅니다.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세상의 아름다움과 사물의 아름다움은 내게 어떤 감동을 줍니까? 침묵 속에서 세상의 아름다움이 주는 느낌에 머뭅니다.

 

2주: 생명 있는 것들의 아름다움

 

이 주간에는 주위의 살아 있는 것들을 관심 있게 바라봅니다. 반려동물, 길에서 만난 비둘기 등 이 세상에 나처럼 살아서 움직이는 것들을 살펴보고 그들이 가진 고유한 아름다움을 찾아봅니다. 만나는 모든 생명 앞에서 나의 선입견을 내려놓고, “너 참 아름답구나”라고 이야기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이야기해 줄 때, 어떤 느낌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저녁에는 오늘 하루 동안 만난 아름다운 생물들을 생각해 봅니다. 어떤 동작과 모습이 내게 아름답게 다가왔는지, 그것들은 내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 생각해 보고 하나하나 적어 봅니다. 답을 찾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의문 자체가 내 영혼을 풍부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7일째에는 한 주 동안의 기록을 읽어보고 무엇을 배웠는지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내가 만난 생명들 하나하나에게 아름답다고 이야기해 줍니다.

 

3주: 아름다운 사람들 속에서

 

이번 주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는 작업을 합니다. 순서는 바꾸어도 좋고, 지난 두 주간 해 보았듯이, 아름다운 사람들을 우연히 마주친 순간을 마음속에서 연장하고 음미해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월요일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 나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고 또 그 아름다움에 머물 것’이라고 결심합니다. 하루를 보내면서 아름다운 사람을 보는 순간을 알아차리고 그 순간에 머물러 봅니다. 우연히 길에서 스쳐 지나간 사람일 수도 있고, 이웃일 수도 있고, 직장 동료일 수도 있습니다. 친절한 인사, 혹은 싱그러운 웃음일 수도 있겠고, 명랑한 걸음걸이일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의 옷차림일 수도 있고, 화가 나는 상황에서도 화 내지 않는 인품일 수도 있습니다. 저녁에는 오늘 만난 아름다운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음미하면서 그들에게 축복을 보냅니다. 그리고 그들의 아름다움을 통해 내가 배운 것은 무엇인지 적어 봅니다.

 

🧡화요일

오늘은 이런 질문을 해봅니다. 내가 살면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기억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 때 그 사람은 어떤 상황에 있었고, 어떤 점이 아름다웠습니까? 그 사람을 만났을 때 나는 어떤 상황이었고, 그의 아름다움은 내게 어떤 영향을 주었습니까? 지금의 내게 혹은 내 삶에 그의 아름다움이 반영되어 있습니까?

 

💛수요일

오늘은 이런 질문을 해봅니다. 내가 만난 영화, 소설, 동화의 캐릭터 중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누구입니까? 왜 그렇다고 생각합니까? 그 때 나는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그는 내 내면에 어떤 영향을 주었습니까? 당신에게 그는 여전히 아름답습니까? 지금 그를 만난다면, 무슨 이야기를 해주고 싶습니까?

 

💚목요일

내가 가장 아름다웠던 시간으로 돌아간다면 그때는 언제입니까? 그때의 내가 왜 아름답습니까? 그때 나는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그때 당신의 아름다움을 한 번 써보세요. 그리고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의 나를 축복해 주십시오.

 

💙금요일

한때는 아름다웠고, 지금은 아름답지 못한 사람을 한 사람 생각해 봅니다. 무엇이 그 사람을 그토록 아름답게 했는지, 지금은 왜 그 사람이 아름답지 않은지 생각해 봅니다. 혹시 내가 그 사람에게 어떤 아름다움을 강요하거나 기대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그 사람은 이제 다른 삶의 단계에 들어서 있기 때문인지, 또 이제 그에게는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아름다움이 있지는 않을지를 생각해 봅니다. 한때 아름다웠고, 지금은 내게 아름답지 못한 그 사람들에게 축복과 사랑의 말을 전하십시오. 설사 그 축복의 말을 전하지 못할지라도, 나의 추억과 어제가 담긴 아름다움에게 축복하세요.

 

💜토요일

오늘은 고유한 빛과 색으로 아름다운 나를 만나는 날입니다. 자신의 사진이나 거울을 가져다 놓습니다. 혹시 그림에 재능이 있다면, 내 눈에 보이는 나 자신의 모습을 크로키로 그려 보세요. 많은 화가들에게 자화상을 그리는 일은 내면의 눈으로 자기를 들여다보는 작업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 눈 앞에 선 나의 모습을 찬찬히 들여다보세요. 늙어 가는 나의 모습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세요. 얼굴의 주름과 흰 머리, 그리고 늘어지고 처진 피부를 보며 수고했다고, 아름답다고 이야기해 주세요. 나의 주름들은 내 삶의 역사이고, 기록이니까요. 어려웠던 순간도 있었고, 슬픈 순간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내 앞에 선 나에게 “나는, 나의 삶은 아름답다”라고 속삭여 주세요.

 

🤎일요일

아름답게 물든 나뭇잎을 한 장 줍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나뭇잎을 골라도 어딘가 한 곳은 부족함이 있기 마련입니다. 벌레가 먹은 곳도 있고, 약간 비뚤어진 부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부족함으로 이 나뭇잎은 고유한 아름다움을 지닐 수 있는지 모릅니다. 내가 고른 나뭇잎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그 나뭇잎의 봄, 여름, 그리고 가을을 상상해 보세요.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는 누군가의 역사를 만져보고 있습니다. 이젠 나의 생을 이 잎에 옮겨 놓는다고 상상합니다. 나의 역사를 이곳에 옮겨 놓고 만져 봅니다. 따스하게 그리고 정답게… 아름답지 않은 부분이 나를 아름답게 할 것입니다. 우리의 여정은 계속 되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나뭇잎을 노트에 끼워 놓습니다.

 

4주: 그림자와 친해지기

 

빛이 정다워지고 햇살이 부드러워지는 시월의 마지막 주에는 나와 사물의 그림자와 친해지는 한 주간을 살아 보기로 합니다. 어느 시월의 오후, 산책을 하던 나의 그림자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림자로 본 나는 어른이 아니라 아주 작은 꼬마 아이였습니다. 누가 진짜 나인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내가 그림자와 친해질수록 생은 마치 잘 익은 와인처럼, 어둠을 힘껏 끌어안은 대가로 풍부함을 안겨 줄 것입니다. 내가 모르는 나에게 최소한 친절해질 때, 내가 나를 모른 체하는 어리석음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월요일

매일 산책을 하면서 그림자를 봅니다. 어떤 그림자를 만났나요? 무엇을 발견했나요? 누구의 그림자가 가장 아름답습니까? 멋진 그림자를 보고 거기 머무릅니다. 저녁에 그림자가 모두 잠들어 버린 시간, 나는 어떤 그림자를 보았는지, 어떤 것을 느꼈는지 적어 봅니다.

 

🧡화요일

산책하면서 한 가지 사물을 선택합니다. 그림자는 어떻게 생겼는지, 실제 사물과 닮은 점은 무엇인지, 다른 점은 무엇인지를 살펴봅니다. 시든 꽃의 그림자는 싱싱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빛은 그림자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림자를 보면서 이런 저런 대화를 해 봅니다. 그 대화를 노트에 적어 봅니다.

 

💛수요일

마루나 공원의 벤치에 앉아서, 혹은 가로수에 기대어 서서 나의 그림자를 바라봅니다. 그림자를 사진으로 찍어 봅니다. 나의 그림자를 보면서 어떤 느낌이 듭니까? 그림자는 색깔이 없지만 그 안에 어쩌면 모든 색을 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그림자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세요. 그리고 저녁에 그 대화를 기억하면서 노트에 정리합니다.

 

💚목요일

살면서 가장 외로웠던 순간을 떠올려 봅니다. 어떤 광경이 떠오릅니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때 내 주위에 어떤 사물이 있습니까? 어떤 색깔, 냄새가 기억납니까? 지금 그 순간을 돌아볼 때, 어떤 느낌이 듭니까? 지금의 내 안에 그 순간은 어떤 그림자로 남았습니까?

 

💙금요일

내 영혼의 지도를 그려 봅니다. 내가 잘 드러내고 싶지 않은 나의 성격, 그리고 수치스러운 경험들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그런 부분들을 한번 적어 보십시오. 어릴 때의 기억일 수도 있고, 내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나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그림자는 그늘을 드리운 가로수의 커다랗고 동그란 그림자처럼, 다른 많은 사람을 쉬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최소한 “나의 그림자야 안녕!” 하고 다정한 인사를 건네기로 합니다.

 

💜토요일

그림자에 대한 한 편의 시로 렉시오 디비나를 해 볼 것입니다. 우리가 한 주 동안 살펴본 그림자란 결국 우리 여정의 길벗이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림자를 품에 안을 때, 나는 나를 더 이상 외롭거나 고독하게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외로움에서 해방시켜 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우리의 그림자에 귀를 기울여 볼 것입니다. 이번 주는 시인 김내식의 「그림자에게 길을 묻다」를 텍스트로 정했습니다. 이 시를 찾아 매일 읽을 수 있도록 준비합니다.

그림자에게 길을 묻다 / 김내식

 

삶에 대해서 나는

묻고 또 묻는다

어떻게 사는 삶이 참된 삶인지

수많은 현인들이 그 방법을 제시하나

시간과 장소에 따라

각자에게 주어진

여건과 환경이 다르기에

진정한 나의 길은 내가 찾을 수밖에

길 위에 이정표가 또 다른 길을 가리키어

세상의 모든 길은

길에서 길을 묻다 결국

내 안의 길로 이어지느니

거기서 나의 길

찾을 수밖에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은

나를 위한 삶이기보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으니

이제는 텅 빈

나의 문에 이르기 위해

홀로 나를 따르는

내 그림자에게 길을 물어

진정한 나의 존재

만나야 하리

🔸먼저 시를 주의 깊게 두 번 읽습니다. 소리를 내거나 혹은 침묵 중에 천천히 읽습니다.

🔸가장 눈에 들어오는 구절은 무엇입니까? 그 구절을 소리 내어 세 번 읽습니다.

🔸다시 한 번 시를 읽습니다. 그리고 내가 선택한 이 구절을 통해 떠오르는 느낌 혹은 생각에 머뭅니다. 무엇이 떠오릅니까? 어떤 기억 혹은 사람입니까? 아니면, 이번 주에 실천한 그림자 묵상에 대한 이미지입니까? 그 어떤 것이어도 좋습니다. 그 생각에 머문 후 노트에 그 생각을 적습니다.

🔸다시 한 번 이 시를 천천히 한 번 더 읽어봅니다. 그리고 시의 전체 맥락에서, 나에게 다가온 이 구절은 무슨 의미일지를 생각해 봅니다. 일주일 동안 했던 그림자 묵상과 어떤 관계가 있을지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이제 내 삶의 자리에서 이 구절이 던지는 의미를 생각해 보고 노트에 적습니다.

🔸마지막으로 편안하게 이 시를 다시 한 번 천천히 읽고, 이 시의 멋과 맛 속에 머무릅니다.

 

🤎일요일

한 주간 적어놓은 묵상 노트를 천천히 읽어 봅니다. 내가 아직 모르는 나를 찾아가는 내적 여정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름다운 시월을 마무리합니다.

 임혜진의 계절 ㅡ 꽃보다 잎

일주일에 한두 번은 아침 일찍 여는 동네 빵집에 샌드위치를 사러 갑니다. 샌드위치를 담아준 종이봉투에 아침의 햇빛과 공기를 흠뻑 묻혀서 돌아옵니다. 요즘 이 산책길에서 제게 기쁨을 주는 건 제철을 맞아 은은한 향기를 내는 흰 칠자화(七子花)입니다. 그리고 꽃나무를 뒤로 하고 맞은 편 계수나무 몇 그루 앞에 다다르면, 갈색으로 물들고 있는 하트 모양 잎들이 꽃 못지않게 예뻐서 사진을 찍어줍니다.

9월에는 일본 작가 고다 아야의 에세이 두 권을 읽고 있습니다. 고다 아야는 일본의 대문호 고다 로한의 딸로, 이혼 후 딸과 친정으로 돌아가 역시 혼자인 아버지와 살았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돌보아 드린 뒤 50대에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고다 아야의 에세이 《나무》는 영화 〈퍼펙트 데이즈〉에 소개되어 알려진 책입니다. 좋아하는 나무들을 관찰하며 사색한 섬세한 글은 말로 쓴 도감 같고, 사랑하면 자세히 본다는 진리를 상기시켜 줍니다.


《나무》의 인기에 힘입어서 올해 출간된 《계절의 수첩》은 고다 아야가 여러 매체에 기고한 계절에 관한 단상들을 모아서 낸 책입니다. 그중 봄에 대한 글에서, 감나무의 어린 잎이 보드랍고 선명하게 펴지는 모습을 기뻐하며 쓴 부분이 인상 깊었습니다.


“감나무 잎의 청아함이 눈에 들어오면 그것이 기준이 되어 다양한 푸른빛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풀고사리의 울퉁불퉁한 푸름, 감탕나무의 새싹, 붉거나 하얀 꽃을 에워싼 앵초 잎…푸름이 선명하게 구별될 때는 빛과 그림자가 지닌 흥미로움도 함께 도드라진다.”


서울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식물 이야기를 쓴 정혜덕의 《집 밖은 정원》에도 감나무 잎을 예찬한 글이 있습니다.


“감나무는 가을에만 돋보이는 나무가 아니다. 감나무의 잎은 두껍고 광택이 있다. 여름철 장대비가 한 차례 빗줄기를 쏟아부은 뒤 쨍한 하늘로 바뀌면 감나무 잎은 매끈하게 빛난다. 세상에는 요란하게 반짝이는 것들이 많고 그에 비하면 감나무 잎에 감도는 빛은 소박하다. 하지만 묵직하고 은은하게 빛나는 감나무 잎을 보고 있으면 내 삶의 도구들에서도 저런 빛이 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든다. 그것들을 쓰는 나에게도 비슷한 빛이 났으면 하고 바란다.”


국어책에 실려도 손색 없겠다고 생각하며 행복하게 편집했던 이 책은 “감나무를 보면 반짝이고 싶어진다”가 제목 후보 중 하나이기도 했었습니다. 독자님의 집 밖 정원에는 어떤 반짝이는 나무가 있나요?

오수경의 계절 ㅡ 미용실에 가면

이상하게도 단골 미용실이 없는 삶을 상상만 해도 막막해지곤 합니다. 단골 미용실은 내 머리카락이 ‘거지존’에 다다랐을 때 잘라야 할지 조금 더 기다려야 할지 함께 심사숙고해 주고, ‘어려 보이게’ ‘귀염직하게’라는 되도 않는 주문도 진지하게 들어주고, 특별한 날의 증인이 되어주거나 대나무숲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미용실은 머리만 자르고 볶는 곳이 아니라, 잘 마른 미용실 수건처럼 마음도 뽀드득 씻어 뽀송하게 말리기도 하는 공간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송혜교 사진을 들고 갔다가 “이건 안 됩니다”라는 대답을 듣고 시무룩해질 때도 있었지만요.


요즘은 거의 사라진 풍경이지만 영화나 드라마에서 미용실은 ‘사랑방’ 같은 공간으로 묘사되곤 했어요. 누구네 집에 무슨 일이 있는지, 누구와 누가 싸웠는지 등 동네 소식을 공유하거나 계모임이 결성되기도 하는 작은 사회였죠. 미용사(요즘에는 디자이너로 불리는)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의 사연도 드라마의 단골 소재였죠. 이렇게 미용실은 우리 ‘일상’의 풍경을 보여주는 보통의 공간으로 자주 등장했어요. 


요즘 보는 드라마 〈날아올라라 나비〉에는 재벌이나 변호사가 아닌, 미용실에서 일하는 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애매한 금액의 로또에 당첨되어 미용실을 차린 원장, 미셸을 중심으로 미대 나온 디자이너 안광수, 염색을 잘하는 젠, 그리고 인턴들인 기쁨, 박무열, 수리, 우선생이 ‘날아올라라 나비’라는 미용실에서 일하며 성장해 가는 이야기예요. 여기에 다양한 사연들을 가진 손님들이 미용실을 방문하고, 드라마는 큰 사건이나 사고 없이 ‘날아올라라 나비’의 하루하루를 보여줍니다. 


독자님은 언제 미용실에 가시나요? 물론 머리를 잘라야 할 때, 염색을 해야 할 때… 가시겠지만, 드라마를 보며 찬찬히 생각해 보니 저는 스스로를 조금 더 아껴주고 싶을 때 미용실을 가더라고요. 미용실에 간다는 건 내 일상 리듬이 정상 범위 내에서 흘러가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해서 그걸 확인하고 싶을 때 가기도 해요. 그러니 미용실 가는 일은, 사실 참 좋은 일인 것 같아요.

지난 13호에 보내주신 따듯한 답장을 소개합니다.
  • 도서관에 '랭스로 되돌아가다' 반납일인데 오늘 오브를 만났네요. 또 무슨 소식을 전해주실까 귀를 쫑긋 기울이게 됩니다. 라캉이 말한 상블랑(semblant)-받아들이기 힘든 우리의 삶을 매끄럽고 부드럽게 가리는 삶의 방식과 담론-이 들어옵니다. 기억하고 알아차려 볼게요! ⇒ 이런 운명이라니...! 기억과 알아차림을 잘 실행하셨는지 안부가 궁금해지네요. 독자님의 '귀 쫑긋'이 참 반갑고 감사합니다. 

독자님의 답장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어요. 뜻밖의 선물처럼 여기며 소중하게 읽겠습니다. 📮 다음 《오브》는 10월 14일에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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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행 : 출판사 옐로브릭
  • 에디터 : 오수경·임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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