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고을에서]


주름살


이재철 목사
 
급성 류마티즘으로 2017년 가을부터 스테로이드를 복용하기 시작한 저는 올해 2월 하순이 되어서야 복용을 중단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만 5년 6개월 동안이나 스테로이드를 복용한 셈입니다.
스테로이드를 복용하는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얼굴이 붓는 것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만 5년 6개월 동안 제 얼굴은 마치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밤낮 탱글탱글하게 부어 있었습니다. 제 사정을 알지 못하는 분들은, 혹 보톡스 주사를 맞았느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스테로이드 복용을 중단한 지 2개월이 지난 지금은, 붓기가 빠진 얼굴에 주름살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보게 된 제 자신의 삶의 흔적입니다. 그래서 그 흔적을 가려온 붓기보다 그대로 드러내준 주름살이 훨씬 정겹습니다.
세월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세월은 결코 허무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책]


아가랑 시랑 엄마랑 ― 나태주 시집


나태주 시인  

세상에서 보기 좋은 모습

세상에서 가장 보기 좋은 모습은 아무래도 젊은 엄마가 어린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일 것입니다. 그다음은 엄마와 아기가 손을 잡고 길을 걸어가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또 어떤 모습일까요?
아무래도 나는 엄마와 아기가 머리를 맞대고 책을 읽는 모습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아기는 아직 글자를 읽을 줄 모르거나 서툴러서 엄마가 대신 읽어주어야겠지요. 그렇지요. 엄마가 책을 읽고 아기는 그 소리를 듣는 모습입니다.
그렇게 엄마가 아기에게 책을 읽어줄 때 우선은 이야기책을 읽어주겠지만 시를 읽어주어도 좋겠습니다. 엄마가 아기에게 시를 읽어주는 일이 뜬금없는 모습이고 어색한 일이라고요? 그건 미리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시는 노래가 들어 있고 그림이 들어 있는 글입니다. 엄마와 아기가 시를 읽으면서 노래를 느끼고 그림을 느끼는 일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러는 사이 엄마와 아기는 더욱 친해지고 더욱 좋아하는 사람들이 되고 사랑하고 믿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엄마와 아기를 이어주는 마음의 징검다리로서의 시—그 아름다운 세상에 나도 오래 머물며 아기의 마음, 엄마의 마음을 느끼고 싶습니다. 세상의 많은 엄마와 아기들이 이 시집 속으로 놀러와 함께 웃으며 노는 시간을 오래 가졌으면 합니다.

나태주 지음 | 160쪽 | 2023년 5월 4일
[이덕주와 오후의 정원]


말씀기도와 걷기도

이덕주, 전 감신대 교수


은퇴 후 내 일상은 비교적 단순하다. 오전에는 책상에 앉아 서너 시간 성경을 쓰는 일에 몰두한다. 그렇게 쓰는 일에 집중하다 보면 마음속 잡념이 사라지고 내적 평화를 맛볼 수 있다. 그리고 성경을 쓰다 보면 어느 순간 성경에 인쇄된 말씀이 굵은 활자로 내게 뛰쳐나온다. 전에 읽었던 말씀인데 새롭게 읽혀지면서 마음이 뜨거워진다. 문자가 영으로 바뀐다. 눈으로 읽고 백지에 옮겨 적던 말씀이 내 “마음 판에 새겨지는”(고후 3:3) 순간이다. 성경 말씀을 옮겨 쓰는 일에 전념했던 고대 서기관과 수도사들의 영성이 이런 것일 게다.
그렇게 마음에 새겨진 말씀이 기도로 바뀐다. 머리로 생각해내는 기도가 아니라 말씀 자체를 기도로 드린다. 그리하여 나의 소원을 비는 기도가 아니라 “그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내 안에 심어두신 소원”(빌 2:13)을 아뢰는 기도, 곧 “그의 뜻대로 구하는”(요일 5:14) 기도가 나온다. 나는 그것을 ‘말씀 기도’(prayer in the word)라 부른다. 이런 기도를 하면 참 마음이 편하다. 내게 필요한 것을 구하는 기도를 하고 나면 “과연 들어주실까?” “응답이 없으면 어떡하지?” 초조하고 근심이 따르는데 말씀기도를 하면 “그대로 이루어지면 그분께 영광이요 안 되더라도 그분 뜻이지” 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 
외부 약속이 없는 오후에는 두세 시간 걷는 일을 한다. 우리 집 뒤편 서오릉 뒷산 오솔길을 주로 걷지만 불광천이나 창릉천을 따라 조성된 산책길을 걷기도 한다. 가급적 생각 없이 걷는 데 집중한다. 그렇게 무념상태로 걷다 보면 새로운 생각, 신비로운 감정이 솟구치면서 찬양과 기도가 스며 나온다. 자연스럽게 산책이 기도로 연결된다. 후배 송병구 목사는 그것을 ‘걷기도’(prayer in walking)라 했다. 적절한 표현이다. 
그런데 오전의 말씀기도가 오후의 걷기도로 연결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얼마 전 창릉천을 따라 걷는 중에 운동을 하러 나온 많은 사람들, 그중에도 병을 앓고 회복하려 애써 걷는 노인들을 만났다. 휠체어를 타고 나온 환자도 보였다. 그것은 나의 미래이기도 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0-12).
작년 가을로 나이 칠십을 넘긴 터라 “내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처량한 마음이 들었다. “그게 인생이지” 하고 걷는데 홀연 오전에 썼던 말씀이 떠올랐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as long as, it is called today). 바로 그거였다. 어제(과거)는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기에 거기 매여 있을 필요가 없고(잘했든, 못했든) 내일(미래) 역시 그분의 영역이기에 간섭할 수 없는 시간이다. 그러니 내가 뭔가 결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시간은 오직 그분이 허락하신 ‘오늘’밖에 없다. 그렇게 주어진 ‘오늘’에 충실할 뿐이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이 그렇게 감사할 수 없다. 그래서 ‘오늘’도 오전에 말씀을 쓰고 오후에 걸으면서 아직도 나를 들어 쓰시려는 그분 뜻을 깨닫고 이뤄드리기를 기도할 뿐이다.
[책 속에 넣어둔 편지]


김준표 에디터

예배란 무엇일까요? 주일에 한 번 혹은 평일까지 합하면 한 번 이상 건물에 모여서 설교를 듣고, 찬양하고, 헌금하고 헤어지는 의식일까요? 코로나 팬데믹이 발발하며, ‘모이는 예배’라는 패러다임에 금이 생겼고 균열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팬데믹 상황은 끝났지만 교인 수는 여전히 회복되지 않습니다. 예배가 무엇인지 다시 물어야 할 상황이 온 것입니다. 예배학 박사인 안덕원 교수님의 저서 《안덕원 교수의 예배 꿀팁》이 여기에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혼자서, 온라인으로 드리는 예배도 가능하다는 인식이 확산되는 이때에 ‘예배’의 본질과 의문에 해답을 얻는 시간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예배에 이 책이 ‘꿀팁’이 되기를 바랍니다.

안덕원 지음 | 188쪽 | 2023년 4월 28일
[읽기의 순간들]


당연(當然)의 반대말은 비범(非凡)입니다


박정아, 청년을 만나는 청년


우리는 주로 ‘당연한 것들’에 대한 지배를 받습니다. 주로 그것들은 이유 없이 관습적으로 따라온 것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이런 관습에 대해 이유를 묻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당연’하니까요. 단지 질문뿐인데도 사람들의 눈초리는 따가워 이상한 사람이 된 것만 같습니다. 때로는 금기를 깨뜨리는 것 같은 마음도 듭니다. 
《사실은 당연하지 않은 것들》의 저자는 ‘당연’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더 이상 공고해지지 않으려면, 진지하게 성찰적 사고를 거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럴 때 ‘당연’은 운명이 아니라 선택이 되는 시점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어떤 식으로라도 용기를 낼 때 ‘당연’에는 균열이 생기게 되고, 그 균열 사이로 찬란한 빛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러한 새로운 세계는 그저 얻어지지 않습니다. 다른 이들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것들이 나에게는 ‘당연하지 않음’에 괴롭고 끙끙 앓는 시간들을 보냅니다. 그 후에 비로소 툭하고 던지는 투박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연의 반대말은 ‘괴상’(怪常)이라거나 ‘이상’(異常)이 아닙니다. 당연의 반대말은 비범(非凡)입니다. ‘당연’을 깨는 우리의 처절하고도 소박한 용기를 저는 비범이라고 표하고 싶습니다.
그 연장선에서 이 책은 그런 질문을 마음속의 소용돌이로 남기지 않고 토해낸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당연하지 않다는 청년들의 물음에 저자는 진심과 용기로 화답합니다. 글 안에서의 청년과 저자의 모습이 마치 줄탁동시(茁啄同時)와 같아 보였습니다. 알의 안과 밖에서 쪼는 힘은 ‘당연’에 균열을 일으켜 마침내 눈부신 빛을 보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누군가에게는 밖에서 쪼는 힘을 더해주는 역할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가까이 또 멀리]


지금까지 우리는 기도라는 문제를 완전히 잘못된 방식으로, 잘못된 수준으로 다루어 왔습니다. “기도가 효력이 있는가?”라고 묻는 바람에 처음부터 잘못된 태도로 기도를 대하게 된 것이지요. ‘효력’이라니요. 기도가 무슨 마법입니까, 자동으로 작동하는 기계입니까? 기도는 완벽한 착각이거나, 미숙하고 불완전한 인격체들(우리)과 더없이 구체적인 인격자와의 인격적 접촉이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무엇인가를 구한다는 청원의 의미로서의 기도는 전체 기도의 작은 한 부분일 뿐입니다. 자백과 참회로 기도의 문지방을 넘고, 흠모로 기도의 성소에 들어간다면,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그분을 보고 누리는 것은 기도의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일입니다. 기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은 그 계시의 자연스러운 결과이지 가장 중요한 결과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되면 그분이 어떤 일을 하시는지 배우게 됩니다.
새 책 나옵니다



𝓃𝑒𝓌 중세와 그리스도교 그리스도교의 역사 2
《장미의 이름》을 쓴 움베르트 에코는 중세 컬렉션(한국어판 2015년 출간, 전4권)에서 중세가 ‘무엇이 아닌지를’ 20쪽에 걸쳐 설명했다. 사실 1,000년에 걸쳐 변화를 거듭한 시기를 몇 단어로 못 박아 규정한다면 억울한 일일 수도 있다. 고대와 근대는 단편적으로 규정하지 않으면서 중세는 왜 ‘암흑 시대’였다고, 종교가 지배한 시대였다고 일률적으로 규정되어야 할까?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박흥식 교수는 콘스탄티누스 황제 통치기부터 종교개혁 이전까지를 총 4부로 나누어 중세가 어떠한 시기였는지 설명한다. 이 시기는 라틴 문명의 유년기였으며, 동서 그리스도교가 분열한 때였고, 교황이 그리스도교 세계의 수장이 되었다가 다방면의 중첩된 위기로 대전환이 이루어진 시기이기도 했다. 홍성강좌 두 번째 내용에 해당하는 이 책은 지나간 역사를 되돌아보며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성찰해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700쪽(예상) | 2023년 6월 출간

𝓃𝑒𝓌 C. S. 루이스 정본 독서 노트 (가제)
C. S. 루이스 정본 클래식 컬렉션을 한눈에 보고, 나만의 독서 루틴을 만들어볼 수 있다. 독자들이 자유롭게 생각을 드로잉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고, 루이스의 주요 저작들을 번역해 온 홍종락 역자가 쓴 C. S. 루이스 연보와 저작을 읽기 위한 가이드가 수록되어 있다.     
160쪽 | 2023년 6월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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