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느긋하게, 여행 2 | 최갑수
경북 영주
나는 지금 풍기온천의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다. 길고 지루한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왔다.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날씨가 쌀쌀하다. 온천하기에 좋은 계절이 되었다.
풍기 온천은 처음이다. 여행 작가로 일하며 영주를 여러 번 취재했다. 물론 풍기 온천에 관해 짤막하게 원고에 쓴 적도 있다. 하지만 직접 탕 속에 몸을 담가 본 적은 없다. 여행 작가란 그런 직업이다. 여행을 하지만 여행을 즐길 만한 시간은 늘 부족한 사람이다. 사진을 찍고 취재를 한 후, 빨리 다음 취재지로 이동해야 한다. 그리고는 돌아와 느긋하게 여행한 척하며 원고를 쓰는 것이다.
방금 죽령옛길을 걷고 온 참이다. 숲은 떡갈나무와 참나무, 물푸레나무, 신나무, 잣나무로 빽빽했다. 으름덩굴이며 청가시덩굴, 인동덩굴, 칡덩굴, 종덩굴이 그 나무를 끌어안고 있었다. 가을은 숲에도 당도해서, 숲은 달짝지근하고 시큰한 내음으로 가득했다. 나는 소백산역을 출발해 죽령 고갯마루까지 약 2.5킬로미터를 걸었고, 고개에 도착해 한숨 돌리고 다시 길을 되짚어 출발했던 자리로 돌아왔다. 왕복 세 시간이 걸렸다. 걸을 때마다 짙은 나무 냄새가 콧속으로 훅훅 스몄다. 사람 한 명이 지나가기에 안성맞춤인 그 오솔길을 기분 좋게 걸었고, 걷다가 가끔 멈추고서는 숲속에 깃든 고요를 느꼈다. 번잡하고 시끄러운 도시의 소음에서 벗어나 숲에서 비로소 만나는 고요. 복잡하고 힘든 생활에게서 몇 발짝 떨어져서 느껴보는 고요. 이 온전한 고요를 왕복 5킬로미터 동안 즐겼다.
그리고 지금은 섭씨 35도의 따뜻한 물 속에 몸을 담그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 따뜻한 온천물에 몸을 담고 있는 동안에는 나쁜 일들이 생기지 않을 거라는 안도감이 든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착실하게 제 역할을 하며 굴러가고 있는 것 같아 안심이 된다. 탕 위로 모락모락 솟아나는 김을 보고 있노라면, ‘언젠가 멋진 삶을 살고 싶다’라는 생각보다는 ‘내 인생도 그럭저럭 별 탈 없이 지나가고 있군’ 하는 생각이 드는 곳도 바로 온천이다. 온천은 피부에도 좋고 관절염에도 좋지만, 인생의 조바심을 느긋함으로 바꾸는 효과도 있다. 인생이란 대체 무엇일까?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고민하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몸을 담근 채 ‘이런 느낌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아’라고 생각하는 순간도 필요하다.
혼자서 소도시를 여행하려고 마음을 먹은 건 지난해부터다. 이십 년 동안 여행 작가로 일하며 여행이 좀 지긋지긋했는데,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너무 바삐 쏘다닌 탓이 컸다는 것으로 나름 결론을 내렸다. 이제는 나이도 조금 들고 했으니 나이에 걸맞게 좀 여유롭게 다녀보자,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단 작은 중고차를 한 대 샀다. 2014년 식이니 꽤 오래된 차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곳곳을 취재하며 알게 된 건, 1,000cc 이상이면 우리나라 웬만한 곳은 다 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 차는 1,400cc이니 충분하다. 인터넷 중고차 사이트에서 중고차를 주문하니 사무실 앞으로 배달이 왔다. 좋은 세상이다. 탁송 기사가 내민 인수증을 사인을 하고 나자 딜러에게서 전화가 왔다. 일주일 동안 타 보시고 마음에 안 드시면 반납하시면 됩니다.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였다. 나는 운전석 문을 호기롭게 닫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뭐, 이 차로 못 가는 곳은 안 가면 되는 거고.
그렇게 여행이 시작됐다. 나름 제목도 지었다. 이건 직업병이다. 기자와 작가, 편집자로 오래 살아온 탓에 무슨 일을 하더라도 일단 제목을 지어야 뭔가를 하는 것 같다. 이름하여 ‘느긋하게, 여행’. 이 제목 아래 국내 이곳저곳을 여행하기로 했다. 몇 가지 여행의 원칙을 세웠는데, 이것도 직업병이다. 대략이나마 목차가 나와야 안심이 된다.
1) 혼자 갈 것. 그래야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고 내가 먹고 싶은 걸 먹을 수 있으니까.
2) 그 도시에서 하룻밤 묵을 것. 지금까지는 웬만하면 당일치기로 다녀왔다. 시간과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그래야 마진율이 높아지니까. 하지만 이젠 그러지 말자.
3) 그 도시의 멋진 카페에 가서 그곳의 시그니처 메뉴는 꼭 맛볼 것.
4) 카메라 딱 한 대만. 하지만 사진은 되도록 찍지 않는다. (지금은 카메라를 아예 가져가지 않는다. 아이폰이면 충분하다.
5) 1~4는 굳이 지키지 않아도 된다.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그렇게 떠난 첫 번째 여행지가 화천이었고, 두 번째 여행지가 영주다.
한 시간 동안의 기분 좋은 온천을 마치고 나니 몸이 가뿐했다. 콜라 한 병을 사서 차에 시동을 걸고 라디오를 켰다. 라디오에서는 파바로티의 ‘푸니쿨리 푸니쿨라’가 흘러나왔다. 파바로티는 힘찬 목소리로 신나게 노래하고 있었다.
“어젯밤 나는 산으로 올라갔다네 / 그곳이 어디인지 아는가 / 무정한 마음에도 더 이상 절망하지 않아 / 이제 나를 괴롭히지 않아 / 산은 불을 뿜고 타오르고 있지만 당신이 도망간다면 / 불이 붙는 건 당신이겠지 / 하늘을 보려면 / 지구에서 산꼭대기로 가자 / 걷지 않고 / 우리는 프랑스와 스페인을 볼 수 있을 거야 / 올라가자 올라가자 (……) 푸니쿨리 푸니쿨라, 푸니쿨리 푸니쿨라 / 꼭대기로 올라가자, 케이블카”
와, 정말 멋진 노래다. 하늘을 보려면 산꼭대기로 가라니! 카 오디오에서 나오는 파바로티의 목소리는 즐겁게 여행하라는 응원처럼 느껴졌다. 나는 차창을 열었다. 초가을의 상쾌한 공기가 가득 밀려 들어왔다. 옛길을 걷고, 온천을 하고 나온 후 콜라를 마시며 파바로티를 듣는 가을날이라니. 나는 힘껏 심호흡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