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빈의 꽃병(Rubin vase)’은 덴마크의 심리학자 에드가 루빈(Edgar Rubin)이 고안한 이미지로, 어느 곳에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 보일 수 있음을 말한다. 『리아의 나라』에서 앤 패디먼은 리아가 태어나고 자라난 머세드 지역 몽족을 루빈의 꽃병에 간접적으로 비유한다. 이 대목을 마주한 순간, 이것이 바로 『리아의 나라』를 담아내기에 가장 걸맞은 꽃병이라고 생각했다.

저자는 이 꽃병을 머세드의 몽족을 소개하는 용도로 활용하였지만, 그와 더불어 『리아의 나라』가 다루는 미국과 몽족 문화의 관계와도 상당히 유사하다는 감상을 받았다.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대척하거나 혹은 마주 보고 있는 두 얼굴, 그리고 두 얼굴이 만든 경계에 머무르는 연약한 꽃병….

결국 『리아의 나라』의 표지는 이런 꽃병을 담아내게 되었다: 꽃병 밖 영역에는 몽족과 미국, 두 문화를 상징하는 얼굴이 각 문화를 상징하는 패턴을 입고 나타났다. 리아를 상징하는 꽃병의 영역에는 그의 삶을 담은 『리아의 나라』의 제목과 제목의 부속 텍스트들이 자리하게 되었다.

꽃병 안팎의 요소들이 자리를 잡은 후에는, 이들이 아름답게 어울릴 수 있도록 다듬어가는 일에 열중했다. 몽족과 미국 문화의 패턴을 만드는 임무가 우선이었다. 몽족의 화려한 텍스타일과 미국의 성조기를 오가며 형상을 수집한 후, 모니터 위에서 『리아의 나라』를 위한 패턴을 제작했다. 그렇게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성조기 색상의 미국 패턴, 갖가지 화려한 색상의 몽족 패턴이 아닌, 『리아의 나라』에서 두 문화를 바라보는 평등하면서도 따스한 시선을 담은 노란 톤의 패턴이 탄생했다.

완성된 패턴을 입은 두 얼굴과 함께, 꽃병의 영역에서는 『리아의 나라』의 인상과 어울리는 서체를 선택하고 조화롭게 자리 잡는 일에 열중하였다. 제목 서체로 ‘금빛나루’, 제목 부속 서체로 ‘Sandoll 단편선’이 활용되었으며, 마지막으로 작지만 단단하고 다부진 ‘반비’의 로고와 함께 마무리되었다.

『리아의 나라』를 만들며, 그 과정이 마치 한땀 한땀 수를 놓는 듯한 수공예적인 경험에 가까웠다고 돌아본다. 디지털 기기를 활용한 실제 제작 방식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나, 책의 많은 페이지 중 한 문장을 찾아 그로부터 상징을 끌어내고, 그 의미를 적절히 담을 형태를 다듬으며, 긴 시간을 들여 직접 패턴을 제작하는 디자인의 과정적인 측면에서 와닿은 감상이다. 이 경험을 조금이나마 전해보고자, 책의 제작 단계에서 질감이 묻어나는 종이를 선택하였고, 꽃병의 입체감을 살리는 형압을 넣었으며, 책은 코팅하지 않았다. 그렇게 560쪽의 종이와 함께 엮여, 『리아의 나라』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이제 『리아의 나라』의 꽃병은 나의 손을 떠났다. 이 문화의 꽃병에 담길 것이 무엇인지는 독자의 선택과 해석에 달렸다. 그것이 궁금하다면, 얼굴과 꽃병을 들춰, 560쪽의 페이지를 넘겨, 그리고 마침내 남은 것들을 찬찬히 마주해보길….

―Reum(『리아의 나라』 디자이너)

『리아의 나라』 표지

『리아의 나라』 디자이너의 디자인 후기에 덧붙여, 표지에 사용하지 못해 못내 아쉬웠던 이미지를 소개합니다.

두 번째 표지 디자인 회의에서 우연히도 편집부와 담당 디자이너가 비슷한 이미지를 가지고 왔던 기억이 납니다. 편집부에서는 몽족의 역사가 담긴 ‘파 응도’ 이미지를, 디자이너는 몽족 출신 아티스트인 Tshab Her의 작품 「깃발(Flag)」을 서로 보여주었어요.

‘파 응도’는 몽족의 전통 방직을 일컫는 이름으로, 다양한 무늬를 자수나 납염, 아플리케 방식으로 짜 넣은 직물을 말합니다. 책 속에서는 앤 패디먼과 가까워지기 시작한 리아의 어머니 푸아 리가 벽장 구석 가방에서 자랑스럽게 꺼내어 보여주는 장면에서, 그리고 머세드군 복지과 회의실에 걸려 있던, (몽족이 살던 곳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하는 계기가 된) 라오스 비밀전쟁을 묘사한 커다란 벽 장식으로 등장합니다.

 

머세드군 복지과 회의실에는 라오스 비밀전쟁의 결말을 묘사한 커다란 파 응도가 걸려 있다. 자수와 아플리케로 장식한 이미지로 몽족이 롱티엥에서 미국 비행기 네 대에 몰려들고, 등에 거대한 짐을 지고 태국으로 걸어가고, 넓은 강을 헤엄쳐 건너 반 비나이에 정착하고, 마침내 미국행 비행기로 데려다줄 버스에 짐을 싣는 모습들이었다.—『리아의 나라』 390~391쪽

 

이 장면에 묘사된 것과 유사하리라 생각되는 ‘파 응도’ 사진을 여러 장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파 응도’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얽히고설켜 마침내 하나의 큰 그림을 드러내는 『리아의 나라』라는 책의 성격과 잘 맞는 이미지라고 생각했지요. 고된 역사를 다채롭고 아름다운 그림으로 수놓은 데에서 자긍심이 강한 몽족 사람들의 성격이 엿보이기도 했고요. 하지만 표지에 쓸 수 있을 만한 고화질의 이미지를 확보하기 어려운 문제, 저작권을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 등으로 결국 포기했답니다.

디자이너가 보여준 작품 역시 ‘파 응도’와 연결지을 수 있는 작품이었어요. Tshab Her는 미국의 몽족 이민 2세대 여성 작가로, 자수, 직물, 설치 작업, 퍼포먼스 등을 통해 몽족 이민자 정체성, 가족 친밀성, 백인적 시선(white gaze)의 내면화, 섹슈얼리티 등을 탐구하는 작가입니다. 「깃발」은 몽족 전통 직물로 만들어진 작품이었는데, 몽족 특유의 패턴이나 ‘여성적’ 작업의 재개념화, 흔히 국가나 민족 정체성을 드러내는 수단인 깃발이라는 모티프 등이 책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설치 작업이라 표지에 사용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다만 이런 아이디어들을 통해 얻은 ‘직물 패턴’은 최종 디자인에 반영되어 ‘루빈의 잔’을 이루는, 몽족의 이야기를 담은 상징적 디자인 요소로 남게 되었습니다.

―편집자 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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