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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속도 얼마 전 올해 연도를 쓰려던 순간 잠시 멈칫했습니다. 2020년이라고 쓸 뻔하다가 가까스로 2021년이라는 사실을 떠올렸지요. 숫자를 적는 동안에도 낯설게만 느껴졌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식으로 표현하면 나의 뇌는 코로나가 시작된 작년부터 지금까지를 한덩어리로 여기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마저 어느새 6월 중순입니다. 사람들은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겠다는 말들을 곧잘 합니다. 사실 시간의 가속화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주목해 왔습니다. 독일 사회학자 하르트무트 로자도 그중 한 명입니다. 그는 <소외와 가속>이라는 책에서 지금의 사회를 '가속 사회'라고 규정하면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노동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노동자(그리고 사용자)는 '핵심 업무'에 몰입할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고 불평을 한다. 의사가 환자를 보는 시간, 교사가 학생을 가르치는 시간, 과학자가 연구로 보내는 시간 등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끝내 하지 못하고 있다는 주장의 근거는 매년 '해야 할 일 목록'이 삶의 전 영역에서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우리는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을 정당화하기 위해 언제나 '정말 당장 그 일을 해야 해(신문을 읽어야 해, 컴퓨터를 업데이트해야 해, 세금계산서를 써야 해, 새 옷을 사야 해 등)'와 같은 변명을 댄다. 이는 우리가 이런 행동을 얼마나 타율적으로 경험하는지를 뚜렷이 보여준다. 나아가 이는 통계적으로 봤을 때, 모든 선진국의 거의 모든 사회집단의 사람들이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할 '시간이 정말 없다'고 불평한다는 연구 결과와도 부합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하루 3시간 이상 텔레비전을 보거나 인터넷서핑을 할 시간이 있는 사람들도 그렇게 느낀다는 점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만일 그렇다면 그들은 자기가 가장 좋아한다고 주장하는 것(가령 바이올린 연주, 도보 여행, 친구 방문 등)보다 실은 텔레비전을 보는 것을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사람들은 대체로 어떤 행동을 일단 하기 시작하면 실제로도 즐기는데, 텔레비전 시청을 즐기고 만족을 느끼는 정도는 놀라울 만큼 낮다. 따라서 이 연구 결과는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즉, 사람들은 '진정으로 하기를 원하는' 일은 거의 안 하고 그 대신 (물론 전혀 강제가 없이) 실제로는 그리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지는 않는 일을 자발적으로 한다. 이런 '자기 소외' 현상을 저자는 갈수록 고조되는 경쟁과 그에 따른 가속 논리로 설명합니다. 오늘날처럼 속도의 명령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욕망의 장기적 발전(가령 취미 계발)보다는 욕망의 단기적 실현(텔레비전 시청)을 추구하는 편이 낫다. 뿐만 아니라 이런 세계에서는 실제로 사용할 재화보다는 또 다른 '가능성'과 선택지를 구매하는 쪽으로 이끌린다. '실제' 소비를 포기하고 그 대신 '쇼핑'을 늘려 보상하는 쪽으로 이끌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잠재적 능력, 선택지, 가용 자원은 줄곧 늘어나도, 우리의 현실적 능력 혹은 '실현된' 능력은 갈수록 줄어든다. 우리의 책, CD, DVD, 망원경, 피아노 등을 예전보다 많이 소유하지만 소화하지는 못한다. '소화'는 시간이 너무 많이 들고 우리는 시간적으로 따라잡아야 한다는 초조함을 점점 더 느낀다. 그래서 쇼핑을 늘려 이 실현되지 않는 소비를 보상한다. 경제에는 좋은 일이겠지만 좋은 삶에는 나쁜 일이다.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하기를 '정말' 원했는지, 그리고 자기가 어떤 사람이기를 정말 원했는지 결국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해야 할 일 목록'의 처리에 눌리고 (쇼핑이나 텔레비전 시청처럼) 즉각적 보상이 주어지는 소비 활동에 압도되어, 자신에게 '진정성 있는' 일 혹은 소중한 일에 대한 감각을 잃곤 한다. 외된 폰 호르바트가 표현한 대로, 나는 본래 지금과는 썩 다른 사람이지만 단지 그럴 시간이 없을 뿐이라고 느낀다. 일상 속에서 체감하는 '시간의 주관적 역설'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신선하고 집중적이고 자극적인 인상을 많이 받는다면 시간은 퍽 빠르게 지나간다. 하지만 하루를 마치며 돌이켜 보면 꽤나 긴 하루였다는 느낌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예전에 다녀온 여행에 대한 체험과 기억을 떠올려 보면 된다. 경험할 때는 빠르게 지나가는 (짧은) 시간이 기억에서는 늘어지는 (긴) 시간으로 변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역이나 관공서에서 지루한 대기 시간을 보내고 또 교통 정체로 도로에서 시간을 보내는 하루를 생각해 보자. 기다리는 동안 시간은 끔찍하게 늘어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런 하루를 보내고 잠자리에 누우면 마치 방금 잠에서 깬 듯 '아무 일 없이' 하루가 지난 간 것처럼 느껴진다. 경험할 때는 느리고 길어진 시간이 기억할 때는 매우 짧은 시간으로 변한다. 문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후기 근대의 미디어 세계에서는 이러한 '고정적인' 긺/짦음이나 짧음/긺 시간 경험은 차츰 새로운 시간 경험으로, 흥미롭게도 '짧음/짧음' 패턴으로 대체된다는 사실이다. 당신이 집에 돌아와 텔레비전을 '잠깐만' 휙휙 돌려 보기로 했다고 하자. 그러다 몇 시간 동안 채널을 돌리며 텔레비전을 보거나, 아니면 정말 재미있는 스릴러 영화를 계속 볼 수도 있다. 그러면 앞서 말한 여행에서처럼 당신이 눈치 채지 못하는 동안 시간은 아주 빨리 지나간다. 그러나 텔레비전을 끈 뒤에도 시간은 (여행에서처럼) 늘어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줄어들어 거의 없어질 지경이 된다. 이날 잠자리에 들면, 긺/짧음 경험에서와 똑같이 텔레비전을 본 시간은 증발해 버린다. 하루 종일 텔레비전만 봤다면 방금 잠에서 깬 것처럼 [아무 일 없이 하루가 지난 것처럼] 느낄 것이다. 여기에서는 짧음/짧음 패턴이 나타난다. 경험할 때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고 기억할 때는 수축된다. 텔레비전을 볼 때만이 아니다. 인터넷 서핑이나 컴퓨터 게임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우리가 관여하는 여러 행위와 맥락은 점점 산산이 흩어진다. 헬스클럽에 갔다가 놀이공원에 가고 식당과 영화관에 가고 동물원에 가고 학술대회나 업무 미팅에 참석하고 마트에 들르는 이 모든 활동은 행위와 경험의 고립된 일화들로서 통합적이고 의미 있는 방식으로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마침내 우리는 거기에 있었던 일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이런 현상은 발터 벤야민이 거의 백 년 전에 발견한 경향이기도 합니다. 그는 독일어로 '체험Erlebnis'과 '경험Erfarung'을 구별했다. 전자가 경험의 단편적 일화라면, 후자는 우리에게 흔적을 남기는 전체적 경험, 우리의 정체성 및 역사와 연결되는 중요한 경험, 즉 우리가 누구인지를 건드리고 변화시키는 경험이다. 벤야만은 이제 체험은 풍부하나 경험은 궁핍한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20세기의 기술들 때문에 우리가 맺는 관계의 수와 종류, 접촉의 잠재적 빈도, 관계의 명시적 강도, 시간적 지속성 등은 모두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들이 극단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우리는 사회적 포화 상태에 이른다. 그 결과 진실로 서로 '관계함'은 구조적으로 어려워지고 있다. 우리의 자아 감각은 우리의 행동 경험 관계에서 생겨나고 우리가 사물의 세계를 포함한 사회적 세계와 시공간적 세계에서 어느 장소에 놓이는지(그리고 어느 장소에 스스로를 놓는지)에서 생겨난다. 좋은 삶이란 결국 다층적 '공명' 경험이 풍부한 삶, 찰스 테일러의 표현을 차용한다면 두드러진 '공명축들'을 따라 함께 울리는 삶이라는 것이다. 이런 축들은 주체가 사회적 세계, 객관적 세계, 자연, 노동 등과 맺는 관계에서 생겨난다. 많은 것들과 공명하는 한 주가 되시길 바랍니다. 북클럽 오리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