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치독 주간 브리핑 68호
  • 이번 주 뉴스 브리핑은 김병현 목사(광야교회)의 글로 대체합니다. 장애인인 김 목사는 학창 시절 직접 경험한 차별과 최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가 재개한 출근길 지하철 시위를 언급하면서 진정한 '이웃 사랑'은 무엇이냐고 반문합니다. 독자들께 일독을 권합니다. - 편집자 주
"길을 좀 내어 주면 좋겠습니다"

저는 좌하지소아마비 장애인입니다. 장애인으로 평생을 살았지만 개인적으로 장애인으로서 겪었던 일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좋은 추억은 없고 아픈 기억들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긴말이 되겠지만 꼭 얘기를 해야겠습니다.


초등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는 어머니 등에 업혀 등하교를 했습니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아버지가 자전거로 학교 정문까지 데려다주셨습니다. 친구가 생겼고, 친구들이 제 가방을 들어 주면서 드디어 부모님 수고를 조금이나마 덜어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억도 생생한 중학교 2학년 어느 봄 날, 친구 두 명과 함께 하교길에 올랐습니다. 집으로 가기 위해 학교 정문을 나섰고, 세 번째인가 네 번째 작은 골목길에 접어들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가 제 머리를 딱 때리며 소리를 질러 댔습니다.


"똑바로 걸어!"


머리는 덥수룩, 눈은 조금 풀려 있었고, 온 몸에서 (돼지)본드 냄새가 풀풀나는 형(10대 후반 또는 20대 초반 남성)이 손을 치켜들며 저를 사납게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했고, 화도 났지만 상대방을 얼핏 확인한 저와 친구들은 그냥 속히 골목길을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또다시 걸음을 내딛는데 그 사람은 저의 뒤를 따라오며 계속 똑바로 걸으라며 뒤통수를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무섭고, 창피하고, 분하고, 뭐라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심경으로 제 딴에는 최선을 다해 걸음을 재촉했지만 장애를 가진 제가 뛸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본드에 취한 사람과 맞서 싸울 수가 있었겠습니까. 함께 있던 친구들 역시 그저 속히 그 상황을 벗어나는 것이 최선이라 이심전심으로 생각했는지 저를 부축하고서는 어떻게든 빨리 골목길에서 빠져나오려고 애를 썼습니다.


머리를 얼마나 맞았는지, 똑바로 걸으라는 외침을 몇 번이나 들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그저 영겁의 시간과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던 그 골목을 벗어났고, 집 앞에서 친구들과 헤어져 겨우 방으로 들어와서는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때 그 심정을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40여 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당시를 생각하면 마음이 참혹해지는 것을 보면 분명 인간으로서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문제는 그와 같은 동일한 상황은 아닐지라도 상처와 좌절의 순간은 늘 있었고 그 흉터는 점점 깊어질 뿐 아물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은 지하철을 타고 원하는 곳에 가고 싶다고 합니다. 40여 년 전 저는 골목길을 통해 집에 가고 싶었습니다. 지하철을 이용하는 숱한 비장애인들은 자신의 일정이 늦는다며 온갖 욕설과 혐오의 말들을 쏟아내고 심지어는 휠체어를 밀어 넘어뜨리기까지 합니다. 똑바로 걷지 않는 것이 눈에 거슬리는 젊은 남성은 제 걸음이 이상하다며 머리를 때리고 저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감당하라고 합니다.


자신이 사회의 수호자라 자찬하는 자칭 젊은 정치인은 장애인의 이동권 시위를 향해 '비문명'이라고 비난합니다. 자신이 골목길의 수호자라 생각하는 어느 한 사람은 다리 길이의 차이 때문에 절뚝이며 걷는 것은 나쁜 것이라는 환상에 빠져 있습니다.


40여 년 전에는 '장애인'이라는 단어도 없었습니다. '장애자'라는 소리도 들어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끽해야 '다리병신', 잘하면 '절뚝발이'였습니다. 다리병신 또는 절뚝발이는 장애자가 되었고, 어쩌다 보니 장애인으로 대접(?)까지 받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리병신이나 절뚝발이가 되었건, 장애자가 장애인이 되었건, 장애인을 바라보는 비장애인의 시선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오래전에 본드에 취했던, 절뚝거리며 걷는 것이 자신의 세상에서는 옳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을 굳게 믿고 있던 청년은, 이제는 환상과는 절연했을지 몰라도 자신의 범주에 비정상이 스며드는 현실은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장애인이 가장 인정받고 사랑받는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바로 가만히 있을 때입니다. 가만히만 있으면 안쓰러워해 주고('하고'가 아니고 '해 주고' 입니다), 가만히만 있으면 욕도, 비난도, 혐오나 배제도 없습니다. 그러나 가만히만 있는 장애인이 '인간'입니까? 골목길을 지나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절뚝발이는 '비정상'입니까? 가고 싶은 곳이 있어 지하철을 타고자 하는 장애인들은 '비문명'입니까?


제가 똑바로 걷지 못해 머리를 맞으며 골목길을 걸었던 시대에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바깥출입과 외부 생활을 한다는 것은 꿈속에서나 가능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현재는 휠체어를 탄 중증장애인이라 할지라도 바깥출입도, 외부 생활도 가능하니 세상은 정말 좋아졌나요? 아마도 측은지심이라고는 전혀 없는, 이웃 사랑은 입 발린 말뿐인 누군가의 눈에는 현 시대가 문명의 개화로 보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제 눈과 심정에는 화려한 네온사인 밑의 짙은 그림자가 더 확연히 다가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형상을 닮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빚으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불완전하였고 범죄하여 하나님과 같은 완전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예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의 완전성을 포기하시고 스스로 신적 장애를 선택하시어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예수의 많은 사역 중에 유독 장애인의 치유 사역이 많은 것은 바로 육체적, 정신적 장애의 치료가 아닌 하나님의 형상, 곧 창조주 하나님 형상의 온전함을 회복하기 위한 치유적 의미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장애가 인간을 규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창조 후 모두 하나님의 형상에서 이탈하는 장애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사랑'으로 인간을 규정하고, 맹자는 '측은지심'으로 인간을 규정했습니다. 측은해 하는 마음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요, 안쓰러워하는 마음입니다. 불쌍한 것을 도와주고, 약한 것을 보살펴 주는 마음이 곧 측은해 함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맹자는 사랑을 드러내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측은지심은 오랜 기간에 걸친 사회적 교화의 영향 속에서 형성됩니다. 그래서 맹자는 측은지심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크고도 중요한 계명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측은지심이 없는 인간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명령입니다. 장애인의 날 행사를 치르며 장애를 극복했다고 상을 주고받고, 장애인을 알지도 못하는 장애인 주일을 보내고, 내 삶과는 무관한 장애인을 보며 불쌍해 한다고 측은지심이 발현하는 것도,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진정한 측은지심은 우물에 빠진 아이를 건져 내는 것이고, 진짜 사랑은 장애인을 위해 내 편안을 미루는 것입니다. 내가 편안하면서 우물에 빠진 아이를 구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편안하면서 장애인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장애인 모두가 '나를 지붕에서 내려 예수를 만나게(마가복음 2장) 해 달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장애인이 자신을 지붕에서 내리는 수고를 해 준 네 명의 친구가 자신의 이웃이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다만 예수가 마가복음 2장에서 다 말하지 못한 것을 원하고 바랍니다. 장애인이 침상째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자리를 비켜 주는 누군가가 좀 있으면 좋겠다는 것을 말입니다. 예수께서 지금 이 시대에 살고 계시다면 분명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길을 좀 내어 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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