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을 지나는 보통 사람들 : 애도의 형태

재난을 지나는 보통 사람들 : 애도의 형태

Overcoming crisis

저자 김스피

(Authors) Kim, Supi

출처 인스피아 저널, (65), 2022.11.9, 1-8 (8pages)

(Source) Journal of the Inspia

지난회차 https://page.stibee.com/archives/107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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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핼러윈, 이태원, 재난, 리베카 솔닛, 애도, 군중

1.머리말
2.군중은 항상 용감했다
3.누가 그들을 ‘통제불능’이라 하는가?
4.애도의 수만가지 형태
5.맺음말

【1.머리말】

안녕하세요. 연구자님. 느릿하게 해찰하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 김스피입니다.👤

156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지 약 10일이 지났습니다.

이태원 참사 초반 일각에선 그날 모인 군중 일부를 질타하는 목소리들이 SNS 등을타고 흘렀습니다. 구급차가 왔는데 클럽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사람들의 영상과 출동한 경찰을 두고 코스프레인 줄 알고 길을 비켜주지 않았다는 얘기들이 나왔습니다. 인근 가게들이 문을 걸어잠근 채 사람들을 죽게 내버려뒀다는 이야기까지 나왔죠.

반면, 그 장소에 있던 이들, 생존자들이 이후 전한 말은 전혀 달랐습니다. 이들은 진심을 다해 생판 모르는 사람들을 도왔고 용감하고 침착하게 질서를 지키려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일각에선 “놀러가서 죽었다”는 등 피해자들에게 참사의 책임을 전가하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fig.1> 사고가 있었던 지난달 29일 이후 경찰들이 사고 현장 인근을 순찰하고 있습니다. 뒤쪽으로는 핼러윈 축제 홍보물이 보입니다. 경향신문

역사적으로 수많은 재난 상황에서 군중을 탓하는 목소리가 있어왔습니다. 이들이 ‘자업자득’으로 화를 자초했다거나, 무질서해서 사고를 키웠다거나, 인류애를 잃을 정도로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이요.

정원에 비해 훨씬 많은 관객을 수용해 90여명이 압사한 영국 힐즈버러 참사(1989) 역시 초반엔 훌리건들의 난동이 문제의 원인인양 손가락질 받았습니다만, 결국 인파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정부 측의 책임으로 결론이 났습니다.(링크)

어째서 재난 상황에서 피해자들을 탓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는 걸까요? 사람들은 재난 상황에서 진짜로 비이성적이고 이기적인 군중이었을까요? 이런 ‘편견’을 걷어냈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대재난에서 살아남고, 버티고, 애도했을까요?

오늘 레터에서는 리베카 솔닛의 <이 폐허를 응시하라>, 루시 존스의 <재난의 세계사> 등을 지팡이 삼아 재난과 군중, 애도에 대해 궁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2.군중은 항상 용감했다】

연구자님은 재난 영화라고 하면 보통 어떤 장면이 떠오르시나요?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 동료를 죽음에 몰아넣거나,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남의 것을 약탈하는 아비규환의 장면이 떠오르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유명한 재난 영화 <딥임팩트>에는 방공호를 파서 폭리를 취하는 굴삭기 운전자를 죽이는 군중의 인민재판, 상점에 불 지르는 약탈자들, 식량과 연료 부족으로 폭동 일으키는 군중 등이 등장하는데요. 통상 이런 ‘재난’ 영화는 재난 상황에서 패닉에 빠진 비이성적이고 이기적인 군중에 대한 이미지를 강화해왔습니다.(링크)

<fig.2>영화 <Dante's peak>에서 사람들이 화산 폭발 상황에서 패닉에 빠져 뛰어다니는 모습. (왼쪽) 리베카 솔닛이 쓴 <이 폐허를 응시하라> 책 표지. 영화 갈무리, 펜타그램 출판사

하지만 리베카 솔닛은 <이 폐허를 응시하라> 책에서 이런 편견에 일침을 놓습니다.

이 책은 샌프란시스코 대지진(1906)부터 핼리팩스 폭발(1917), 9.11 테러(2001), 허리케인 카트리나(2005) 등 많은 재난 상황에서 군중들이 ‘실제로’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주목한 책인데요. 저자가 재난과 관련된 수많은 생존자, 관계자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은 결과 사실 재난 상황에서의 군중 행동은 편견과 정반대라는 것을 알게됩니다.
어떤 극악한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침착하게 질서를 지키고, 타인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다는 것이죠.

사실 재난이라고 했을 때 재난의 성격이나 시대, 문화, 지역 등에 따라 천차만별이라 이를 일괄적으로 놓고 분석하는 것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책에는 놀라울 정도로 ‘일반 사람’들의 헌신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저는 이 책에서 9.11 당시 사람들이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침착하고 질서정연하게 탈출한 사건을 인상깊게 보았습니다.

재난 상황에서 사람들은 패닉에 빠진 양떼처럼 일방적으로 구원을 바라며 우왕좌왕한 것이 아니고, 스스로 질서를 지키고 약한 사람을 도왔던 것이죠.

“우리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앞 사람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장애물에 부딪히면 소리를 질러 다른 사람이 피할 수 있게 하자고 제안했다. 그들은 그렇게 했고 그 계획은 완벽하게 실행됐다”[…]그날 많은 경찰들과 소방관들이 용감하게 움직였지만, 군중 틈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용감했다.

자원자들이 현장에 무수히 몰려들었다. 이 집결은 역대 재난사에서 최대 규모였다. 아무 계획 없이 왔던 사람들이 때로는 유용한 역할을 발견하여 몇 달간 대응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그들은 솔선수범하여 구조하기 시작했고 서로를 도왔어요, 모두가 서로를 도왔죠. 내게는 그들 모두가 영웅입니다’

-리베카 솔닛, <이 폐허를 응시하라>(이하 동일)

이는 1세기 이전의 대재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리베카 솔닛은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및 화재 당시 군중들이 “어느때보다도 평온하고 정중했다. 샌프란시스코 역사에서 공포의 그날 밤처럼 시민들이 서로 친절하고 예의발랐던 적은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성공적인 소방 활동의 상당부분은 물 양동이와 삽, 젖은 삼베자루로 무장한 시민들의 노력이 차지했다[…]대규모 군중이 불과 싸웠다[…]”그 이야기들은 시작과 끝이 똑같았다. 전부 범죄와 다름없는 군인들의 멍청한 짓거리로 시작해서, 시민들의 영웅적 행동으로 끝난다.”

<fig.3>Loma Prieta 지역에서 1989년 발생한 지진 당시 시민들이 구조대를 도와 부상자를 이송하고 있는 모습(왼쪽) 최고의 재난 연구자로 손꼽힌 엔리코 콰란텔리(1924~2017)는 수백개의 재난 상황을 분석한 결과 군중들의 '공황'보다도 침착함이 훨씬 두드러졌다고 밝혔습니다. / 오클랜드 트리뷴, 델라웨어 대학 재난연구센터

이태원 참사 이후에도 많은 생존자, 목격자들의 증언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들의 인터뷰에 따르면 당일 상황을 묘사하는 단어로는 혼란이나 아비규환보다도 질서, 침착함, 용감함이 어울렸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황을 파악하고 나서 곧바로 발벗고 CPR에 나섰고,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려고 노력했고 스스로 통제하고 소방관과 경찰이 오기까지 진심을 다해 도왔습니다.(링크)

재난의 상황에서 역사적으로 사람들은 단순히 ‘침착’과 ‘생존’을 넘어, 진심으로 타자를 위하고 자신이 가진 것을 기꺼이 공유하려고 해왔습니다.

연대는 계급, 나이, 성별 등의 장벽을 넘어서기도 했습니다. 뉴욕 9.11 테러 당시 젊은 노숙인들은 재난을 당한 이들을 도울 수 있다는 사실에 긍지를 가졌습니다. 핼리팩스 대폭발(링크)의 경우 오랜 인종, 계급 갈등이 있는 동네지만 폭발이라는 대재난을 앞두고 모두가 문을 열어 다친 사람들을 환대했습니다.

즉석에서 이루어지는 작업과 새로운 역할, 새로운 동맹, 새로운 규칙은 재난에서 지극히 일반적이다[…]”종교와 계급 민족에 의해 분열되고 계급 구조가 엄격한 핼리팩스가 잠시나마 하나가 되었다.”

역사적으로 700여건의 재난에서의 군중 행동을 분석해온 재난연구의 최고봉 엔리코 콰란텔리는 ‘공황’ 자체가 극히 드문 현상임을 밝혀냅니다.(링크) 대부분의 재난 상황에서 사람들은 침착하게 서로 도우려 하기 때문에 오히려 ‘공황’(극단적이고 비이성적인 공포와 도피 행위)이 특이한 상황이라는 거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석사 논문에서 공황에 대해 쓰면서 관련 사례를 여럿 발견할 거라고 기대했어요. 시간이 조금 흐른 뒤, 나는 말했죠. ‘맙소사! 공황에 대해 논문을 쓰고 있는데 어떤 사례도 찾을 수 없어’[...]콰란텔리는 이렇게 말한다. ‘(대부분의 재난 상황에서) 무자비한 경쟁이 아닌 사회적 질서가 건재했고, 이기적 행동보다 협동적 행동이 우세했다.’”

【3.누가 그들을 ‘통제불능’이라 했는가?】

리베카 솔닛에 따르면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편견’과는 달리 실제 재난 상황에서 진실하고 질서정연하게 타인들을 돕는 이타적인 행동을 합니다.

그런데 대체 왜 역사적으로 재난 상황에 맞닥뜨린 군중들에 대해서 ‘이기적이고 비이성적인 폭도’ ‘아비규환’ 같은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덧씌워져온 것일까요?

이에 대해 두 가지 갈래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우선 지배 계층의 두려움 때문입니다. 리베카 솔닛은 이에 대해 ‘엘리트 패닉’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요. 역사적으로 많은 재난들이 혁명, 사회적 혼란, 변화의 동기가 되어왔기 때문에 엘리트들에게 있어선 재난 상황은 ‘민심 컨트롤이 불가능해지는’ ‘체제가 뒤집어질 수 있는’ 위기 상황으로 여겨졌습니다. 실제로 부시 정부의 카트리나 등 거대한 재난이 정권 교체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경우들은 많습니다.(링크)

이 때문에 재난 상황에서 정작 당사자, 피해자들은 성실하고 침착하게 생존을 위해 연대하지만, 오히려 권력자들이 ‘혼란스러운 대중’이라는 편견을 덧씌워 자신의 권위를 지키고 대중을 통제, 처벌의 대상으로 놓는다는 것이죠.

<fig.4>당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19세기 프랑스 학자 귀스타브 르봉의 책 <군중심리>(왼쪽) 미국 커뮤니케이션 연구자 W.조셉 캠벨은 그의 저서 <Getting it wrong>에서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당시 언론인들이 초기 어림짐작으로 재난 지역에서 강간, 살인, 약탈 등이 자행되고 있다는 오보를 낸 것에 대해 신랄하게 지적했습니다.(링크)

19세기의 프랑스 학자 귀스타브 르봉은 <군중: 대중의 마음에 대한 연구>에서 그는 개인들이 모이면 자아를 잃어버리고 원시적 힘에 휩쓸린다고 주장했습니다. “자기 자신이 아니며 자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지 못하는 자동인형이 된다[...]군중 속에 있으면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야만인이 된다”

이런 ‘군중관’은 19세기 유럽 원주민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한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고 합니다.

‘패닉에 빠진 군중’이라는 과장된 이미지는 이후에도 수없이 반복되어 왔습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해 극심한 피해를 입었던 뉴올리언스의 사례인데요. 참사 초기 주민들이 패닉에 빠져 약탈, 살인 등을 자행하고 있다는 소식이 돌았는데, 이후 상당수는 근거 없는 루머, ‘조작’된 이미지임이 밝혀지기도 했죠.

언론과 정부가 뉴올리언스를 포위당한 도시처럼 묘사하는 걸 들었지만 직접 가서 목격한 광경은 크게 달랐다. 사람들은 절박한 궁핍에 시달리며 생존하기 위해 싸우고 있었고 “가난한 자들의 인내심”을 보여주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자 언론에 널리 퍼졌던 뉴올리언스의 무법 상태의 증거들은 허위로 드러났다. MSNBC 방송국은 뉴올리언스 경찰관이 ‘약탈’하고 있는 모습을 보도했다. 그런데 수개월 후, 이 경찰관은 상관의 지시에 따라 이재민에게 물자를 공급하고 있는 중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최근 군중 압착 연구자인 에드윈 갈레아 영국 그리니치대학 교수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태원 참사를 ‘우르르 몰림Stampede’이 아닌 ‘군중 압착Crowd Crush’이라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링크)

전자는 비이성적인 대중의 혼란과 아비규환이 마치 참사의 원인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Crowd Crush’는 대중의 행동과 별개로 일정 면적에 일정 이상의 인파가 몰릴 경우 필연적으로 생기는 재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는 충분히 사전에 예상 가능한 재해였다는 점에서 책임 소재는 정부 측에 있다는 것입니다.

<fig.5> '군중 압착Crowd crush'은 일정 면적에 일정 인원 이상이 몰릴 경우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재해입니다. 누가 밀거나 하지 않아도 단지 밀집되는 것 자체로도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이죠(왼쪽) "왜 놀러 가서"라고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일부 여론을 보도한 기사들 / 키스 스틸 교수 홈페이지, 인터넷 화면 갈무리

두번째로는, 일반인들이 재난을 두고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위해 ‘피해자에게 문제(책임)가 있다’는 식으로 몰아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피해자들이 굳이 그곳에 놀러갔기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는 식으로요.
재난 전문가 루시 존스는 <재난의 세계사>에서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사례에 대해 이와 같이 말합니다.1)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경우 정부가 주민들을 실망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그 실패는 허리케인이 상륙하기 훨씬 전에 만연해 있던 문제들에서 비롯했다[…]지나치게 많은 미국인이 흑인 동포들을 두고 재난에 희생된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스스로 선택했다고 간주했다. 의식적이든 아니든 이렇게 피해자를 탓하는 경향은 자연재해 앞에서 너무나 흔한 반응이어서 거의 불가피한 것처럼 느껴진다. 인간은 고통이 우리의 통제를 벗어난 힘에 의해 유발된다는 생각을 거부하고 안심하기 위해 피해자를 책망한다. 이 본성은 자선을 베풀려는 충동만큼이나 인간답고, 따라서 없어질 가능성은 별로 없다.

-루시 존스, <재난의 세계사>

‘자업자득’이란 논리를 세울 경우, 사람들은 손쉽게 자신은 재난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고, 재난의 세계관을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저자는 이런 행동이 역사적으로 유구하다고 말하고 있는데요. 하지만 대부분의 재난은 이유 없이,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며 시스템의 대비를 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내가 피해자가 될 수 있는 것이고요.

1)허리케인 카트리나 당시 많은 거주자들은 대피 대신 자신의 집에 남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대피가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집을 떠날 경우 타지에서의 숙박료나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들이 집을 떠나지 못했다고 해서,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4.애도의 수만가지 형태】

이상 재난의 피해 당사자들은 역사적으로 재난에서 굳세게 대처해왔으며, 오히려 패닉에 빠지거나 피해자들을 탓한 것은 권력자, 외부인들이라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한편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사람들이 재난 상황을 버텨내고 이겨내는 과정에서 굉장히 인상 깊었던 부분이 또 있었습니다. 재난의 한가운데, 그리고 재난 후 재건 및 트라우마 회복 과정에서 당사자와 주변인들이 최소한의 삶의 여유를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온갖 위험을 감수하고 처한 사람들을 도왔다”[…]”아기들을 안고 있는 엄마와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졸졸 따라다니는 어린 꼬마들을 볼 때는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그들의 정신력은 정말이지 놀라웠다. 활활 불타오르는 폐허 속에서도, 어디를 가건, 누구에게 이야기하건 누군가는 꼭 농담거리를 발견했다“

-리베카 솔닛, <이 폐허를 응시하라>

이는 재난이나 희생을 가볍게 얕잡아보려고 한다거나, 그 슬픔을 사소한 것으로 비하, 희석시키려는 행동이 결코 아닙니다.

재난이 발생해도 삶은 지속되어야 합니다. 이 때문에 역사적으로 많은 재난과 어려운 상황에서 당사자들은 애도, 살아감, 버텨냄의 방식으로 축제, 유머 등을 활용해왔습니다.

한 예로 남수단의 소년병 출신 젊은 코미디언 Kuech Deng Atem은 수년간 내전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극심한 불안과 트라우마를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남수단 사람들에게 웃음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링크) 그는 사람들이 상처를 다독이고, 삶을 건강하게 영위하고 서로 연결되기 위한 방법으로 웃음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강조합니다.

<fig.6> 소년병 출신의 남수단 코미디언 Kuech Deng Atem(왼쪽) 다큐멘터리 <마지막 웃음>에서 홀로코스트 생존자 두명이 베네치아에서 곤돌라를 타고 있는 모습.

‘홀로코스트 유머’를 소재로 한 페르네 펄슈타인 감독의 논쟁적인 다큐멘터리 <마지막 웃음>(The Last Laugh,2016·링크)에서 우리는 심지어 나치 수용소에서도 수용자들 간에 유머가 통용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요. 제목인 ‘마지막 웃음’의 뜻은, 결국 우리가 재난을 ‘통과’하고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살아남아 마지막으로 웃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2)

역사적으로 사람들은 세계대전, 공습 상황에서도 상처를 가다듬고 미래를 향한 에너지를 잃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습니다. 어떤 고통 속에서도 삶은 반드시 유지되어야 하니까요.

”이 씁쓸한 유머는 어느 상점 주인이 (폭격으로 인해 다 허물어져가는) 상점 앞에 걸어놓은 부서진 간판으로 설명할 수 있다 ‘평소보다 더욱 열려 있음’[...]영국은 마치 기차의 연착을 참아내듯 이 독일의 공습을 견뎌냈다.“-뤼트허르 브레흐만, <휴먼카인드>

이태원 참사 이후 국가는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했습니다. 각 지자체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했던 놀이 프로그램을 취소했고, 각종 행사 공연 등도 잇따라 취소됐습니다.

만약 재난을 버텨내고 애도하기 위해 모든 ‘삶’을 멈춰야 한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역사에서 수많은 다른 예들에 맞닥뜨리게 될 것입니다.

애도에는 수만가지 형태가 존재하고, 어느 누구도 애도의 형태를 정할 권리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이런 일이 두번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한 철저한 ‘추궁’도 ‘추모(애도)’의 일환인 것입니다.(링크)

✏️

많은 사람이 지진과 화재를 피해 잠옷이나 다름없는 차림으로 집에서 뛰쳐나온 상황에서 모자에 관한 패션 제안이나 '소매가 겨울보다 짧아졌다'는 뉴스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알기 힘들었다. 하루 뒤 <뷸러틴>은 패션 제안을 수정했다. ”4월 18일에 막을 내린 옛시절에 20달러 이상 나가던 평범한 와이셔츠식 블라우스를 입던 멋쟁이 젊은 여성들은 배급소에서 공짜로 나눠준 푸른색 군복 셔츠도 주름을 잡아 몸에 맞게 품을 줄인 뒤 잘 정리해서 입으면 제법 따뜻하고 봐줄 만한 블라우스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리베카 솔닛, <이 폐허를 응시하라>

<London can take it>(1940·링크)

2)해당 다큐멘터리는 과거 레터(선 넘는 코미디? 웃음과 표현의 자유·2021.9.29) 회차에서도 소개한 바 있습니다. 관련해서 조금 더 자세한 내용을 읽어보고 싶으시다면 지난레터(💌링크)를 참고해주세요.

【5.맺음말】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리베카 솔닛이 핼러윈에 대해 짧게 언급한 부분이 있었는데요. 전체 책의 내용에서 크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지만, 이번 이태원 참사 때문에 책을 펴든 만큼 ‘핼러윈’에 대한 대목이 계속 눈에 밟혔습니다.

“재난과 혁명의 관점에서 다시 보면, 카니발은 평상시의 달력을 멈추게 할 뿐아니라[…]일상에 구멍을 뚫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유럽의 개신교 종교 개혁은 많은 축제와 행사를 없애버림으로써 노동 시간을 늘렸을 뿐 아니라 일상적인 시간과 축제로 말미암은 중단이 갖는 상호작용을 끊어 놓았다[…]요점은 서로의 공적 결합이다”-리베카 솔닛, <이 폐허를 응시하라>

요는, 핼러윈을 비롯한 카니발 축제는 역사적으로 ‘안전한 일탈’을 통해 일상에 구멍을 뚫는 역할을 해왔다는 것입니다. 핼러윈은 노동, 효율성, 개인주의 문화에 대한 일탈의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남녀노소 모두 어울리며 하루쯤 긴장을 풀고 처음 보는 타인들과 즐겁게 어울리는 것이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10월 29일 이태원에 모인 사람들은 '안전한 일탈'인 핼러윈에서조차 안전함을 보장받지 못했습니다.

3년만의 제대로 된 핼러윈 축제이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릴 것은 충분히 예상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례적으로 정부는 올해 핼러윈을 앞두고 안전 대책을 세우지 않았습니다.(링크)

한편 용산구청은 한 방송사의 요청으로 핼러윈 당일 군중들의 '무질서' 관련 기획 방송을 돕기로 했습니다.(영상) 사고 당일 인근에는 ‘마약 적발’을 위한 사복경찰들 수십명이 있었을 뿐 정작 위험을 예방하기 위한 인력은 거의 없었습니다(링크).

정부는 그날 축제를 즐기기 위해 모인 시민들을 계도하고 처벌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았을 뿐 안전하게 지켜야 할 대상으로 보진 않았던 걸까요?

레터의 마지막은 최근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 큰 호응을 얻고 있는 상담일지(링크) 일부 내용을 인용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이 시간을 지나는 우리 모두 용감하게, 참사의 시간을 견디며 각자의 애도를 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

7살짜리 조카가 있거든요
이모가 핼러윈에 환장하고 놀러 다니는 거 알고 있어요
유치원에서 핼러윈 취소가 됐나 봐요
왜 이번엔 안 하냐고 물으면 뭐라고 해야 할까
오래 생각해봤어요
사람 많은 데는 위험하니까 가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나중에 커서 이태원도 가는 게 아니야
라고 가르칠 수는 없잖아요,
단편적으로 그렇게 가르치면 이태원은 나쁜 것,
핼러윈은 나쁜 것, 파티는 나쁜 것, 모든 유흥은 나쁜 것이 되는 거 아닐까요
그런데 이게 어떻게 나쁘죠?
엄마 아빠랑도 같이 놀고 다른 어른들이랑도 놀고
자기 친구들이랑도 노는 축제인데요.
사회의 역할이 뭔지, 국가의 역할은 무엇인지, 시민의 역할은 무엇인지,
우리는 왜 혐오사회로 가는지 그렇게 만드는 사람들의 심리는 무엇일까
본질을 파악하고 맥락을 짚어주는 어른이어야 되는 거 아닐까요
[...]
정말 생각할수록 핼러윈은 잘못이 없어요
이태원도 잘못이 없구요.
그런데 너무 많은 상점이 문을 닫았어요
곧 또 국화꽃 놓으러 이태원에 갈 거예요
가서 더 당당히 이태원에서 밥도 먹고 올 거고
내년에도 핼러윈 분장 끝장나게 하고 이태원에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들은 잘못이 없으니까요.

✏️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헌법 제34조 제6항

※레터를 쓰며 읽은 책, 이 주제에 관심이 있으신 독자들이 추가로 읽을만한 서적 등을 추천합니다.

리베카 솔닛, 정해영 옮김, 『이 폐허를 응시하라』, 펜타그램, 2012.

-다수의 재난 상황 속 군중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면밀하게 살피고 있는 책입니다. 이 책의 영어 원제는 '지옥에 세워진 파라다이스A Paradise Built in Hell: The Extraordinary Communities That Arise in Disaster'인데요. 영어 제목 쪽이 직관적으로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재난이 비록 '지옥'같지만, 재난 상황에서 사람들은 평소의 이기적인 심성을 버리고 '재난 유토피아'를 이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하면 재난 상황에서의 이타성, 헌신을 '평소'에도 끌어올 수 있을지가 이 책의 핵심 문제 의식입니다.(책 내용은 전반적으로 '재난 상황에서 발휘되는 이타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루시 존스, 권예리 옮김, 『재난의 세계사』, 눌와, 2020.

-지진, 재난 전문가 루시 존스가 역사적인 지진, 재난의 사례들을 살펴보고 있는 책입니다. 리베카 솔닛이 재난을 바라보는 시선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데요. 존스는 재난이 때로 사람들의 선한 본성을 이끌어내지만, 기본적으로 재난이 '약한 고리'를 끊어 사회의 문제를 터트리는 부분이 있다는 쪽을 짚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비한 안전 시스템이라든지, 혐오, 차별 등의 문젭니다.(cf.관동대지진에서의 조선인 학살...) 책의 핵심 메시지를 잘 전달하는 대목을 발췌해봅니다.

"자연재해는 인간이 만든 체계를 교란한다. 인간이 만든 체계는 물리적으로(하수도 전력망 도로 다리 댐 제방) 그리고 사회적으로(가족 친구 교회 사원 의회 입법) 기능한다. 이 모든 체계에는 약점이 있고, 극단적인 자연재해는 이런 약점에 압력을 가한다. 가장 약한 곳에서 문제가 생기는 법이다. 미시시피강에서 제방은 홍수를 막는 데 실패했다. 그런데 더 의미심장한 것은 미국 사회가 실패했다는 점이다. 미시시피강 홍수는 외부자로 인식되는 사람, 특히 흑인을 깔보고 비인간적으로 대하고 희생양으로 삼는 경향이 있는 미국 사회질서의 근본적인 약점을 드러냈다(p.178)"

뤼트허르 브레흐만, 조현욱 옮김, 『휴먼카인드』, 인플루엔셜, 2021.

-리베카 솔닛와 비슷하게 인간의 선한 본성에 주목하고 있는 책입니다. 인간의 이기적이고 경쟁적인 본성을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실험이나 유명한 에피소드들(cf.밀그램 실험, 이스터섬 이야기 등)의 뒷이야기를 신랄하고 철저하게 조목조목 파헤쳐 반박하고 있는 부분이 흥미롭습니다. 오늘 레터에선 서문에 소개된 사례를 짧게 인용했습니다.

“선한 사람들을 악한 곳에 가두고 텔레비전에서 방송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사실 그다지 많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p.227)”

【글 속 한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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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궁 말고 추모만? 이상한 ‘관제 애도’

독서시간: 약 16분 / 글자수: 약 5000자

🖍글 속 한 문장

애도의 탈정치화 시도는 ‘관제 애도’라는 비판으로 이어졌다. 애도는 ‘왜 참사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는지, 누구의 책임인지’를 묻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다. 진공 상태의 ‘순수한 애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지난달 31일 “지금은 추궁의 시간이 아닌 추모의 시간”이라고 말했습니다. 강남순 교수는 말합니다. “이태원 참사를 ‘정치적’으로 해석하지 말고, 지금은 오로지 ‘애도만 하라’는 지시를 내리면서, 애도의 방식을 규정하는 이 ‘국가애도기간 설정’이야말로 지극히 노골적인 ‘애도의 정치화’의 전형이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애도할 것이다

독서시간: 약 5분 / 글자수: 약 1500자

🖍글 속 한 문장

“국가애도기간이 뭔가요? 그 기간 동안에는 출근하지 않는 건가요? 시민들에게 금지되는 행동이 있나요?” 비단 ‘국가애도기간’이 아니더라도 국민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애도했을 것이다[...]슬픔과 분노와 무기력 상태를 오가며 어떻게든 일상을 지키려 할 것이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오은 시인의 이태원 참사 관련 글입니다. 국민 각자는 각자의 방법으로 애도를 합니다. 그는 '애통과 참담 사이에서 지치지 않고 책임을 따지는 것'이 자신의 애도 방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태원에 또 가야지, 내년에도 가야지

시리즈

🖍글 속 한 문장

나 : 오늘은 예능을 보고 싶었어요. 오늘 집에 돌아와서는 저녁에 무한도전을 봐야지. 지난 며칠간은 뉴스에 집착할 정도로 그것만 봐왔거든요. 그런데 그걸 봐도 될까요?
선생님 : 네 물론이죠 정말 보셔도 되어요
나 :선생님, 제가 정말 그걸 보고 깔깔 거리고 웃고, 떠들어도 될까요?

👤김스피의 블라블라

오늘 레터 맺음말서 일부 인용한 이태원 참사 생존자의 기록입니다. 해당 글은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뒤 수천개의 댓글이 달리는 등 큰 호응을 얻고 다수의 언론에 소개가 되어 널리 공유되고 있습니다. '함께' '참사를 이겨낸다'는 것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게 하는 글입니다. 전체 글 목록(링크)

이태원에서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이들

영문 기사

🖍글 속 한 문장

신애진씨(24)는 맥킨지 서울사무소로 직장을 옮긴 지 한 달 만에 직장 동료들과 함께 이태원에 놀러 갔다. 아버지 신정섭씨는 토요일 낮 마지막으로 딸과 커피를 마셨고, 딸은 집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노르웨이에서 온 Stine Roalkvam Evensen은 번지 점프를 하고 진흙 장애물 코스를 질주한 후 가파른 산을 오르는 여행자이자 모험가였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워싱턴포스트가 스티븐 블레시 등 이태원 참사 희생자 9명의 삶과 당일 정황 등을 모아 쓴 부고 기사입니다. 다양한 국적의, 다양한 개성을 지닌 이들이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20대라는 점, 그리고 그날 역시 이들은 지금까지처럼 '삶'을 살았을 뿐이라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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