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8시. 도서관 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제가 자주 가는 도서관 옆에는 인조 잔디가 깔린 운동장이 있습니다. 조기축구회 회원들이 축구를 하기도 하고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기도 합니다. 흰 선이 그어진 트랙이 제법 그럴듯합니다.
평소 같으면 도서관이 문을 여는 9시까지 차 안에 앉아 책을 읽겠지만, 오늘은 운동장 트랙을 따라 걸었습니다. 바람이 제법 시원하더군요. 여름이 한창이다 싶었는데, 어느새 가을이 오고 있습니다. 가을이 오는 것을 느끼는 일은 언제나 기분이 좋습니다. 짧은 가을이라 더욱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올가을에는 어디로 여행을 가볼까? 그곳엔 어떤 맛있는 음식이 있을까? 다음주에는 새 가디건을 사야겠어. 이런 상상을 해보는 일은 즐겁습니다.
트랙을 따라 천천히 걸었습니다. 발바닥에 닿는 트랙의 감촉을 느끼며 깊게 심호흡을 했습니다. 다섯 바퀴를 돌았는지, 여섯 바퀴를 돌았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습니다. 머릿속에는 곧 나와야 할 새 에세이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거든요. 걷다 보니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습니다. 트랙에서 나와 트랙 옆 계단으로 올라갔습니다. 계단 꼭대기까지 올라가자 하얀 선이 선명하게 그어진 트랙이 훤히 내려다보였습니다.
나는 지금 어느 레인에서 달리고 있을까? 3번 레인일까, 7번 레인일까. 몇 바퀴나 남았을까? 아무튼 같은 코스를 빙빙빙 맴돌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저는 작가가 된 후 지금까지 같은 트랙을 열심히 달리고 있습니다. 아마 삼십 년은 된 것 같네요. 트랙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제가 써 온 글 대부분이 다른 누군가를 위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 온 인생의 반을 여행을 하며 보냈습니다.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해 글을 썼고, 누군가에게 동경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사진을 찍었죠. 제게 청탁한 편집자의 입맛에 맞는 글을 써왔습니다.
나를 위해 쓴 글이 있을까. 나만의 만족을 위해 쓴 글이 있을까. 어쩌면 이 말은 어폐가 있을 수도 있겠네요. 발표하는 모든 글은 결국 누군가를 위해 씌어지는 것일 테니까요. 아냐, 글을 나를 내보이는 것이니 결국 나를 위해 써야 하는 것 아닐까? 아, 아무튼 어려운 문제입니다.
어젯밤에는 20대 후반의 어느 작가의 글을 읽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섬세하고 예민한 촉수를 가졌을까. 어쩌면 이토록 따뜻하고 다정한 마음을 가졌을까. 그의 글을 읽는 내내 그를 너무 부러워하다가, 그의 글이 좋은 이유를 알게 됐습니다. 글에는 그의 생활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더군요. 그는 매일매일의 아침 식사 같은 ‘별것 아닌' 것들을 잘 챙기고, 사소한 배려에 감사하고, 좋은 습관을 가지고, 주변을 잘 정리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깊게 심호흡을 한 후 다시 트랙으로 내려왔습니다. 5번 레인을 따라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어떤 인생을 살아왔을까. 나는 어떤 인생인가…….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아직은 제가 돌아야 할 트랙이 많이 남았다는 것이고,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며 깨달은 건 좋은 글을 쓴다고 좋은 인생이 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걸으며 생각했습니다. 매일 아침 걷고 책을 읽자, 저녁에는 밥을 일찍 먹고 산책을 하자, 정리 정돈을 잘하자. 조금 더 다정한 마음을 가지자. 좋은 글은 일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좋은 생활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삶은 사소한 일들이 모여 만든다고 믿습니다.
어느새 8시 55분입니다. 곧 도서관이 문을 열겠네요. 트랙을 빠져나옵니다. 아직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남아 있고, 생을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