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이 없었다면 『도시를 걷는 여자들』도 가능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특히 엘킨은 도시 보행자를 다룬 12장, 여성과 걷기의 긴장감 있는 관계를 다룬 14장 위에 발을 딛고 서서 작업하지 않았을까 짐작해봅니다. 걷기에 관해 단 한 권의 책을 읽어야 한다면 주저 없이 고를 책입니다. 엘킨의 책을 만들면서 이 책을 만들던 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습니다. 그때 저는 많이 걷게 되었고, 내 주변의 동네를 발로 읽는 경험을 알게 되었고, 심지어 당장 걸을 수 없는 곳들(이를테면 솔닛의 샌프란시스코)은 구글 스트리트뷰로 걸어 다녔습니다.

“세상을 두루 살피는 일은 마음을 두루 살피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세상을 두루 살피려면 걸어 다녀야 하듯, 마음을 두루 살피려면 걸어 다녀야 한다.”―리베카 솔닛, 『걷기의 인문학』

2020년 상반기 제가 가장 사랑한 작가입니다. 정말 새삼스럽지요? 익히 안다고 생각했던 버지니아 울프의 새로운 면모를 알려주고 다시금 사랑하게 해준 책이 바로 『도시를 걷는 여자들』입니다. 

“또한 길 위에서 내 다리를 움직이는 것 말고 아무 수고도 들이지 않고도 런던에서 끝없이 나를 매혹하고 자극하는 놀이나 이야기나 시를 얻는다.”―버지니아 울프, 『일기』, 1928년 5월 31일

버지니아의 이 일기로 시작하는 챕터는 도시를(그리고 “삶, 6월, 런던의 이 순간”을) 온몸으로 감각하고자 했던 작가로서 버지니아 울프를 소개해주었습니다. ‘도시를 걸었던 여자들’의 책을 딱 두 권 꼽자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 그리고 이 방면에서 솔닛과 엘킨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버지니아 울프의 『런던 거리 헤매기』가 될 겁니다. 정확히는 동명의 에세이요.(『도시를 걷는 여자들』에는 원제를 살려 ‘거리 배회(Street Haunting)’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연필 한 자루를 사러 나가 시작되는 보행자의 모험을 따라가는 이 짧은 글은, 지금 당장 문을 열고 나가서 걷고 싶은 충동을 이기기 어렵도록 만듭니다.

“맑은 나절 4시에서 6시 사이에 집을 나서면 우리는 친구들이 아는 우리의 자아를 떨치고 익명의 도보 여행자들로 이루어진 방대한 공화국 군대에 속하게 된다.”―버지니아 울프, 「런던 거리 헤매기」

반비에서 나온 솔닛 책을 두 권이나 소개하자니 조금 겸연쩍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실질적으로 저를 걷게 만든 책이 『걷기의 인문학』이라면, 관념적으로 제가 길을 떠나도록 한 책은 『길 잃기 안내서』였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서 솔닛은 적극적으로 길을 잃기를, 미지 속으로 기꺼이 몸을 내던지기를 권합니다. 두 발에 의지하여 세상을 읽는 행위인 걷기는, 우리가 삶 속에서 길을 잃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합니다. 

“길을 전혀 잃지 않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고, 길 잃는 방법을 모르는 것은 파국으로 이어지는 길이므로, 발견하는 삶은 둘 사이 미지의 땅 어딘가에 있다.”―리베카 솔닛, 『길 잃기 안내서』

공교롭게도 엘킨 역시 『도시를 걷는 여자들』의 말미, 고향 뉴욕으로 돌아가 낯선 기분을 느끼던 와중에 이 책을 읽는데요. “내 도시에서 길을 잃고 있었”던 상태의 그녀는 저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 책을 읽었던 것 같아요.

호텔은 도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는 공간입니다. 엘킨은 도쿄라는 낯선 도시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떨어져, 마치 아파트 같은 호텔, 호텔 같은 아파트에서 생활하게 된 경험을 들려줍니다. 그러면서 도시에서/여성에게 이 공간이 갖는 의미를 들여다봅니다.

“호텔은 외국인, 부적응자, 동화되지 못하는 자의 거처다.”―로런 엘킨, 『도시를 걷는 여자들』 

이 구절을 읽고 무척 사랑하는 또 한 권의 책이 떠올라서 같이 읽고 싶었습니다. 조애나 월시는 남편과 이혼 과정을 겪으면서 호텔 리뷰를 쓰는 일을 하게 되면서 집이 아닌 여러 호텔에 머무릅니다. 그 결과 탄생한 책, 『호텔』은 호텔에 대한, 집에 대한, 공간과 여성의 관계에 대한 아주 흥미로운 책입니다. 에세이와 픽션과 비평을 오가는 이 독특한 책을 한마디로 소개하기는 참 어려운 일이라, 몇 줄의 인용으로 대신하려 합니다.

“호텔에 사는 이들은 주로 여자였으며 대개는 남자 없는 여자였다. …… 호텔은 이러한 여자들이 시중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요 이들을 시중들 사람이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이들이 유일하게 공적으로 존재하는 장소가 곧 호텔이었다.”―조애나 월시, 『호텔』

책을 만들 때 편집자들은 ‘모델 도서’ 또는 ‘유사 도서’를 조사합니다.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라면 이 책도 즐겁게 읽을 것이다’라고 판단되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나와 있는 책들을 통해서, 어떻게 하면 지금 만드는 책을 필요로 하는 독자들에게 더 잘 닿을 수 있을지를 배우는 거죠. 한 권의 책을 쓰면서 저자가 수십 수백여 권의 책을 필요로 한다면, 편집자 역시 한 권의 책을 만드는 데에 다른 책들이 꼭 필요합니다. 『외로운 도시』는 『도시를 걷는 여자들』의 주요한 ‘모델 도서’ 중 하나였습니다. 올리비아 랭은 제가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만큼 좋아하는 저자인데요. 예술비평과 자전적 산문을 아름답고 탁월하게 엮어내는 글쓰기를 하는 작가입니다. 『외로운 도시』는 뉴욕이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고독’이라는 감정을 테마로, 에드워드 호퍼부터 데이비드 워나로위츠까지 예술가들의 생애와 작품을 경유해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도시를 걷는 여자들』과는 취하는 글쓰기 방식이 꼭 닮아 있기도 하고, 많은 독자들이 두 권 모두 흥미롭게 아껴 읽으리라 짐작되어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상처가 켜켜이 쌓인 이곳, 너무나 자주 지옥의 모습을 보이는 물리적이고 일시적인 천국을 함께 살아간다. 중요한 것은 다정함을 잃지 않는 것, 서로 연대하는 것, 깨어 있고 열려 있는 것이다.”―올리비아 랭, 『외로운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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