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로 돌아갈수록 꿈이 많았음을 깨닫는다. 그 때 가졌던 꿈은 비단 직업만이 아니었다. 팬더를 키우고, 텃밭을 가꾸고, 영화 같은 사랑에 빠지고 싶다는 꿈도 있었다. 말도 안되게 풍성했던 꿈들은 희미해져가고, 세상 물정을 맛볼수록 꿈은 곧 단조로운 직업 하나로 정의되었다. 하지만 하나로 정의된 그 꿈만큼은 진심이었다. 옷 고를 때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서점에 가면 문제집이 아닌 잡지를 고르던 아이는 잡지사에 들어가 에디터가 되기로 했다.

여전히 패션은 내가 즐길 수 있는 카테고리 중 가장 애정이 큰 분야이지만, 교복을 입던 학창 시절에는 패션이 마치 내 사명과 같이 느껴졌다. 6년간 의상학과 진학에 적합한 생기부를 만들었고, 대학에 들어가서도 패션 사진을 찍는 동아리에 들어갔다. 일하시는 선배들에게 용기 내어 연락하며 알음알음 현장에 대해 엿듣고, 일할 기회가 생기면 달려갔다. 그런데 높디높았던 꿈에 가까워지자 현실의 벽의 높이와 두께를 체감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같은 로망만 가지고 에디터를 꿈꿨던 것은 아니었지만, 빠른 경제적 독립을 원했던 것에 비해 에디터의 처우는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게다가 사람들은 더 이상 종이 잡지를 보지 않았고, 거기에는 나도 포함이었기에.

잠깐의 방황 후에 어찌 되었든 나는 꿈이 없이 살아가는 걸 견딜 수가 없어 휴학을 선택했다. 대쪽같이 에디터만을 고집했던 7년을 뒤로하고, 다른 길을 찾아 나섰다. 그래도 나는 옷이 제일 좋았기에, 좋은 옷을 직접 만들어보기도 하고, 예쁜 옷을 카메라로 찍어보기도 하고, 유행인 옷을 팔아보기도 했다. 잡지사에 들어가지 않아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자리는 생각보다 많았다. 또 다른 꿈이 생긴 뒤에야 나는 지난 꿈에게 미련 없이 안녕을 고할 수 있었다. 그제야 다른 분야에도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20살 때 사놓고 잠들었던 카메라를 깨우고, 어린 나이에 따라오는 기본 옵션 수준의 체력으로 방치해둔 몸을 챙기고, 음악이나 영상, 그래픽 등 소비하는 데 그쳤던 분야를 취미 삼아 조금씩 배웠다.

그렇게 꿈을 찾아 표류하던 내가 새로운 방향을 정할 때쯤, 나와 비슷하게 사부작사부작 뭔가를 열심히 하던 너도 뜬금없이 스타트업에 들어가 일을 시작했다. 그것도 패션과 관련된. 사업이라고는 1도 모르는 내가 각종 서류로 머리를 싸매고 있으면, 패션이라고는 1도 모르는 네가 잡지를 읽으며 머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어느새 나보다 컬렉션을 더 챙겨 보고, 내가 모르는 브랜드를 알고 있는 너를 보며 내가 왜 뿌듯함을 느꼈는지. 어쩌다 내가 묵혀놨던 패션에 대한 사소한 생각이나 정보를 나누다가, 그게 너에게 도움이 될 때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엇갈린 운명… 이라기보다는 대리만족감 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흘러 또 다시 약간의 경로 이탈을 하고 있던 시점에, 우리는 각자가 하고 싶은 것에 대해 떠들다가 함께 새로운 목표를 만들었다.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할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며, 우리는 또 다른 지점으로 항해한다.

아란이는 꼭 승무원이 돼서 하늘과 바다를 건너라고. 또랑또랑 영어를 뱉어내던 열두 살의 나를 보며 선하고 맑게 웃음 짓던 엄마의 옆얼굴이 기억난다. 초등학교 또래 친구들의 꿈이 수십 번 희미해지고 다시 바뀌는 시기에, 나는 반대로 온 마음을 다해 승무원만을 꿈꿨다. 그러나 그 짝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마우스 커서가 껌뻑거리는 빈 문서, 달리 말해 ‘입시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면서. 성적, 동아리, 교외활동 등 내가 가진 패를 견주어 서사의 당위를 부여하는 과정. 기승전결 짝을 맞추는 그 과정 속에서, 승무원이라는 꿈은 차갑게 제외되었다. 키가 더 이상 자라지 않는 까닭도 있었고.

대학생이 된 나는 무엇보다 빨리 돈을 벌고 싶었다. 전공인 호텔경영을 넘어서 금융, 투자 등 속히 ‘돈 많이 벌린다’는 직무에 관해 공부했다. 끙끙 거리고 골치를 앓으며 자격증을 따내는 방식으로. 지식은 쌓여갔으나 ‘내가 정말 무슨 직무를 하고 싶은지’에 관해서는 쥐게 된 답변보다 늘어난 의심이 많았다.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으려고 애쓰는 나를, 룸메이트인 너는 당시에 어떤 마음으로 지켜봤을지. 본질적인 질문도 가끔, 아니 꽤 자주 해줬으니까. 아란이는 금융 쪽으로 가고 싶은 거야?

네가 외출한 어느 날, 나는 텅 빈 종이를 끌어안고 무작정 집을 나섰다. 학교 근처 벤치에 앉아 하얗게 빈 종이를 꾸깃꾸깃 접기만 하는데, 그 종이 모퉁이에서 낡은 기억 하나를 발견했다. 어릴 적 그림대회에 출전한 기억이었다. 미래도시 그리기 대회 날, 모두가 도화지에 높은 빌딩과 바다에 잠긴 도시를 그릴 때, 나는 하늘을 떠다니는 휠체어에 탄 우리 할머니를 담았다. 상상, 창조, 영감, 새로움, 그리고 확장. 그릇을 깨부수는 말들. 내 꿈과 가장 가까이 숨 쉬는 그 이름들을 그렇게 오랜만에 마주했다.

상상과 창조. 
내 꿈이라는 것을 한 줄로 요약하기는 어렵지만, 어떻게든 요리조리 뭉쳐 누구에게 보일 만한 형태가 바로 이 이름들이 아닌가 싶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꿈은 미술대회와 글쓰기 대회가 열릴 때마다 설렘으로 흥건해지던 손가락 사이사이에 있었다. 스티브 잡스가 옳았다. 그는 늘 오래된 과거에 찍힌 점들이 어떻게든 미래의 선으로 길게 이어진다고 말해왔으니까. 그러니 만일 내가 어릴 적 그 때로 돌아간다면,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지금 네가 느끼는 심상을, 네 안에 펼쳐지는 상상을 잘 봐두라고. 눈을 부릅뜨고 조금 더 길게 보라고. 미풍처럼 어딘가로 멀리 날아가는 듯하다가, 결국 제자리로 돌아올 이들이니까.

지금의 나는. 패션 에디터 및 기획자로서 오랫동안 일한 스타트업에서 퇴사하고, 룸메이트인 너와 함께 하고 싶었던 일을 하나씩 도전하고 있다. 20년, 40년 뒤에는 또 어떤 일을 보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언젠가 또 나를 잊어버리고 빙빙 돌아간다 하더라도. 금지된 곳으로 들어가거나 길을 잃어도, 걸어온 발자취를 더듬으며 다시금 내가 누군지, 내 꿈이 무엇이었는지 골똘히 바라볼 수 있겠다. 삶이 가진 밋밋한 몸짓을 가늘게 닦아주면서, 그리고 가끔은 색다른 경험 속에서 또 새로운 화음으로 살랑이면서 말이다.

아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