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호, 『마침내, 교회가 희망이다』사전 연재 독자님, 안녕하세요.
복 있는 사람 마케터 B입니다.
네덜란드에서 97일 동안 24시간 내내 쉼 없이 예배를 드린 교회가 있습니다. 망명 신청이 기각되어 추방 선고를 받은 한 가족의 보호를 결정하고 시작한 예배였지요. 네덜란드에는 경찰이 종교적 의식이 행해질 때는 법 집행이 어렵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이 예배는 난민법 개정을 이뤄냈고, 가족들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교회는 분명히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위험한 일’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이 예배에 연대하는 동료 시민들로 교회는 매일 북새통을 이루고, ‘나그네를 환대한다’라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고백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복음의 ‘위험성’에 오히려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그야말로 교회가 세상을 바꾼 것이었으니까요.
오늘 <월요일의 복음>에서 박영호 목사는 ‘우리의 신학/신앙은 충분히 위험한가?’라고 묻습니다. 복음은 우리 세계의 질서와 체계에 무조건 순응하는 것은 아니기에 누군가에게는 ‘위험한’ 종교로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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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는 위협적인 존재로 출발했습니다. 강고한 중세라는 성채에 균열을 일으켰습니다. 초대 교회의 출발은 어떠했습니까? 위험했습니다. 그런데 그 위험한 복음을 우리는 제대로 간직하고, 전하고, 살아 내고 있습니까? 사람이 거듭나면 위험해집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삶의 근본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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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 폴 틸리히의 『흔들리는 터전』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설교라 할 만합니다. 여기서 틸리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존재 기반을 흔들어 놓는다고 말합니다. 성경을 읽는 것, 예수를 만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사도들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나섰고, 삭개오는 지금까지 취한 것을 몇 배로 배상해야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분을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배우고 가르치는 신학은 충분히 위험한가요? 어쩌면 이 시대에 적응해야 한다, 또는 적합성을 가져야 한다는 이유로 우리 신학의 많은 에너지를 그 위험성을 깎아 내는 데, 날카로운 모서리를 둥그스름하게 만드는 데 쓰고 있지 않습니까? 신학의 많은 이론이, 성서학의 많은 비평이, 그 이론적 배경이 얼마나 복잡하고 그 시대와 우리 시대가 얼마나 다른지를 지적하며 말씀대로 살지 않아도 되는 핑계를 만들어 내는 데 쓰이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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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은 소망과 소망의 전쟁터입니다. 빌립보에서 옥타비아누스와 부루투스가 전투할 때 어떤 소망을 갖고 임했을까요? 전쟁에서 승리한 후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병사들을 퇴역시켜 빌립보의 땅을 분할해 주었습니다. 여러분, 회사에서 어떤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성공하면 신도시 아파트를 한 채씩 준다고 해봅시다. 그 소망의 힘이 얼마나 대단할까요? 대통령 선거 때도 보십시오. “제가 대통령이 되면 이러이러한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다른 쪽에서 소망과 소망이 전쟁하는 것입니다. 기업들 사이의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테크노피아’의 약속도, 기업 마케팅에 쏟아붓는 막대한 돈 역시 소망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싸움입니다. 우리는 소망들의 전쟁터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심어 주기 원하시는 소망이 강한가, 아니면 이 세상의 물질주의 문화가 약속하는 소망이 강한가?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그 선택에 따라 우리의 인생 방향이 정해집니다. 바울이 살던 로마 시대에 그러했고, 오늘 우리의 삶은 훨씬 더 치열한 전쟁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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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라이프 스타일과 로마의 라이프 스타일이 정면으로 부딪히는 장면이 사도행전 16장에 나옵니다. 바울은 빌립보에 도착했을 때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이 그를 계속 쫓아다니면서 괴롭히고 귀찮게 해도 며칠을 기다렸습니다. 이 긴장 상태가 만만치 않았다는 말이지요. 바울은 왜 곧바로 귀신 축출을 행하지 않고 며칠을 견뎠을까요? 바울의 이러한 태도에는, 로마인들을 향해 자신이 로마를 대적하거나 로마의 질서를 의도적으로 흔들려는 위험한 사람이 아니라고 호소하는 변증적 목적이 있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로마를 대적하지 않는다.” 즉, 변증 중에서도 정치적 변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황제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거나 로마의 질서를 위태롭게 하려는 사람이 아님을 보이면서 기독교를 변호하려는 의도가 사도행전 전체의 중요한 신학적 노선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과연 그럴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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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이 변증이라면, 누구 보라고 이런 변증을 했을까요? 당시 로마 황제나 황제의 비서들, 관리들이 사도행전을 펴서 읽고는 “아, 괜찮은 사람들이구나. 잘 봐줘야겠다”라고 했을까요? 저는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사도행전을 읽어 봤을 가능성도 별로 없고, 그렇게 썼다고 해서 속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변증이라면 내부를 향한 변증입니다. 내부를 향한 정치적 변증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의 정치적 태도 형성을 위한 하나의 지침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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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바울이 로마의 가부장적 경제 질서에 의도적으로 도전하는 위험한 사람이 아니라는 주장은 분명히 이 안에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바울이 그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창조 질서가 회복된 감사한 일이지요. 이것이 감사한 일인데 로마인들이 기뻐하지 못할 뿐 아니라 로마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다면, 그들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요? 사도행전이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로마의 삶의 양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 교인들은 불의한 정권을 타도하겠다거나 힘을 가지고 악을 박멸하겠다고 나서지는 않았습니다. 2015년에 제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나눕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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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무언가를 반대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지 마십시오. 반공이든, 반이슬람이든, 반동성애든, 무언가를 반대하고 미워하는 것이 여러분의 정체성을 규명해 준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반독재이든, 타락한 제도 교회에 대한 반대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싸울 때는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무언가를 미워하고 무너뜨리고 싶은 그 마음이 내가 누구인가를 규명하게 하지 마십시오.
다만 무엇을 사랑하는가에 의해 규정되는 사람이 되십시오. 이루고 싶은 사회, 세우고 싶은 공동체의 모습에 가슴 뛰는 삶을 사십시오.
초대 교회의 메시지가 반로마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반제국 이념이 초대 교인들의 정체성을 규명했던 것은 아닙니다. 시저가 퀴리오스라 불리던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퀴리오스라 부르기 위해, 그리스도만이 퀴리오스라 고백하기 위해 그들이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황제를 반대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 신실하기 위해 황제에게 고개 숙이거나 그 불의한 체제에 영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헌신했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내 주위에 있는 한 사람을 그리스도처럼 사랑하는 일, 그러한 사랑의 공동체를 세우는 일, 그 사랑을 이 땅에 전하는 일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반로마는 그들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랬다면, 그들은 3백 년이라는 긴 기간을 소외와 박해 가운데 견디지 못했을 것입니다. 40년도 못 되는 일제 강점기가 한국의 지식인들에게는 무한히 길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 기간이 30여 년쯤 되었을 때 많은 우국지사들이 친일파로 전향했습니다. 어두운 터널 안에 30년쯤 있으면 그 어둠이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3백 년을 견디게 했던 그 힘이 어디서 나왔나 생각해 보십시오. 잘못된 사회에 대한 냉철한 비판 의식도 그만한 힘은 없습니다. 굳은 의지도, 명징한 이성도 물러지고 흐려질 것입니다.
오직 사랑입니다. 결국 사랑만이 남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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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긴 시간을 견디게 해준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초대 교회는 기존 사회 체제에 일부러 도전하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다 보면, 이 체제가 도전받고 흔들리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도행전은 기독교가 위험한 종교라는 사실을 굳이 숨기지 않았고 로마인들도 유대인들도 이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고 바울과 베드로도 순교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위험한 종교였습니다. 다니엘 같은 사람을 사자 굴에 던져 넣어 죽인다면 국가가 잘못된 것이고, 그 국가를 주도하는 사법 엘리트들이 잘못된 것 아닙니까? 그 말을 다니엘서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짐승이고 결국 심판받을 악의 세력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서 참여하는 신학만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 소망과 저 소망이 대결하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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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사람들은 어떤 소망을 갖고 살아갑니까? 장 보드리야르라는 포스트모던 철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쇼핑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I shop, therefore I am).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로 인간 의식의 명료성에 기초한 모더니즘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그 모더니즘의 경직된 사고가 폭력적이라고 해서 자유롭게 사고하도록 놔두자고 한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지요. 그런데 보드리야르의 질문은 “그래서 우리가 자유로워졌는가?”입니다. 포스트모던의 인간은 소비주의의 노예가 되어 버리지 않았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의사입니다, 나는 농부입니다, 나는 교사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생산적 자아입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 여러분이 앞으로 목회해야 할 사람들은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을 때 “나는 일 년에 해외여행을 몇 번 가는 사람이고, 주말에는 이 정도 식당에 가서 사진 찍고 SNS에 올리는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소비로 자기를 말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내가 어떤 꿈을 갖고 사는 사람인지, 무엇에 눈물 흘리는 사람인지, 무엇에 가슴 뛰는 사람인지, 심지어 무엇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인지도 중요하지 않고, 오직 소비의 능력, 소비의 패턴, 소비의 품위가 중요합니다. 인간이 자유롭게 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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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다르게 살기 때문에 세상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렇게 로마 제국이 기독교화된 것입니다. 소망은 혼자 갖는 것이지만, 관계 속에서 누군가 “소망을 가지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약속’이 됩니다. 따라서 소망의 전쟁터인 세상은 약속의 전쟁터이기도 합니다. 나에게 줄 서면, 무슨 자격증을 따면, 어디에 아파트를 사면 이러이러한 미래가 보장될 것이라는 소망을 갖게 합니다. 다른 한쪽에는 예수에게서 소망을 발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소망을 가지라”가 아니라 “이런 소망이 있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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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아홉 번째 <월요일의 복음>은 박영호, 『마침내, 교회가 희망이다』(24년 1월 출간 예정)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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