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사를 나와 지금은 석굴암 앞이다. 석굴암은 1995년, 우리나라 문화재로는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불국사와 함께 지정됐다. 8세기 경덕왕 10년(751년), 그러니까 신라의 정토신앙이 가장 왕성하던 때다. 재상 김대성이 불국사와 함께 만들었다. 불국사는 현생의 부모를 위해 지은 것이고, 석굴암은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세웠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처음에는 석불사로 불렸다.
백색 화강암으로 인위적인 석굴을 만들어 석굴 사원으로 꾸몄는데, 전실에는 인왕상과 사천왕상 등을 새겼고, 주실에는 본존불과 협시보살 등을 모시고 새겼다. 크다고 할 수 없는 석굴 사원이지만 사찰이 갖추어야 할 구성요소인 사천왕문, 인왕문, 대웅전, 문수전 등을 모두 갖추고 있다. 본존불 옆으로는 십일면관음보살상이 화려하고 격조 있게 새겨져 있다. 그 앞을 지키는 금강역사상의 표정은 무섭다. 사천왕상의 표정은 고집스럽지만 어딘지 모르게 장난스럽고, 보살상은 한없이 우아하기만 하다.
이 모든 것들이 어울려 석굴암만의 장엄과 신비로움을 빚어낸다. 지금까지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수많은 유적, 예술품과 만났지만 석굴암에서는 오직 석굴암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감정 그리고 감동과 만날 수 있었다. 석굴암에 들어서서 본존불과 마주하는 순간, ‘아, 이런 문화재가 있다는 건 우리나라의 축복이다!’ 하고 느끼게 된다.
본존불은 ‘석가모니대각상’이다. 붓다께서 대정각(大正覺,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신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석가모니는 29세에 출가해 35세에 득도했다. 6년이라는 짧은 세월이었지만, 실제로는 무수한 전생에서부터 석가모니는 정진해 왔다.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석가모니의 출사표는 그 결기가 무서울 정도다. “내게는 믿음과 노력과 지혜가 있다. 어찌 삶의 ‘집착’을 말하는가. 몸과 피는 말라도 지혜와 하나 된 마음은 더욱 편안할 것이다. 굴욕적으로 사느니 싸우다 죽는 편이 오히려 낫다”라고 말하며 수행에 들어갔다.
석굴암의 석가모니는 각고, 그러니까 뼈를 깎는 고통의 수행을 끝내고 마침에 깨달음에 닿은 표정이다. 눈은 반쯤 감겨 있는데, 시선은 아래를 지그시 향하고 있다. 해탈한 눈이다. 입술은 힘을 주어 다물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이제는 그 무엇도 그의 마음을 흔들 수 없다. 예전에 이 표정이 어떤 뜻인지 몰랐는데 지금은 약간이나마 안다. 이 편안한 눈빛과 단호한 입술, 그리고 자애로운 표정을 가지기 위해서는 어떤 삶을 살아내야 하는지를 말이다. 그래서 또 후회가 된다. 지난 세월, 질투와 치기로 가득했던 내 젊은 날이, 허투루 낭비한 나날들이 마냥 부끄럽고 아플 따름이다. 나는 왜 더 치열하지 못했고, 더 겸손하지 못했을까.
석굴암 나와 돌아가는 길, 마음 한쪽이 가을 하늘에 뜬 연처럼 가벼운데 또 다른 한쪽은 추를 달아놓은 듯 무겁다.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인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김대성이 불국사를 지은 지극한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석공은 어떤 간절함으로 다보탑을 깎았으며 어떤 애틋함으로 석가탑을 쌓아 올렸을까. 내 입술은 언제쯤에나 석가모니의 그것처럼 단호해질 수가 있을런가.
오십은 지천명이라고 하는데, 자기에게 내려진 인생의 임무를 비로소 알고 그 일을 굳건하게 해나갈 때라는 하는데, 여전히 흔들리며 갈팡질팡 하고 있는 한 어리석은 인생이 단풍숲 속을 걸어가고 있다. 여행과 글이 인생의 전부라고 여기며 살아왔지만, 여행을 잘하고 글을 잘쓰는 것이 좋은 인생을 만들어주지 못한다는 것을 겨우 깨달은 한 인생이 휘청이는 걸음걸이로 단풍숲 붉게 물든 길을 내려가고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