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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긋하게, 여행 3 | 최갑수

경북 경주 Part 1


여행지도 나이에 따라 달리 보이고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이십 대 배낭여행자가 느끼는 인도와 마흔을 훌쩍 넘긴 중년의 여행자가 느끼는 인도가 같을 리는 없을 것이다. 경주 역시 마찬가지다. 들판에 구르는 돌 하나, 길가의 기와 한 장도 하찮은 것이 없을 정도로 수많은 문화재로 가득한 경주. 다시 찾은 경주는 까까머리 고등학생 시절 친구들과 키득거리며 찾았던, 수학여행지 경주와는 다른 모습, 다른 느낌으로 느껴진다.


사실 경주는 일 년에 서너 번은 찾는다. 찾을 때마다 같은 패턴으로 여행을 하지만 지겹거나 싫증이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주 새롭게 다가오는 것도 아니다. 경주에 대한 느낌을 말하자면 ‘좋다, 그냥 좋다’이다. 내가 사는 파주에서 경주까지의 거리가 400킬로미터가 훨씬 넘는데, 텅 빈 황룡사지와 안개 가득한 분황사의 모전탑이 떠오르고 보고 싶어 새벽녘 먼 길을 나설 때도 있다.


경주에서는 주로 걷는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때로는 뒷짐을 지고 때로는 우두커니 서 있기도 하며 느린 걸음으로 걷는다. 걸어서 저녁 무렵에는 황룡사지를 찾고, 아침이면 대릉원을 찾는다. 황룡사지를 어슬렁거리며 무너진 석탑과 절이 있던 자리와 부처가 앉았던 자리, 무심히 서 있는 당간지주 등을 바라보고 천천히 쓰다듬다 보면 천년 왕국의 비밀이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것 같다.


절터는 넓다. 동서 288미터, 남북 281미터. 이 자리에 구리 3만 근과 황금 1만198푼이 들어간 본존불 금동장륙상이 있었고 동양 최대의 목탑인 9층 목탑이 있었다. 에밀레종보다도 규모가 4배 더 나간다는 황룡사종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없다. 몽골군의 침입으로 모조리 불타버렸다. 본존불을 모시는 금당터에는 불상을 올려놓는 커다란 석조대좌가 남아있다. 


광활한 폐사지를 이리저리 거닐다가, 그 옛날 거대한 절을 떠받쳤을 돌무더기로 가서는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돌들을 쓰다듬어 보기도 한다. 황룡사지 서쪽 끝에 감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그 아래 절을 짓는데 사용됐던 돌들이 오글오글 앉아 있다. 황룡사를 떠받쳤던 커다란 주춧돌도 있고 맷돌도 있다. 세숫대야로 쓰였던 돌도 있다. 어떤 돌은 연꽃을 새겼고 어떤 돌은 부처님 얼굴을 새겼다.


그 돌들 앞에 서서 황룡사지에 천천히 깃드는 어둠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은 고요해지고 아늑해진다. 그러면서 우리네 삶은 곧 저러한 모습으로 외로워지겠구나 하는 생각에 젖기도 하고, 그러니까 착하게 살아야겠구나 하며 약간은 유치한 다짐 같은 것도 해본다. 어쨌거나 뭔가를 다짐하고 결심한다는 건, 삶에 대해 애정을 갖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이렇게 스스로를 대견해하면서 말이다. 


아침 산책은 주로 신라대종이 있는 태종로에서 시작한다. 신라대종은 국보 제29호인 성덕대왕신종을 재현한 종이라는데, 높이가 3.66미터, 평균 두께가 20.3센티미터, 무게는 무려 20.17톤이 나간다. 신라 경덕왕 때 만들기 시작해 혜공왕에 이르러 완성한 이 종은 1,200여 년 동안 서라벌의 아침을 깨웠고, 저녁의 고단함을 위로했을 것이다. 이 거대한 종을 그때 사람들은 어떻게 만들었을까. 그 마음을 짐작해 보지만 쉽게 헤아려지지 않는다. 그 종소리를 상상하며 대릉원 방향으로 걷는다.

경주를 고도답게 하는 것은 대릉원을 위시한 왕들의 고분군이 아닐까 싶다. 경주는 세계 최고의 고분 도시다. 죽은 왕들의 무덤 사이를 살아 있는 사람들이 산책한다.  노서·노동동 고분군을 비롯해 대릉원이며 황오리 고분군, 황남리 고분군, 내물왕릉, 오릉 등 무덤들 사이에 도시가 들어앉아 있는 형국이다. 경주 사람들은 무덤들 사이에서 아침을 맞고 산책을 하고 체조를 하고 술을 마시고 사랑을 한다. 그런데 그 모습을 상상해 보면 전혀 그로테스크하지도 않고 기괴하지도 않다. 죽음 역시 우리네 무덤덤한 일상의 한 부분이려니…… 이렇게 깨우쳐 준다.


대릉원에 들어서서, 달항아리를 반으로 잘라 엎어 놓은 듯 부드럽게 이어지는 능의 곡선 사이를 느리게 걸어간다. 그러다가 능의 겹치며 만들어 내는 어느 햇빛의 음영 앞에서는 오래 서 있는다. 마치 도자기나 조각품을 감상하듯, 조금은 진지한 자세로 말이다. 가끔 새소리가 날아들어 내 발등 위에 떨어지고 시원한 바람이 뜀틀처럼 이마를 짚고 간다. 나는 대릉원의 소나무 숲 사이를 걸으며 스스로가 오래된 경주 사람 같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대릉원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능이 미추왕릉이고, 미추왕릉을 지나면 황남대총이 나온다. 대릉원에서도 가장 큰 고분이다. 표주박을 엎어놓은 것처럼 생겼다. 남북으로 120미터, 동서로 80미터에 이르는데, 북쪽보다 남쪽 봉분이 더 크다. 그래서 봉분이 높은 남분은 왕이, 북분에는 왕비가 묻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실제 남분에선 남성의 부장품이, 북분에서는 여성의 부장품이 대거 발굴됐고 금관도 출토됐다. 하지만 주인이 누구인지는 아직까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누구의 무덤인지 특정할 수 있는 부장품은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릉이 신라 초기 박 씨 왕들의 고분이라면, 대릉원의 고분들은 김 씨 왕들의 무덤이다. ‘마립간’의 무덤인 셈이다. 대릉원과 도로를 건너 마주하고 붙어있는 노서·노동리 고분군 역시 대릉원과 궤를 같이한다.

대릉원에서 나오면 황리단길이다. 경주에서 가장 트렌디한 곳이다. 카페와 레스토랑, 기념품 가게, 독립서점 등이 몰려 있다. 저녁 무렵부터 많이 붐빈다. 십오 년 전, 전국의 골목을 취재한다고 돌아다닐 때, 이곳도 찾았다. 경주의 옛 정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었다. 조금 낡은 듯한 골목길은 여유롭고 평화로움이 넘쳐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홍상수 감독이 영화 <생활의 발견>을 이곳에서 찍기도 했다. 이 일대는 오랫동안 경주의 중심이었다. 포항과 울산, 영천, 감포로 통하는 주요도로가 관통했고 경주의 관공서들 대부분이 모여있었다. 부자들도 많이 모여 살았다.


황리단길을 건너면 첨성대고, 첨성대를 지나면 계림이 나오고 곧 월성에 닿는다. 월성은 신라의 궁궐이 있던 자리인데, 이곳에 오르면 대릉원과 황오동 등 경주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눈에 보이는 곳이 신라가 천 년 동안 번성했던 자리다. <삼국유사>는 “신라는 전성기에 서울이 17만 8936호()였고, 1,360방(), 55리(), 35개의 금입택(金入宅)이 있었다. 성안에 초가집 한 채 없고 집의 처마와 담이 서로 닿아 있었으며, 노랫소리와 피리 부는 소리가 길에 가득하였고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라고 적고 있다. 호당 평균 4~5명으로 잡아, 8세기 당시 경주의 상주인구를 70~90만 명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1호를 1명으로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갑론을박이 있지만 당시의 경주는 지금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번성한 도시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월성에서 내려와서는 계림에 간다. 경주 김씨의 시조 알지(閼智)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신라 탈해왕 때 회공이 이 숲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는데, 가까이 가보니, 나뭇가지에 금으로 만든 궤짝이 걸려 있었다. 뚜껑을 여니 궤 속에서 사내아이가 나왔고 이 사내아이의 성()을 김(), 이름을 알지라고 했다고 한다.

나는 날 저물 때 다 되어서는 노서· 노동리 고분군 앞에 서는 것을 좋아한다. 첨성대를 등지고 계림으로 가는 길, 내가 항상 서 있는 자리가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면 능 뒤로 지는 노을과 황오동 집들의 기와지붕이 어울려 신비로운 풍경을 펼쳐 보인다. 능의 곡선은 또 얼마나 유려하고 아름다운지.


이곳에 서서 딱히 하는 일은 없다. ‘이 능들, 참 예쁘다.’ 요렇게 감탄하며 우두커니 서 있다. 무덤들이 예쁘다면 좀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해 질 무렵이면 이 무덤들이 보는 이의 가슴을 쿵쾅거리게 한다. 해가 능 뒤로 슬금슬금 넘어갈 때쯤이면 능 주변으로 불이 들어오는데, 느긋한 능의 곡선과 어우러져 절묘한 풍경을 그려낸다. 게다가 뒤편 선도산의 곡선까지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깊고 그윽한 한 장면은 사진 찍는 이의 밝은 눈이 아닌 무지렁이 여행객도 감탄하게 만든다.


밤에는 동궁과 월지를 걷는다. 동궁은 태자가 살던 신라 왕궁의 별궁, 월지는 동궁 안에 있는 연못이다. 동서 200미터, 남북 180미터, 둘레 1,000미터로 그다지 크다고는 할 수 없는 연못인데, 좁은 연못을 넓은 바다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 어느 곳에서도 연못 전체를 조망할 수 없도록 만든 것이 특징이다.


나는 지금 월지에 비치는 동궁을 바라보며 서 있다. 노을이 떠나간 지는 오래다. 밤이 와서 어둠이 짙고 그만큼 별이 밝다. 조명을 받은 동궁의 처마가 환하다. 신라 천 년의 밤은 얼마만큼이나 화려했을까 하고 상상해 보지만,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다. 소설가 강석경이 경주에 머무르면서 만든 책 <이 고도를 사랑한다>에서 “허무를 알면서 우리는 성년이 된다”라고 썼다.


산다는 건 허무한 일이다. 삶에는 끝이 있고 결국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삶은 모래를 꼭 쥐고 서 있는 것과 같다. 놓치지 않으려고 힘을 주고 있지만 모래는 결국 흘려내려 손을 빠져나가고 만다. 손바닥에 남아있는 모래의 감촉을 느끼고, 점점 사라져 가는 그 감촉을 아쉬워하는 일이 사는 것이 아닐까. 황룡사지에서 대릉원에서 나는 어렴풋하게나마 허무를 느낀다. 강석경이 쓴 경주와 인도에 관한 책을 약간이나마 이해한다. 경주는 찾으면 찾을수록 어른을 위한 여행지인 것 같다. ✉️  

최갑수는 시인이자 여행작가다. 매일 매일 글을 쓴다. 써야 할 게 많은데, 쓸 시간이 없어 안타깝다. 쓴 책으로 『사랑하기에 늦은 시간은 없다』 『어제보다 나은 사람』 『음식은 맛있고 인생은 깊어갑니다』 등이 있다. @ssuchoi

📚 Book | 『사랑하기에 늦은 시간은 없다』


첫마음, 옛마을, 옛여행, 옛사랑 등에 관해 쓴 에세이입니다.


"우리가 가졌던 어떤 마음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그 마음이 처음 놓였던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거든. 우리가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까닭은, 그 마음이 그립기 때문이거든."

- 「좋아서, 그냥 좋아서」 중에서


인터넷 서점에 제가 직접 사인한 책이 있습니다. 얼마 안 남았네요. 이제 몇 권 안 남았네요.🥰

- 책 속에서 -


“삶이라는 게 그렇게 특별하고 거창한 게 아니에요. 뒤돌아보면 우리가 지나온 길 위에 뭔가 그럴듯한 게 하나 서 있죠. 그게 바로 의미라는 겁니다. 의미는 그냥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이랍니다.”

- 「봄에는 봄에 집중하고, 인생에서는 서로를 즐깁시다」 중에서


“이젠, 무언가가 사라져서 슬프다는 건 그게 그만큼 소중했고 사랑했다는 뜻이라는 걸 알게 됐다. ‘인간은 불행한 만큼 인생의 크기를 느끼고 행복한 만큼 인생의 깊이를 느낀다.’ 같은 제법 그럴싸한 말도 할 줄 알게 됐다.”

- 「무엇보다 슬픈 일은」 중에서


“여행을 하며 손톱이 자라고, 여행을 하며 사랑을 잊고, 여행을 하며 늙어가는 어느 인생이 창밖을 보고 있다. 뭔가를 두고 온 것 같지만 애써 찾지 않기로 한다. 어떤 최선은 잊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 「뭔가를 두고 왔지만 찾지 않기로 합니다」 중에서 


“여행을 하고 시를 쓰고 틈틈이 음악을 듣다 보니 인생이 훌쩍 가버렸구만.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시도, 여행도, 사진도 지나고 보니 아무것도 아니구만. 인생에는 다만 써야 할 것과 가야 할 곳이 있을 뿐이지.”

- 「나는 여전히 모자란 인간이지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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