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건축에 대한 궁금증을 속속들이 해결하는 김에, 몰입의 시간을 연장하고자 오늘 '마티의 각주'에는 외부 필진도 얼마 전 tvN <미래수업>에는 한국보다 먼저 저출산, 신도시 인구 감소 등을 겪은 일본 사례가 소개됐습니다. 두 나라는 때로 시간 차를 두고 비슷한 사이클의 사회 면면을 보이고, 이는 건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3월 10일경 출간할 『전후 일본 건축』에는 1945년 이후 일본 건축 역사를 총망라했습니다. 일본 건축에 대한 궁금증을 속속들이 해결하는 김에, 몰입의 시간을 연장하고자 오늘 '마티의 각주'에는 외부 필진도 모셨습니다. 정림건축문화재단 김상호 에디터가 함께 읽기 좋은 책을, 스튜디오 fnt의 이재민 디자이너가 함께 듣기 좋은 음악을 추천합니다. 『전후 일본 건축』을 읽는 한 가지 갈래 by 에디터 P 『전후 일본 건축』은 학부에서 미술사를 전공하고 미국에서 일본 건축사로 박사학위를 받은 조현정 선생님의 첫 단독저술입니다. 미술과 건축을 아우르고 일본 내의 시각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는 위치에서 수행한 연구에 기반한 책이니, 편견 없이 전후 일본 건축을 조망하기에 최고라 하겠습니다. 이 책은 일제 제국주의의의 프로파간다 프로젝트를 수행한 단게 겐조가 패전 후 국제주의 건축으로 변모해 전후 일본의 설계자로 부상하는 것에서 시작해, 구마 겐고가 도쿄올림픽을 위한 신국립경기장 설계를 맡게 되는 것까지, 건축과 일본의 정치와 사회가 얽힌 이야기가 빼곡합니다. 단게 겐조, 아라타 이소자키, 마키 후미히코, 안도 다다오, 이토 도요, SANAA, 야마모토 리켄, 아틀리에 바우와우, 구마 겐고 등 일본 건축의 수퍼스타들 거의 대부분을 다룹니다.
전공자들을 일차 독자로 삼은 책이지만, 문턱은 꽤 낮습니다. 차례와 참고문헌, 찾아보기를 뺀 본문이 약 300쪽 남짓인데, 도판이 129개이니 물 반 고기 반이라고 하겠습니다. 또 패전, 눈부신 경제성장, 버블, 버블의 붕괴, 재난 등 딱히 관심이 없어도 모를 수 없는 이웃 나라 일본의 정치, 경제, 문화와 함께 이야기하기에 건축에 대한 사전 이해가 적어도 큰 무리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이 책의 재미는 애니메이션, 만화 등 일본 대중문화에서 본 듯한 장면을 발견하는 것과 한국 건축계와 꽤 닮았음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20세기 한국 건축에 눈이 밝은 독자라면, 10~20년의 시차를 두고 일본에서 일어난 일들이 한국에서 재연되는 것을 여러 차례 목격할 수 있습니다. 아래에서 다룬 오사카 70 만국박람회와 포스트 버블 주택론 이외에도, 1988년 개봉해 전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애니메이션 「아키라」에서 단게 겐조의 <도쿄 계획>(아래 사진2)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물리적, 정신적 폐허를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단게가 제시한 <도쿄 계획>은 제3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31년이 지난 2019년 “네오 도쿄”(아래 사진1)에서 반복됩니다. 또 1969년 김수근이 이끈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의 "여의도 계획"(아래 사진3)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칩니다. 여의도 계획에 관해서는 『아키토피아의 실험』에 실린 "여의도 마스터플랜: 자동차 시대의 도시와 미래주의 서사"를 참조해주세요. 이 역시 조현정 선생님의 글입니다. 일본 건축이 그린 미래도시의 결정체 오사카 만박 '70, 그리고 『20세기 소년』 by 에디터 S 『20세기 소년』은 절대 끊어 읽을 수 없습니다. 어떤 ‘꺼림칙함’을 얼른 떨쳐버리기 위해서라도 결말을 향해 질주해야 합니다. ‘꺼림칙함’의 정체는 현실 그 자체입니다. 작가 우라사와 나오키는 연재를 시작한 1999년 당시까지 일본의 결정적 장면 세 가지를 절묘하게 엮습니다. ‘미래적’이란 평가가 제일 점잖은 편에 속할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 일본 열도를 공포에 몰아넣은 옴진리교 같은 신흥종교집단, 2000년을 앞둔 세기말 감수성을요. 오사카 만박 당시 유년기를 보낸 이들을 ‘만박 세대’라고 부릅니다. 컬러 TV가 등장하고 아폴로11은 달에 착륙하고 각종 로봇 애니메이션이 미래를 대변하던 때를 가장 예민하게 지나쳐온 세대죠. 『20세기 소년』 작가 우라사와 나오키도, 만화책 속 주인공들도 만박 세대입니다. 70년엔 박람회의 인기가 예전만 하지 않았다지만, 64년에 도쿄 올림픽을 치르고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부흥일로를 걷던 일본에게 오사카 만박은 기업과 언론, 국민이 총동원된 어마어마한 행사였습니다. "만박 다녀왔어?"로 인사를 대신할 정도였다고 해요. 만박은 만화 곳곳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주인공들이 초등학생 시절 쓴 ‘예언의 서’에 따라 신흥종교집단 '친구'가 지구 멸망 프로젝트를 꾸미면서 도쿄 한복판에 세운 '친구의 탑'(사진 오른쪽)은 그 유명한 '태양의 탑' 복사판(또는 돌연변이)이에요. 모두의 즐거웠던 기억이 공포로 뒤바뀌는 순간이죠. 만박에 대한 향수와 만박의 건축물들이 자아내는 기이한 에너지를 잘 버무려낸 우라사와 나오키의 감각은 정말 최고입니다. (오사카 만박에 참여한 건축가들은 정말 혀를 내두를 건축물들을 생산했답니다. 『전후 일본 건축』 4장에서 다루니 놓치지 마세요!) 지금까지 일본에서 누적 판매부수 3600만 부를 기록한 『20세기 소년』은 최근 완전판이 출간됐습니다. (전자책은 없어요..) 완전판은 보통 백색 모조지에 찍어 변색이 덜하고 실로 묶는 사철 제본을 택해 내구성이 좋은 반면, 흔히 ‘만화책’ 하면 떠올리는 판형보다 크고 두꺼워 책 넘김은 떨어지는 편입니다. 저는 ‘갱지’로 된 오리지널 판을 사랑한답니다. 몇 년 전까지 한 질이 있었는데 이사하며 버리고, 『전후 일본 건축』을 핑계로 새로 샀습니다. 사무실에 갖다 놓고 대여 장사를 해볼까 합니다. 『빛의 현관』과 포스트버블 시대의 주택론 by 김상호(건축 전문 에디터, 정림건축문화재단) 책은 우연한 기회로 인생 작품을 설계한 건축가의 인생 이야기입니다. 스토리의 바탕에는 일본 사회의 건축 문화가 두텁게 깔려 있고, 그 위로 집과 가족의 일상이 다양한 모습으로 하나둘 등장합니다. 줄거리 소개는 추리소설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주인공은 건축가이고 주택설계가 주요 작업입니다. 주택설계는 일본 건축계에서 오랫동안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만, 흥미롭게도 일본 경제의 버블이 터진 시기에 오히려 주택설계 시장은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불황으로 설계 업계에서 퇴출되었으나 꾸역꾸역 업을 이어가고 있는 자신을 포함한 일단의 설계회사 직원들을 주인공은 ‘패잔병’이라며 자조합니다. 이 '패잔병'들이 일본 특유의 정주 문화와 결합하면서 탄탄하고 지속적인 단독주택 시장을 새롭게 열었고, 이후 ‘잃어버린 30년’ 동안 일본 건축업계의 중요한 기반이자 젊은 건축가의 등용문 같은 역할을 해오고 있습니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일본 주택설계에 관한 전후 맥락을 『전후 일본 건축』이 소상히 전합니다. 한편, 『빛의 현관』은 책 제목에서도 풍기듯 건축 공간이 만들어내는 어떤 분위기를 탐미하고 있습니다. 일면 철학적이고 정신적인 건축에 심취해 있는 일본 건축의 단면을 보여주는 현상입니다. 주인공은 ‘노스라이트’(북쪽 방향에서 들어오는 빛)에 집착하고, 브루노 타우트라는 독일 건축가가 20세기 초 일본에 머물며 남긴 흔적을 파고들고, 동년배 건축가들과 공간이 주는 힘과 감흥으로 내공을 겨루고, 집이나 건물에 기어코 어떤 혼을 담아내야만 비로소 ‘건축가’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여깁니다. 이런 모습들 속에는 분명 일본 건축이 지향하는, 또는 그렇게 보이게 하는 암묵적 컨센서스 같은 것이 깔려 있습니다. 『전후 일본 건축』은 『빛의 현관』 주인공의 이런 태도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이해하기에 더할 나위 없습니다. 마티의 취향 <NEW YORK> 『전후 일본 건축』을 읽으며 70-80년대 일본 음악을 들으면 딱이겠다 싶어, 이 분야 고수인 이재민 디자이너(studio fnt)에게 음반 추천을 청했습니다. 그는 CBS/Sony의 사운드 이미지 시리즈 중의 하나인 <NEW YORK>을 추천하며 다음과 같이 소개했습니다. "이 시리즈는 전후 일본이 동경해온 여러 지역을 다루는데, <NEW YORK>에서는 20세기 서구 문명의 중심지 뉴욕을 묘사합니다. 고도성장이 선사한 ‘뉴욕도 우리가 커버할 수 있는 소재다’라는 자신감을, 전통 재즈와 록 등을 결합한 퓨전 재즈로 담아냅니다. 버블이 꺼지기 시작하는 90년대라면 안 나왔을 음반이지요.” 경외하거나 배척하지 않고 서구 문화를 그냥 무심하게 ‘써 먹는’ 태도는 『전후 일본 건축』(5장 참조)에도 언급되니, 함께 듣기에 최고의 음반입니다. 느긋하고 낙관적이며 도회적인 감수성을 (가져본 적 없어도) 추억해보면 어떨까요. 도서출판 마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