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선
은영 님의 행보를 보면, 사회의 부당한 압박을 내재화하지 않고 진짜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시는 것 같아요. 예전부터 은영 님은 이렇게 살아오셨나요?
/ 은영
동물해방 운동을 시작하기 전에 저는 지금과 아주 달랐어요. 많이 무력하고 우울했거든요. 매일 감당할 수 없는 문제를 삶에서 다뤄야 했고, 좀처럼 편히 쉴 수 없었고, 집이 감옥 같으니 종횡무진 밖으로…. 누굴 만나도 제 고통을 말하지 않고는 버티기 힘들었어요.
제 고통에 제가 묶여버린 거예요. 그러다 보니 사람을 만나는 것도 힘들고 이야기할수록 자괴감이 커졌어요. 그렇게 무슨 이야기를 해도 어떤 사회 운동을 해도 제가 제 이야기를 그저 배설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던 것 같아요. 힘이 되는 것이 아닌 저를 갉아먹는 느낌이었어요.
그러다가 지금의 섬나리(현 DxE 활동가)를 만나게 되었는데요. 제 이야기가 오롯이 받아들여지는 느낌이었어요. 수용되는 느낌. 섬나리와 몇 날 며칠을 밤새 이야기 나누곤 했는데. 잠자는 것도 까먹고 이야기한 적이 많았어요. 그러면서 제가 힘들 수밖에 없는 구조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자유로워진 느낌이 들더라고요.
지금처럼 동물해방 시민운동을 조직하기에 앞서, 동료들을 만나기도 훨씬 이전에, 섬나리와의 앞선 관계가 저를 여기까지 이끌어준 중요한 힘이에요. 고마운 관계죠. 그래서 그런 관계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요.
/ 보선
그 관계가 어떻게 확장해서 지금의 직접행동으로 이어졌나요? 저에겐 활동가가 된다는 것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이 있어요. 혼자 채식하는 것을 넘어 조직을 구성해서 활동하는 데엔 더 큰 다짐과 준비가 필요할 것 같거든요. 지금의 DxE Korea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궁금해요.
/ 은영
섬나리가 웬 비건캠프라는 곳이 있다며 가게 되었는데요. 그게 2019년 2월 말인가 그랬어요.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여전히 무서워서, 저는 절대 가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죠. 사람에 대한 불신이 여전히 컸죠. 불안정한 제가 관계를 잘 다루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도 컸고요. 근데 섬나리는 기대하며 갔어요. 재밌는 건 그때 그 캠프를 향기(현 DxE 활동가)가 다른 여러 활동가와 조직했다는 것이에요. (비건캠프는 동물권단체 무브, 비건페미니스트네트워크 그리고 여러 개인 활동가들이 기획했어요.)
먼저 동물권 운동을 시작했던 향기는 그때부터 알았던 것 같아요. 커뮤니티의 중요성을요.
결국 2019년 2월 말 비건캠프를 시작으로 2019년 한국 동물해방 운동이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했거든요. 2019년은 정말 정말 정말 강력했어요.
어쨌든 섬나리가 비건캠프에 갔는데, 2박 3일이 지나서도 사람이 돌아오질 않는 거예요. 연락도 거의 안 되고요. 비건캠프는 끝났어도 거기에서 만난 사람들과 끈끈한 모임을 이어가고 있더라고요. 얼마나 좋은 사람들을 만났을까 반신반의하면서 섬나리가 새로 사귄 친구들을 만나러 갔어요.
그때 만난 친구가 하루였어요. 하루는 집과 돈 없이 히치하이킹을 하며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활동가였어요. 하루가 만든 영상을 봤는데, 걱정 없이 새로운 사람들과 춤추고 노래하고 따뜻하게 온기 나누는 모습을 보고 그때 제가 ‘인생이 통째로 흔들린다’고 말했어요.
저는 불안과 걱정 속에서 살며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획을 짜며 지금 이 순간을 갈아 넣고 수험공부를 하고 있었거든요. 근데 하루는 그 계획을 통째로 부정하는 느낌이었어요. 허울 없는 하루를 만나고 바로 하루에게 사랑에 빠졌어요
그러다가 서울에서 하루의 강연이 열리게 되었어요. 하루는 전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동물해방 운동을 소개해줬어요. <우리는 왜 불의에 맞서 저항하고 행동해야 하는가> 라는 제목의 강의였는데, DxE의 활동이나 비질 현장을 보여줬어요. 그때 그 현장들을 처음 보면서 막 온몸이 떨리고 눈물이 났어요.
저와 비슷한 체구의 여성 활동가가 맨몸으로 집채 만 한 도살 트럭을 막아세우는 영상을 보면서, 저렇게 바로 저항할 수 있는 건데, 왜 나는 안된다고 생각했을까, 못한다고 생각했을까, 나도 저렇게 살아가야겠다 결심했어요. 그리고 강의가 끝나자마자 하루에게 달려가선 물었어요. ‘나 이거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니?’ 하루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 활동가들에게 가보라고 했어요.
그리고 그 활동가들과 함께 바로 그달 비질을 시작하게 됐어요.
그렇게 가려진 현실을 함께 마주한 활동가들과 곧 뭐라도 더 해보자는 마음으로 ‘어디서나 직접행동’이라는 이름을 가진 풀뿌리 네트워크인 DxE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아요. 그 중 한 명이 바로 향기였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