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여러분의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있으신가요? 저는 창가가 있는 부엌의 싱크대 앞에 서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특히 그곳에서 창밖을 보며 설거지할 때가 가장 좋습니다. 설거지 자체를 좋아하는 바른 사람 이미지를 만들려는 것은 아니구요. 사실 대부분의 설거지는 엄마가 하기는 하는데요. 그런데 어쩌다 한 번씩 설거지를 하게 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이유 모를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됐던 것이 좋았을 뿐입니다. 기분 좋은 햇살과 바람을 맞고 있다 보면, 가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구요. 이번 글도 아까 설거지를 하다가 떠오른 생각을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 얼마 전에 알게 된 저의 친구 마르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마르셀은 2.5cm 크기의 조개입니다. <마르셀, 신발 신은 조개>라는 영화의 주인공입니다. 미국의 한 에어비엔비 숙소에 살고 있습니다. 신발을 신고 걸어다니구요. 인간과 대화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마르셀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건, 아마추어 영화감독인 딘이 마르셀의 모습을 유튜브에 업로드하고 나서부터입니다. 그 영상은 순식간에 엄청난 조회수를 기록하게 되죠. 그러자 인기 TV 프로그램들이 앞다투어 마르셀을 섭외하려 나섭니다. 마르셀은 이 기회를 잡을지 말지에 대해 고민합니다. TV에 나와 세상에 너무나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지만, 곁에 몸이 편찮으신 할머니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르셀에게 남은 유일한 가족인 할머니. 다른 가족들은 다 어떻게 된 거냐구요? 바로 그것이 마르셀이 TV 출연을 고민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과거, 마르셀과 함께 살고 있던 인간들이 집을 떠나면서 본의 아니게 마르셀의 가족들을 강제 이주시켰던 것입니다. 이에 마르셀은 할머니의 건강을 챙기는 한편, 자신을 촬영하는 딘의 도움을 받아 그리운 가족들을 찾기에 나섭니다.


가족과 이별을 하기는 했지만, 마르셀의 일상은 활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크기가 훨씬 큰 인간도 제 몸뚱이를 건사하기 힘든 세상인데, 조개의 몸을 가진 마르셀의 입장이라면 더욱 더 해야 할 일이 많겠죠. 그야말로 그 모든 순간이 제대로 ‘유튭각’인 것입니다. 특히 재밌는 것은 마르셀의 탈것입니다. 마르셀은 테니스 공을 타고 다닙니다. 정확히는 테니스 공 안에 들어가 테니스 공을 운전하는 방식으로, 먼 거리를 빠르게 이동합니다. 너무 빨라 자주 인간의 물건들과 부딪히기는 하지만 큰 문제는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정말로 큰 다른 문제가 있기 때문인 것일까요? 큰 문제가 작은 문제들을 덮고 있는 것일까요? 그런데 마르셀이 지니고 있는 것만큼의 큰 문제를 갖게 된다면, 작은 문제는 별게 아닌 것이 되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할머니의 건강과 헤어진 가족을 찾는 문제 중 더 큰 문제는 무엇일까요?


영화는 그런 마르셀의 모습과, 그런 마르셀의 모습을 촬영하고 있는 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영화는 일종의 페이크 다큐멘터리 방식으로 찍힌 영화입니다. 인터뷰어인 딘이 마르셀과 문답을 주고받는 과정이 영화에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마튜브(마르셀 유튜브)’의 감독인 딘이 <마르셀, 신발 신은 조개>라는 영화의 실제 감독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딘 플레이셔-캠프가 감독의 이름입니다. 쉽게 말해 이 영화는 감독 자신이 연출과 연기를 동시에 한 영화입니다. 영화 속에서 아마추어 감독 역할로 출연하는 딘은 최근 이혼을 한 뒤 에어비앤비에 머물고 있는 상태인데요. 흥미로운 또 하나의 지점은 마르셀의 목소리 역할로 출연한 배우 제니 슬레이트가 딘 플레이셔-캠프의 실제 전처라는 사실입니다. 정확한 촬영 기간과 제작 기간이 얼마나 겹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화 속 딘의 상황과 감독 딘의 실제 상황이 어느 정도 겹쳐지는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이 생각은 감독이 창작한 마르셀이라는 캐릭터의 모습에도, 감독 자신의 무언가가 반영되어 있을 수 있다는 가설을 세우게 합니다. 어떤 큰 문제 때문에 작은 문제들을 등한시하고 있는 나. 어떤 문제가 내 인생에서 더 큰 문제인지, 무엇에 더 집중해야 하는 건지 갈피를 잡고 있지 못하는 나.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이 문제를 미뤄둘 수도 없는 것입니다. 미루고 또 미룸으로써 산더미처럼 쌓여버린 설거짓거리들은 절대 저절로 씻기지 않는 것일 테니까요.


그것을 모르지 않지만 우리는 오늘도 일상을 살아갑니다. 마르셀의 영화엔 극적인 일이 일어나기는 하지만, 우리의 일상은 영화가 아니기에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확률이 높습니다. 이 문제는 평생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영화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 때 저는 부엌 싱크대 앞에 서서 설거지를 하며 창밖을 봅니다. 아니 사실은 가끔 설거지를 하며 창밖을 볼 때, 그런 생각을 하며 마음속에 쌓여 있는 설거짓거리들을 살짝 들춰보곤 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이곳이, 제가 저의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입니다.


제 친구 마르셀은 세탁방에 있는 창가를 특별히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때로는 홀로 서서 바람을 맞기도 한다고 하는데요. 특히 그때 들리는 특별한 소리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바람이 자신의 껍데기를 통과하면서 발생시키는, 아름다운 소리를 말입니다.


그 소리는 분명 그곳에 마르셀이 서 있었기에 날 수 있는 소리일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세상의 일부임을 몸서리 쳐지도록 느낄 수 있게 만드는 소리. 잠깐 동안 세상의 모든 문제를 잊게 해주는 소리. 이유 모를 마음의 평안을 선사해 주는 소리. 그건 나와 세상이 부딪혀서 생기는 파열음이 아니라, 세상이 나를 통과함에 따라 자연스레 발생하는 아름다운 소리인 것이 분명합니다.

  
"들어 보세요!"

- ONE DAY ONE MOVIE by 김철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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