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철 맞이 초단편
안녕하세요 풀칠러님. 오늘의 에세이 당번 야백입니다.

날이 많이 더운데 잘 지내셨나요?
벌써 2주가 지났다니, 시간이 참 쏜살같네요.

이렇게 <풀칠>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매일매일이 요즈음 자주 내렸던 비처럼 그저 흘러만 갔겠단 생각이 듭니다.
굳이 쓰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쓸 구실을 만들어주셔서 감사해요.

오늘의 주제는 장마입니다.
어지러운 일상 속 남는 이미지들을 엮어서 짧은 얘기를 엮어 봤어요.

충만한 여름날 보내고 계시길 바라며,
오늘도 읽는 마음을 내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빗방울의 기억>


장마철이네요. 어두컴컴한 하늘, 습한 공기, 잔뜩 무거워진 먹구름. 여름의 한복판, 땀에 전 채 지하철역을 향해 걷고 있는 당신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요.


'아, 출근해야 되는데 비가 오냐. 짜증 나네.'일 수도 있겠고, '더워 죽겠는데 잘 됐다.' 일지도 모르겠네요. 아니면 '왠진 모르겠지만... 뭔가... 슬프네' 일지도.


신기하지 않나요. 그냥 날씨일 뿐인데 온갖 상념을 불러일으킨다는 게. 제가 비밀을 하나 알려드리죠. 저희 구름에게도 기분이 있답니다. 그러니까 구름을 볼 때 무슨 감정이 밀려오는 건, 옆자리 동료의 기분에 전염되는 것과 비슷한 거죠. 구름의 기분은 어떻게 생겨나냐고요?


뭐, 사람의 기분이 그렇듯이 구름의 기분도 대부분 자라온 가정환경에 달려있답니다. 저희도 구름이 되기 전에 다양한 유년기를 거치거든요. 물론 그때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긴 하지만요. 강. 지하수. 바다. 피. 오줌. 침. 눈물. 저는 저를 이루고 있는 모든 순간을 기억하고 있답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제가 그 모든 지나간 기억들의 총합이라고 할 수 있죠. 무수히 많은 물 분자가 모여서 구름이 된다는 건 당신도 알고 있겠죠? 제가 늘 죽상인 이유는 아무래도 이 기억의 무게 때문인지도 모르겠네요. 기억이라, 이게 참 무겁단 말이죠.


똑.

똑.

똑.


아이고 실례. 저도 모르게 몇 방울을 흘려버렸네요. 뭐, 시간이 된 거겠죠. 잠시 뒤면 번개가 번쩍, 천둥이 쾅쾅 칠 테고, 그럼 저는 이 모습을 영영 잃어버리게 되겠죠. 지금 이 순간에만 존재할 수 있는 이 모습이 곧 사라진다니 조금 아쉬운데요.


하지만 우리에겐 '곧'이라는 시간만 있는 건 아니죠. 눈에 잘 띄진 않지만, '지금'이라는 안락한 틈도 있잖아요. 틈.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엘레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커피를 시켜놓고 내 번호가 전광판에 번쩍이길 기다리는 동안-. 지하철역까지 가는 길에 구름을 보는 당신은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하겠죠.


자, 잠시만 멈춰 봐요. 지금 맞은 빗방울이 누구의 눈물인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는지를 얘기해 드릴 테니. 아주 잠깐의 틈에 들어가기에 딱 알맞은 이야기죠.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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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눈물

당신도 잘 아시겠지만,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 오해와 뒷말이 있기 마련이죠. 오해가 먼저일까요? 아니면 뒷말이 먼저일까요? 이건 구름이 먼저냐 비가 먼저냐처럼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숙제겠죠. 여하튼, 방금 흘린 눈물은 '뒷말'에서부터 시작됐답니다. 천둥번개처럼 모두가 삽시간에 알게 되는 '회사에서의 뒷말' 말이에요.


이야기는 어느 회사의 탕비실에서 시작됩니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마도 당신이 다니고 있는 회사와 비슷한 그런 보통의 회사를 생각해 보세요. 이 회사의 직원들은 다들 탕비실에 있는 제로콜라를 굉장히 좋아했답니다.


점심에 근처 패스트푸드 점에서 단품으로 햄버거를 산 다음, 탕비실에 있는 제로콜라랑 같이 먹는 게 회사 직원들에겐 꽤 큰 낙이었던 거죠.


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 제로콜라가 난생처음 보는 이온음료로 바뀐 게 아니겠어요. 사람들은 그 이온음료가 분명히 제로콜라보다 더 쌀 것이고, 그래서 제로콜라 대신 비치된 거라고 지레짐작했죠. 회사에서 내리는 결정들은 대개 비용이 원인이니까요.


문제는 이온음료가 햄버거랑은 영 안 어울린다는 거였어요. 어느 점심시간, 탄산이 없다는 사실에 심각하게 언짢아진 직원들은 주변을 한 번 살핀 뒤, 소곤소곤 회사 욕을 풀어냅니다.


"짜치게 콜라 값을 아끼냐. 그거 얼마나 한다고."

"쪼매난 회사니까 그렇죠. 짜치는 게 한두 번이에요?"

"전 회사에서도 좀 어려워진다 싶으면 바로 직원 복지부터 줄이더라고요."

"우리도 어려운 거 아니에요?"

"그런가? 근데 항상 어려웠잖아요."

"왜 이번에 CFO 새로 왔다고 하지 않았나? 그 사람이 줄이라고 한 거 아닐까요? 비용 줄이는 게 일이니까. 빨리 성과 내려고."

"맞네. 그게 일이니까. 비용 줄일 만한데 찾아서 보고하라고 했나 보다."

"진짜 그런가?"


아주 먼 옛날엔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 '감나무 아래에선 갓끈을 고쳐 매는 게 아니다' 같은 속담이 있었다죠. 이런 속담까지 있는 걸 보면 인간이 인과관계 검증과 상관없이, 일단 말이 된다 싶으면 냅다 사실로 믿어버리는 습성을 갖고 있나 봐요. 그날의 그 대화도 어김없이 이 습성을 따랐고, 회사 안엔 '새로 온 CFO가 제로콜라를 없앴다'는 소문이 퍼져나갔습니다. 일주일이 지나자 모든 사원들은 CFO를 '제로콜라를 없앤 사나이'로 생각하게 되었고요.


그런데, 이런 상황은 탕비실 물품 구매 담당자에게 심각한 윤리적 딜레마를 불러일으켰답니다. 구매 담당자가 제로콜라 대신 이온음료를 산 이유는 출근길에 인스타그램에서 '설탕 대신 단 맛을 내기 위해 사용되는 감미료가 남성의 생식능력을 떨어트린다'고 적힌 이미지 한 장을 봤기 때문이거든요. 사실 CFO랑은 아무 상관이 없었던 거죠.


이 사태를 지켜본 구매담당자는 새로 부임한 CFO에게 미안한 마음을 느꼈습니다.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적은 없지만 푸근한 인상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기도 했었거든요. 하지만 차마 CFO를 변호할 용기까진 나지 않았어요. '생식능력이 걱정돼서 다른 걸 시켜봤다'라고 동료들에게 어떻게 말할 수 있겠어요?


구매 담당자는 결국 CFO를 변호하는 대신, 조용히 수습하는 길을 택합니다. 일단 이온음료가 다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제로콜라를 시키는 거죠. 사람들은 투덜대면서도 부지런히 탕비실을 들락날락했고, 이온음료도 머잖아 동나긴 할 테니 나쁘지 않은 전략 같아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주, 이온음료 재고가 슬슬 다 떨어질 때쯤의 어느 날. 구매담당자는 퇴근 30분 전에 CFO에게 어떤 자료를 요청받습니다. 그리 복잡한 업무는 아니었지만 데이터들이 흩어져 있어서 시간이 좀 걸리는 일이었어요. 내심 급한 건 아니라고 답해주길 바라며 언제까지 필요하시냐고 물어봤더니 CFO 님 왈.


“그냥 AI 돌리면 5분이면 되지 않아요? 되는대로 바로 주세요”


그날 구매담당자는 CFO가 시킨 자료를 만들다 30분 정도 야근을 했답니다. 자기 딴에는 나름 빠르게 일을 처리했다고 봐야겠지만, 상사가 AI 돌리면 5분 걸린다고 생각하는 일을 한 시간이나 걸려서 했기 때문에 무능한 사람으로 보일 것 같단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 짜증이 난 구매담당자는 메모장을 켜서 뭔가를 적기 시작합니다.


‘이전 직장에서도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던가. 그때도 항상 말도 안 되는 일을 시키고 손이 느리다고 타박했었지. 전 애인은 또 어떤가. 피곤해 죽겠는데도 전화하면서 피곤한 티 조금 냈다고 어찌나 잡도리를 해대던지. 다들 나한테 왜 이래?’


메모장에 휘갈긴 문장들을 다시 읽다가, 구매담당자는 문득 인생이 참 고독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창밖에는 분홍빛 노을이 퍼지고 있고, 잔잔한 재즈 음악이 흐르고 있는 조용한 사무실. 구매담당자의 손이 마우스를 움직입니다. 클릭. 클릭. 클릭. 구매담당자는 제로콜라 대신 이온음료를, 이전에 발주한 수량의 두 배만큼 시키고 퇴근합니다.


그날 밤, 그는 집에서 혼자 맥주를 마시다가 약간 취했고, 집 앞에 나가서 담배를 피웁니다. 꼭 요즘과 비슷한 날씨의 후덥지근한 여름날, 실외기가 열기를 뿜어내는 어느 원룸촌의 골목, 가로등 아래서 담배를 피우는 젊은 남자. 목이 매캐해졌는지 사레가 들린 건진 모르겠지만 기침을 하기 시작합니다. 귀가 중이던 원룸촌의 주민들은 그 켈록대는 덩어리를 멀찍이 피해서 집으로 종종걸음을 치고요. 또다시 뭔가 고독하다는 느낌을 받은, 별 이유도 없이 생식능력을 지키고 싶단 생각을 한, 나름 성실한 직장인인 우리의 구매담당자. 그의 눈가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습니다.


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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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 조절 실패로 뒷 얘기는 풀칠 236호에서 이어서 하겠습니다.

비 소식이 잦은 계절입니다. 출퇴근길 우산 잘 챙기세요.

파주 :  위기다, 라는 말을 종종 탄식처럼 내뱉으며 살고 있는 나날입니다. 면역력이 약해졌는지, 마음이 약해졌는지 몰라도요. 상사든 클라이언트든 아니면 세상이든, 불가항력적인 존재가 불합리한 오더를 내릴 때면 울고 싶은 심정이 됩니다.

그렇게 눈물이 차오르는 순간마다 멜로디를 담아 읊조립니다. '눈물이 차올라서 고갤 들어.. 흐르지 못하고 또 살짝 웃어...' 스스로를 위한 블랙코미디 쇼를 펼치는 거죠. 이 주문이 나름 효과가 있는지, 아니면 어처구니가 없는 건지 '살짝 웃어'라는 대목에서 매번 피식 웃어버리게 됩니다. 이 나이 먹고 사무실에서 우는 추태를 보일 수는 없으니까요.

오늘도 서너 번 눈물이 차올라서 고갤 들어버린다는 노래를 부르고 말았네요. 언제쯤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요즘입니다.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은 꿈꾸지도 않으니, 울고 싶을 때 마음껏 울 수 있게 될 수만 있다면 좋겠네요. 진심으로요.
지난 호에 보내주신 답장에
다시 짧은 답장을 보내드립니다.

풀칠러 A : 뉴스레터 보관함인거 뻔히 보고 들어갔는데 협업 제안이라고 해서 평소보다 더 헐레벌떡 들어왔네요 ㅎㅎㅎ 저도 종종 협업메일을 받고 있는데 이번엔 또 무슨 제안일까 상기되어서 왔어요. 저도 사실 인플루언서까지는 아니지만 작디작은 광고를 받아 부업을 하고 있거든요. 요즘은 진짜 뭐든 광고판이 되어버린게 참 웃기고 슬프지만, 진짜 뭐라도 부수입 만들어보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같아요. 저도 인스타나 틱톡같은 멋쟁이 인플루언서처럼 끼는 없지만 근근히 부업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야백 : 이거 이거 걸려드셨군요. 죄송합니다. 주제에 맞춰 장난을 좀 쳐봤습니다. 멋진 상품을 멋진 얘기로 담아내는 건 팔로워 수랑 상관없이 참 어렵고 대단한 일인 것 같아요. 부럽고, 대단하세요. 그...작디작은 광고 받는 방법...여쭤봐도 될까요?
풀칠러 B : 아 증말루 잠깐 설렜잖아요~ 제목 너무헤~
벝 유자녀 유부 마음 설렐 일 드물기 때문 이 또한 귀하네요. 땡끼유.
제게 협업은 늘 기대되고 또 부담되는 일이에요. 받을 때도 청할 때도요. 사람을 좋아하고 있는 힘껏 믿어버리는 성격 때문에 멍도 세게 들고요. 그래도 여전히 사람이 좋아요. 싫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요. 좋아야 싫어하는 거더라고요. 이 또한 팔자고 재능이려니 합니다.
파주 : 발칙한 제목으로 원치 않는 설렘을 드려 다시 한번 송구합니다. 모든 게 숫자로 치환될 수 있는 학창시절과 다르게, 사회는 조금 더 재능이 다채로워 보이는 것 같습니다. 노는 것도, 먹고 마시는 일도 남들보다 특출나게 잘하면 상당한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재능이 되니까요. 풀칠러님의 '부업을 하는 부지런함'과 '힘껏 좋아하고 믿어버리는 힘'도 부러울 만큼 멋진 재능입니다. 더운 날씨에 건강 잘 챙기시기를 바라며, 매주 메일함을 열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요즘 출근길에 즐겨 듣는 노래의 가사로 안부와 인사를 대신합니다.


무언가에 이끌리는 건
특정한 순간을 잊지 못하는 건


사랑하고 미워하는 건
그런 사소한 날들이 다 무엇인지


작고 작은 조각이 모여
대체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지


보고 싶었던 그 풍경은
듣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인지


어떤 노래 듣고 있는지
어떤 불안을 베고 잠에 드는지
어떤 혼잣말 하고 있는지
어떤 사람도 들어 주지 않는지


세계 저 너머로의 전진을 견디며
가쁜 호흡과 아픈 두 발을 이끌고
도망치지는 않겠다는 다짐으로
애써 달리고 있진 않은지


-인간은 딥러닝의 꿈을 꾸는가 중, 최미루


이번 주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저희는 2주 뒤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우정을 담아, 풀칠 팀 드림.
credit
에세이 | 야백
코멘트 |  파주
풀칠러스케치 | 야백
편집 | 야백, 파주

Published by
풀칠 | 밥벌이 미학 연구회
먹고 사는 게 다는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