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의 기억>
장마철이네요. 어두컴컴한 하늘, 습한 공기, 잔뜩 무거워진 먹구름. 여름의 한복판, 땀에 전 채 지하철역을 향해 걷고 있는 당신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요.
'아, 출근해야 되는데 비가 오냐. 짜증 나네.'일 수도 있겠고, '더워 죽겠는데 잘 됐다.' 일지도 모르겠네요. 아니면 '왠진 모르겠지만... 뭔가... 슬프네' 일지도.
신기하지 않나요. 그냥 날씨일 뿐인데 온갖 상념을 불러일으킨다는 게. 제가 비밀을 하나 알려드리죠. 저희 구름에게도 기분이 있답니다. 그러니까 구름을 볼 때 무슨 감정이 밀려오는 건, 옆자리 동료의 기분에 전염되는 것과 비슷한 거죠. 구름의 기분은 어떻게 생겨나냐고요?
뭐, 사람의 기분이 그렇듯이 구름의 기분도 대부분 자라온 가정환경에 달려있답니다. 저희도 구름이 되기 전에 다양한 유년기를 거치거든요. 물론 그때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긴 하지만요. 강. 지하수. 바다. 피. 오줌. 침. 눈물. 저는 저를 이루고 있는 모든 순간을 기억하고 있답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제가 그 모든 지나간 기억들의 총합이라고 할 수 있죠. 무수히 많은 물 분자가 모여서 구름이 된다는 건 당신도 알고 있겠죠? 제가 늘 죽상인 이유는 아무래도 이 기억의 무게 때문인지도 모르겠네요. 기억이라, 이게 참 무겁단 말이죠.
똑.
똑.
똑.
아이고 실례. 저도 모르게 몇 방울을 흘려버렸네요. 뭐, 시간이 된 거겠죠. 잠시 뒤면 번개가 번쩍, 천둥이 쾅쾅 칠 테고, 그럼 저는 이 모습을 영영 잃어버리게 되겠죠. 지금 이 순간에만 존재할 수 있는 이 모습이 곧 사라진다니 조금 아쉬운데요.
하지만 우리에겐 '곧'이라는 시간만 있는 건 아니죠. 눈에 잘 띄진 않지만, '지금'이라는 안락한 틈도 있잖아요. 틈.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엘레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커피를 시켜놓고 내 번호가 전광판에 번쩍이길 기다리는 동안-. 지하철역까지 가는 길에 구름을 보는 당신은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하겠죠.
자, 잠시만 멈춰 봐요. 지금 맞은 빗방울이 누구의 눈물인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는지를 얘기해 드릴 테니. 아주 잠깐의 틈에 들어가기에 딱 알맞은 이야기죠.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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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눈물
당신도 잘 아시겠지만,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 오해와 뒷말이 있기 마련이죠. 오해가 먼저일까요? 아니면 뒷말이 먼저일까요? 이건 구름이 먼저냐 비가 먼저냐처럼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숙제겠죠. 여하튼, 방금 흘린 눈물은 '뒷말'에서부터 시작됐답니다. 천둥번개처럼 모두가 삽시간에 알게 되는 '회사에서의 뒷말' 말이에요.
이야기는 어느 회사의 탕비실에서 시작됩니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마도 당신이 다니고 있는 회사와 비슷한 그런 보통의 회사를 생각해 보세요. 이 회사의 직원들은 다들 탕비실에 있는 제로콜라를 굉장히 좋아했답니다.
점심에 근처 패스트푸드 점에서 단품으로 햄버거를 산 다음, 탕비실에 있는 제로콜라랑 같이 먹는 게 회사 직원들에겐 꽤 큰 낙이었던 거죠.
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 제로콜라가 난생처음 보는 이온음료로 바뀐 게 아니겠어요. 사람들은 그 이온음료가 분명히 제로콜라보다 더 쌀 것이고, 그래서 제로콜라 대신 비치된 거라고 지레짐작했죠. 회사에서 내리는 결정들은 대개 비용이 원인이니까요.
문제는 이온음료가 햄버거랑은 영 안 어울린다는 거였어요. 어느 점심시간, 탄산이 없다는 사실에 심각하게 언짢아진 직원들은 주변을 한 번 살핀 뒤, 소곤소곤 회사 욕을 풀어냅니다.
"짜치게 콜라 값을 아끼냐. 그거 얼마나 한다고."
"쪼매난 회사니까 그렇죠. 짜치는 게 한두 번이에요?"
"전 회사에서도 좀 어려워진다 싶으면 바로 직원 복지부터 줄이더라고요."
"우리도 어려운 거 아니에요?"
"그런가? 근데 항상 어려웠잖아요."
"왜 이번에 CFO 새로 왔다고 하지 않았나? 그 사람이 줄이라고 한 거 아닐까요? 비용 줄이는 게 일이니까. 빨리 성과 내려고."
"맞네. 그게 일이니까. 비용 줄일 만한데 찾아서 보고하라고 했나 보다."
"진짜 그런가?"
아주 먼 옛날엔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 '감나무 아래에선 갓끈을 고쳐 매는 게 아니다' 같은 속담이 있었다죠. 이런 속담까지 있는 걸 보면 인간이 인과관계 검증과 상관없이, 일단 말이 된다 싶으면 냅다 사실로 믿어버리는 습성을 갖고 있나 봐요. 그날의 그 대화도 어김없이 이 습성을 따랐고, 회사 안엔 '새로 온 CFO가 제로콜라를 없앴다'는 소문이 퍼져나갔습니다. 일주일이 지나자 모든 사원들은 CFO를 '제로콜라를 없앤 사나이'로 생각하게 되었고요.
그런데, 이런 상황은 탕비실 물품 구매 담당자에게 심각한 윤리적 딜레마를 불러일으켰답니다. 구매 담당자가 제로콜라 대신 이온음료를 산 이유는 출근길에 인스타그램에서 '설탕 대신 단 맛을 내기 위해 사용되는 감미료가 남성의 생식능력을 떨어트린다'고 적힌 이미지 한 장을 봤기 때문이거든요. 사실 CFO랑은 아무 상관이 없었던 거죠.
이 사태를 지켜본 구매담당자는 새로 부임한 CFO에게 미안한 마음을 느꼈습니다.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적은 없지만 푸근한 인상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기도 했었거든요. 하지만 차마 CFO를 변호할 용기까진 나지 않았어요. '생식능력이 걱정돼서 다른 걸 시켜봤다'라고 동료들에게 어떻게 말할 수 있겠어요?
구매 담당자는 결국 CFO를 변호하는 대신, 조용히 수습하는 길을 택합니다. 일단 이온음료가 다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제로콜라를 시키는 거죠. 사람들은 투덜대면서도 부지런히 탕비실을 들락날락했고, 이온음료도 머잖아 동나긴 할 테니 나쁘지 않은 전략 같아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주, 이온음료 재고가 슬슬 다 떨어질 때쯤의 어느 날. 구매담당자는 퇴근 30분 전에 CFO에게 어떤 자료를 요청받습니다. 그리 복잡한 업무는 아니었지만 데이터들이 흩어져 있어서 시간이 좀 걸리는 일이었어요. 내심 급한 건 아니라고 답해주길 바라며 언제까지 필요하시냐고 물어봤더니 CFO 님 왈.
“그냥 AI 돌리면 5분이면 되지 않아요? 되는대로 바로 주세요”
그날 구매담당자는 CFO가 시킨 자료를 만들다 30분 정도 야근을 했답니다. 자기 딴에는 나름 빠르게 일을 처리했다고 봐야겠지만, 상사가 AI 돌리면 5분 걸린다고 생각하는 일을 한 시간이나 걸려서 했기 때문에 무능한 사람으로 보일 것 같단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 짜증이 난 구매담당자는 메모장을 켜서 뭔가를 적기 시작합니다.
‘이전 직장에서도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던가. 그때도 항상 말도 안 되는 일을 시키고 손이 느리다고 타박했었지. 전 애인은 또 어떤가. 피곤해 죽겠는데도 전화하면서 피곤한 티 조금 냈다고 어찌나 잡도리를 해대던지. 다들 나한테 왜 이래?’
메모장에 휘갈긴 문장들을 다시 읽다가, 구매담당자는 문득 인생이 참 고독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창밖에는 분홍빛 노을이 퍼지고 있고, 잔잔한 재즈 음악이 흐르고 있는 조용한 사무실. 구매담당자의 손이 마우스를 움직입니다. 클릭. 클릭. 클릭. 구매담당자는 제로콜라 대신 이온음료를, 이전에 발주한 수량의 두 배만큼 시키고 퇴근합니다.
그날 밤, 그는 집에서 혼자 맥주를 마시다가 약간 취했고, 집 앞에 나가서 담배를 피웁니다. 꼭 요즘과 비슷한 날씨의 후덥지근한 여름날, 실외기가 열기를 뿜어내는 어느 원룸촌의 골목, 가로등 아래서 담배를 피우는 젊은 남자. 목이 매캐해졌는지 사레가 들린 건진 모르겠지만 기침을 하기 시작합니다. 귀가 중이던 원룸촌의 주민들은 그 켈록대는 덩어리를 멀찍이 피해서 집으로 종종걸음을 치고요. 또다시 뭔가 고독하다는 느낌을 받은, 별 이유도 없이 생식능력을 지키고 싶단 생각을 한, 나름 성실한 직장인인 우리의 구매담당자. 그의 눈가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습니다.
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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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 조절 실패로 뒷 얘기는 풀칠 236호에서 이어서 하겠습니다.
비 소식이 잦은 계절입니다. 출퇴근길 우산 잘 챙기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