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에게 재밌게 본 드라마를 여럿 추천했지만 그는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았다. 드라마는 한 번 보기 시작하면 계속 봐야해서 번거롭다는 게 이유였다. 나는 서운했다. 난 아직 철이 안 들었기 때문에 이런 그의 태도가 사랑일리 없다며 침울 해진다.
지금 애인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침착맨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그를 ‘경이롭게 부지런한 한량’ 정도로 생각했다. 침착맨을 존경하기는 했지만 좋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애인은 침착맨을 사랑했다. 그는 밥먹을 때도, 이를 닦을 때도, 샤워할 때도, 자기 전에도 침착맨의 유튜브를 틀어 놓는다. 심지어 침착맨의 방송을 작게 틀어놓고 ASMR 삼아 잠에 든다. 이건 진짜 사랑이구나. 감히 놀리기도 뭐할만큼 진지한 사랑.
나는 침착맨을 따라 보기 시작했다. 초반에는 힘겨웠으나, 조금씩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사실 침착맨보다는 주호민이 더 좋아졌다. 아무튼 그들의 영상을 이래저래 찾아보면서 애인과도 할 이야기가 더 많아졌다. 하지만 이로 인해, 애인이 내가 추천한 영상들을 보지 않을 때마다 더 서운하게 되버린 것이다. 나는 침착맨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너는 아직도 침착맨만 좋아하고 있구나.
그가 침착맨 말고 좋아하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나무위키다. 악상이 떠오른 작곡가처럼 다른 일을 하다가도 갑자기 폰에 코를 빠뜨리고 앉아있을 때가 있는데, 뭘하나 보면 나무위키를 보고 있을 때가 많다. 나는 그가 잡다한 상식을 많이 알고 있어서 책을 많이 읽는 줄 알았는데, 그게 다 나무위키 덕분이었다.
가끔 나는 침착맨과 셋이 트리플 데이트를 하는 느낌이 들며, 내가 책을 읽을 때 옆에서 나무위키를 보는 그가 못마땅 하기도 했다. 요약해보니, 나는 “나무위키가 취미인 침착맨의 남자”를 만나고 있다.
잠깐 나의 언니 부부 이야기를 하자면, 그들은 웬만해서는 싸우지 않는 커플로 유명하다. 언니는 형부가 K리그를 좋아하는 걸 알았지만 그것을 함께 좋아하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 형부가 거북목을 내밀고 K리그 생중계를 보느라 언니가 식탁을 치우는 걸 돕지 않아도, 언니는 화내지 않았다. 금요일이면 형부는 가끔 만화책방에 혼자가서 만화책을 보다가 밤늦게 들어왔다. 언니는 금요일 밤을 혼자 보냈지만 화를 내지 않았다. 언니에게 “짜증 안나?”라고 물어보면, 언니는 “뭐. 불쌍하잖아”라고 말하거나 “좋다는 데 뭘.”이라고 말했다.
옛날에 어떤 아이돌이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 팀은 “따로 또 같이 지낸다”고. 그 말이 참 좋았는데, 현실은 그렇게 잘 안된다. 나는 공감과 공유에 집착하는 편이라 ‘해방일지’와 ‘기묘한이야기4’와 ‘킬링이브’를 제발 1화라도 봐줬으면 좋겠는데, 욕심이 많으니 포기해야하는 게 많다.
모든 걸 내려놓고 책을 읽는다. 그는 내 옆에서 침착맨을 읽는다. 나는 오랜만에 김승옥의 단편집을 다시 읽었다. 70년대의 천재 작가, 김승옥! 그가 내게 무슨 책을 읽냐고 묻길래. 이, 게으르지만 섹시한 천재 작가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따로 또 같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그가 내게 자신의 폰을 들이민다.
“문학 평론가 이어령은 김승옥이 돈 때문에 소설을 쓰지 못하는 것을 몹시 안타까워 해서 특급호텔인 반도호텔의 방을 빌려서 김승옥에게 내주고, 돈 걱정은 하지 말고 소설 한 편을 완성해달라고 하였다. 김승옥은 비싼 호텔 값과 밥 값을 이어령에게 청구시키는 부담감 때문에 제대로 소설을 쓰지도 못하고 결국 호텔에서 달아나 버렸다. 이어령은 달아난 김승옥을 다시 한 번 통조림하기 위해서 이번에는 장충동 파크호텔의 방을 두 개 빌려놓고, 한 방에는 김승옥이 들어가서 소설을 쓰게 하고, 다른 방에선 이어령 자신이 사실상 발행인으로 있던 문학사상의 편집부장과 편집 기자를 김승옥의 원고를 정리해준다는 명분으로 들어가 있게 해서 김승옥이 달아나지 못하게 감시했다고 한다.”
김승옥님, 이런 구석이 있었군. 나무위키에서 김승옥을 검색한 결과 중 꽤 재미있는 대목이었다. 나의 애인은 나무위키에서 김승옥을 검색해 정독하고 있었고, 나에게 재밌는 부분을 보여준 거였다. 나는 김승옥 작가의 후일담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그냥 그의 세련된 작품과 천재라는 아우라로 좋아해왔을 뿐이다. 나의 애인이 나무위키에 살고 있지 않았더라면. 않았더라면. 몰랐을 이야기. 나무위키는 매우 쓸모가 있구나.
나는 우리가 ‘따로 또 같이’의 정점에 다다랐다고 느꼈고 그에게 “아주 좋았어”라고 엄지를 올려보였다. 나의 애인은 무표정하게 “다음에 나도 그 책 빌려줘”라고 말했다. 나는 그가 절대 책을 읽지 않을 것을 알지만 그래도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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