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너의 수수께끼 💌 우.시.사 레터 8회 (2021.06.09.) 안녕하세요? 시 쓰는 박연준입니다. 얼마 전 저희 집에 고양이 한 마리가 오게 되었습니다. 단골 카페 사장님이 구조한 흰 고양이고 이름은 당주, 나이는 한 살(추정)입니다. 요새 밤마다 당주에게 시를 읽어주고 있는데요, 제 방에 오래 머물게 하고 싶은 마음에 방문을 살짝 닫고 조명을 아늑하게 하고 적당한 시를 골라 읽어주었지요. 이 말을 전해들은 친구가 그러더군요. “야, 너 그게 ‘미저리’야. 문 닫아놓고 글 읽어주는 거.” 흠흠. (그런가요?) 당주는 시를 좋아하는 듯 보입니다. 눈을 감고 듣더군요. 그러나 제가 두 편을 읽고 나면 볼일 다 봤다는 듯 일어나 문 쪽으로 갑니다. 초보 집사가 문을 열어주면 “밤의 파수꾼”(네루다)처럼 총총, 당주는 다른 데로 떠납니다. 당신에게도 시를 소리내어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네요. 곁에 반려동물이나 반려식물, 반려사람이 있다면 자기 전에 두 편씩 읽어줘보세요. 혹시 모르죠. 눈을 감고 즐길지도요. 💚 박연준 시인이 사랑하는 첫번째 시 머리가 셋 달린 개(김복희, 『희망은 사랑을 한다』) 더이상은 안 되겠어 이렇게 말하고 일어날까 목이 아프다 등도 모르는 사이에 머리가 두 개 더 자라나서 감당하기 어려워하는 것 같다 어쩐지 요즘 스킨 로션이 빨리 닳고 배가 부른데도 입이 계속 고팠다 새로 난 머리 두 개가 지금 키스라도 나누고 있나 가끔 사람들이 뚫어져라 내 머리를 본다 사실 나는 지옥에서 온 개인데 너희들이 지옥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지옥을 지켜주고 있는 건데 세번째 머리가 좀 심약해서 너희들과 눈을 못 마주치고 있는 것뿐인데 머리 중 하나는 몰래 매일 지옥문을 열어본다 꼭 닫힌 문을 보면 꼭 가서 살짝 종이를 끼워둔다 비가 내리는 세계 그 구름 위 구름 아래 발밑 비가 내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 영원히 비가 오지 않는 곳이 있다 크게 짖어도 돌아오는 소리가 없고 열지 못하는 문이 있을 것이다 내가 지키는 문 내가 주인은 아닌 문 몸 지옥의 내부 지옥이 무너지고 난 후 지옥에 깃들었던 문틈을 본다 누군가 꿈같이 종이를 밀어내어 문밖으로 종이를 조금, 밀어내놓은 것이다 개 주인이 보고 가장 먼저 본 머리가 먹어, 그런다 그걸 시라고 피부라고 부르기도 한다 시인의 감상💡 이상한 생각을 이상한 구석 없이 펼쳐놓은 시입니다. 시 앞에서 제 머리는 두 개도 됐다 세 개도 됐다 캄캄하게 사라지기도 합니다. 지옥에서 온 개가 나라면, 지옥과 지옥 아닌 곳 사이가 나라는 틈이라면! 세상에 확실한 게 있을까요. 머리가 하나둘 새로 돋아나는 아침, 몸의 주인이 나는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며 밥 먹는 점심. 맞는다고도 틀리다고도 할 수 없는 ‘생각’ 앞에서 기분만 생생하게 피어나는 저녁. 이 시집에 수록된 모든 시가 다 좋아서 책갈피에 부리를 박고 쪽쪽 빨아먹고 싶습니다. 무엇을? 모르죠. 아무튼 빨아먹고 싶은 게 가득한 시집입니다. 부리를 종이에 박고 부리만 살아, 부리로 울고 싶군요. 물기 하나 없이 바스락대며 울고 싶어요. 건조한 가운데 물 없이 울기. 이 시집은 그런 시집입니다. 새로 알게 된 건 “지옥에 깃들었던 문틈”, 문밖으로 밀어내놓은 종이를 먹은 게 주로 나였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아니고 나 같은 나, “가장 먼저 본 머리”로서의 나였다는 것. 피부호흡을 하는 개구리처럼 온몸이 젖은 “세번째 머리”로서의 나 말예요. 당신은 오늘 머리가 몇 개인가요? 피부호흡은 할 만한가요? 물어보고 싶은 날입니다. 💘 막간 우.시.사 소식: 피드백의 피드백 이번 레터에서는 그간 여러분이 남겨주신 피드백을 정리했습니다! 🙂 좋았어요 "아침을 시작할 때, 때로는 활력을 주고 때로는 위로를 줍니다. 매번 기다려져요." "시가 어려웠는데, 지금은 예전보다 많이 친해진 기분이 들어요." "때로는 시보다도 들려주시는 이야기들이 참 재밌어요."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던 것을 깨어줍니다." : '시가 어려웠지만 지금은 애정과 재미를 느끼게 되었다'는 피드백이 많이 보였습니다. <우리는 시를 사랑해> 레터를 시작하게 된 계기와도 맞닿아 있는 것 같아서 무척이나 보람찼습니다! 시를 함께, 또 따로 읽으며, 그 순간의 즐거움과 행복을 오래오래 가져가셨으면 좋겠습니다. 🧐 아쉬워요 "메일 레이아웃이 좀더 정리되면 좋겠어요." "웃음이 가득한 코너를 넣어주세요." "발행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지켜보겠습니다." : <우리는 시를 사랑해>는 여러분의 소중한 피드백으로 성장한답니다. 남겨주신 많은 제안과 조언을 들으며, 어떻게 하면 더 좋은 레터를 만들 수 있을까 매주 고민하고 있어요. 앞으로도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드릴게요. 오늘의 레터도 끝까지 읽어주시고, 피드백 남겨주세요! 💚 박연준 시인이 사랑하는 두번째 시 더 둥글고 더 예뻤다―J에게(김복희, 『희망은 사랑을 한다』)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도 나란히 걸었다 숲에 간다 숲에 와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기대기도 했다 너무 멀어서, 멀어서, 참 많이 멀어서 납골당에 가지 않았다 숲이 끝나지 않으면 숲에서 네가 또 죽겠구나. 나는 생각보다 피도 눈물도 없는 것으로서 너에게 내 시를 못 보여줬구나. 그런 소리를 조그맣게 떠올렸다 기왕 떠오른 것이니까 뭉쳐서 동그랗게 만들었다 숲의 나무들을 피해 잘 굴러다닐 티없이 둥글고 작은 공 굴렸더니 네가 공을 도로 내게 굴려주었다 시인의 감상💡 이 시를 심상하게 턱을 괴고 읽다 그만 눈물이 솟아났습니다. 아시나요? 눈물은 맺히기도, 흐르기도 하지만 솟아나기도 한다는 걸. 눈 안에 솟은 묽은 산이여. “숲이 끝나지 않으면/ 숲에서 네가 또 죽겠구나.” 이 대목을 읽는데 갈비뼈 안쪽이 아팠습니다. 묵혀둔 감정이 저격당한 기분이었어요. 죽은 사람도 여러 번, 새로 죽을 수 있습니다. 숲을 걷다, 샤워를 하다, 횡단보도의 신호를 기다리다 일어나는 일이지요. 당신 또 죽었네, 참 잘 죽는구나 생각하죠. “너무 멀어서, 멀어서, 참 많이 멀어서 납골당에 가지” 않는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납골당에 간들, 그렇게나 멀리 가 있는 사람을 어떻게 만나고 올까요. 어떻게 만날 수가 있습니까? 먼 데를 생각하는 건 어렵고, 죽은 사람이 굴리는 공을 이쪽에서 받는 일은 조금 쉬울지도 모르죠. 죽은 사람과 자주 대화합니다. “너에게 내 시를 못 보여줬구나.” 얘기하죠. 죽음은 소문뿐이라서 누구도 그 실체를 완전히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봅니다. 공을 굴리면 이쪽으로 다시 굴러오는 공. 그렇군요. 그런가봅니다. 💖 다음주 시믈리에를 소개합니다 ![]() 다음주 <우리는 시를 사랑해> 시믈리에💛 독자 이예림님 다음주 아름다운 시 두 편을 추천해줄 분은 바로 시를 사랑하는 독자 이예림님입니다. 그럼 모두, 다음주 수요일에 만나요! 오늘의 레터는 어떠셨나요? 오늘의 레터는 어땠는지, 어떻게 보완되면 좋겠는지, 여러분의 솔직한 의견을 들려주세요! 👉 피드백 보내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