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안녕하세요. 고양이 물루, 올리버와 함께 살고 있는 송섬별입니다. 제가 좋아하고, 또 같이 읽고 대화하고 싶은 책들을 번역하는 일을 하고, 꾸준히 여성, 성소수자에 관한 책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조카가 생긴 뒤로는 어린이책 번역도 하고 있습니다. 『페미니즘들』을 번역할 때는 엄청난 시간이 걸렸고, 또한 초고는 상당히 거칠었는데, H 편집자님과 상의하고 고치는 과정에서 너무나 큰 도움을 받아 아직도 감격스러운 기분입니다.
캠: 책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이 질문부터 드려야 할 것 같아요. 올해만 벌써 9권의 역서가 출간되었어요. 1월에 오드리 로드의 『자미』를 시작으로 『페미니즘들』이 딱 10번째 책이에요.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거죠? 괜찮으신 건가요?
별: 안 괜찮습니다! 아시다시피 작업한 책이 출간되기까지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기약 없이 수년의 시간도 걸리기 때문에 (당연히) 올해 10권의 책을 옮긴 것은 아닙니다만, 8월 말인 지금까지 쉬지 않고 일하기는 했습니다. 꼭 그렇게 많은 책을 만들기로 작정한 것은 아니고요, 지난해 건강 문제로 쉬어가는 구간이 생기면서 밀린 원고들을 쳐내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짧은 시간에 많은 작업을 해내며 여러 어려움도 많았고, 출판사와의 약속이 틀어지는 일도 많았지만, 저의 한계를 알고 ‘다시는 이렇게 하지 말아야겠다’는 배움을 얻기는 했습니다.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요. 올해 만든 책들 중에서 가장 긴 시간을 들인 책 중 하나인 『페미니즘들』도 출간되었으니 잠시 푹 쉬고, 앞으로는 적은 책과 조금 더 깊고 넉넉한 관계를 맺고 싶어요. 미뤘던 저와 고양이들의 건강검진도 하러 가고요.
캠: 네, 꼭 그러셨으면 좋겠네요. 요즘도 수영을 하시나요? 선생님이 예전에 제게 수영을 추천하면서 그것을 일종의 애도와 같은 행위로 설명하셨던 게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여전히 그런가요?
별: 이 질문지를 열어보기 전에 마침 자유수영을 하고 온 참입니다 :) 언젠가 편집자님께 말씀드렸던 것처럼 애도와 슬픔의 기간에 시작한 수영은 여전히 물속에 뛰어들 때마다 승화(!)의 느낌을 주긴 합니다만 수영 실력이 조금씩 늘면서 점점 더 순수한 기쁨과 가까워지고 있어요. 무엇보다도 물속이 조용하기 때문에 온몸의 근육을 쓰면서도 깊이 쉬는 기분이 들어요. 게다가 수영은 온몸의 근육을 움직이는 일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누워 있는 자세이기 때문에 누워 있는 걸 좋아하는 저한테 잘 맞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요즘은 잠영을 좋아하는데, 실제로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고작 이 정도인가 싶은 거리를 움직여 가는 것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무한한 시간 속에서 저항이 최소화된 아주 조용한 세계를 빠르게 헤치고 지나가는 기분입니다. 당장은 무호흡으로 잠영 50m에 성공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속도에 개의치 않고 산책하듯이 멀리 가보고 싶습니다!
캠: 두 고양이 물루와 올리버는요? 그들도 잘 지내고 있지요?
별: 며칠 전에는 9시에 집필실(집에서 일하고 있습니다)로 출근해서 점심을 먹고 6시까지 일했는데, 고양이 올리버가 제 출근 시간에 책상 위로 올라온 뒤 제가 퇴근할 때까지 쉬지 않고 코까지 골며 자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풀타임 근무를 완수한 모습이 당당해 보였습니다. 고양이 물루는 17세인데, 제가 아는 노년 고양이 중에 가장 건강하고 활기찹니다. 둘 다 고양이로서의 삶을 만끽하며 즐겁게 지내고 있어서 인간 동료로서 배울 점이 많습니다.
캠: 시계를 잠시 거꾸로 돌려보아요. 이 책을 검토하신 게 2021년 1월이에요. 저는 이 책의 출간 의의랄까, 뚜렷한 특장점을 ‘지구사’라는 이 책만의 관점으로 보았고, 원고를 정독한 선생님은 “주제별 구조에 힘입어 강력해지는 스토리텔링”이라 말씀하셨어요. 한마디로 잘 쓴 글이라는 거였죠. 이 책의 첫인상을 다시 떠올려본다면요?
별: 저 역시 대학교 여성학 시간에 ‘물결들’로 시작하는 페미니즘 강의를 처음 들었고, 부끄러운 일이지만 서구 페미니즘의 ‘얼굴들’이 익숙한 것에 비해 아시아 페미니즘의 흐름에 대해서는 무지에 가까웠습니다. 『자미』처럼 아프리카계 미국인 저자의 책을 번역하게 되는 순간이 오면 황급히 흑인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식으로 임시변통하며 어느 시점엔 조금 더 공부를 해야 한다는 걸 숙제처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페미니즘들』은 검토하는 순간부터 저에게 필요한 그 책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한국어판 제목도 그렇고 원제 또한 Feminisms로 복수형인데, 복수형은 언제나 흥미를 자극합니다. 단순히 우리에게 계보와 갈래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을 넘어서, 페미니즘들이 지구상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벌어지는 사건들이고, 그렇게 큰 그림을 완성했다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허물어지고, 일부는 재사용되는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모자이크에 가깝다는 것이 흥미로웠어요. 시간순이 아니라 주제별로 분류한 챕터들 또한 책을 중간부터 읽기 좋아하는 저에게는 긴장감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였기에 아마 “강력한 스토리텔링”이라는 표현을 썼던 것 같습니다. 검토서 마무리를 기차 안에서 했던 기억이 나는데, 기차에서 내리기 전에 빨리 추천해드려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캠: 다시 한번 고생 많으셨습니다. 내용에 대한 이야기도 조금 해볼까봐요. 저는 감정을 다루는 6장에서, 특히 ‘분노’에 대한 이야기를 인상 깊게 읽었어요. 발을 동동 구르게 되는 심정으로 말이에요. 그것이 파괴적인 감정일 수 있지만 바로 그러한 감정이기 때문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 크게 와닿더라고요. 선생님은 어떤 부분이 가장 인상 깊으셨나요? 이 장만큼은 꼭 읽길 바라는 부분이 있다면요?
별: 6장 「감정」은 쉽게 화를 낸다거나 감정적인 것에 연연한다 등 여성의 감정 운용을 둘러싼 비난에 맞설 기운을 주어서 시원한 기분이 들었어요. 저는 오드리 로드의 ‘성애적인 것’에 대한 글을 참 좋아하는데, 『페미니즘들』의 6장에도 성애의 힘을 마가린 덩어리를 만지는 것에 비유한 로드의 글이 인용되어 있어요. 아마 저희와 마찬가지로 6장에서 독자들이 공감할 부분이 많지 않을까 합니다.
이 책에는 한국의 상황을 언급하는 부분이 두 곳 나오는데, 하나는 1970년대 여성 노조위원장 선출로 벌어진 동일방직 사건, 또 하나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수요시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짧지만 한국 여성들의 투쟁을 다루고 있는 만큼 함께 읽으면 좋겠어요.
여담을 덧붙이자면 저는 개인적으로 물욕이 큰 편이고 페미니즘/퀴어 행사에 참석할 때마다 상징색과 상징물을 이용한 배지나 캔버스백 같은 ‘굿즈’를 사고 싶은 욕망을 거의 자제하지 못합니다. 특히 여름에 열리는 행사에서는 슬로건이 쓰인 부채를 많이 나누어 주는데 왠지 그 부채로 바람을 일으키면 힘이 생기는 것 같아서 부채가 부족해질 일이 없네요. 그러면서도 ‘굿즈’에 엮일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와의 영합에 마음이 불편해지기도 하고요. 그렇기에 가장 흥미롭게 읽은 장은 물건들이 어떻게 페미니즘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때로는 잘 팔리는 ‘미끼 상품’으로 쓰이기도 했는가를 알려주는 4장 「사물」이었습니다.
캠: 약 3세기에 걸친 시간 속에서 지구 곳곳의 인물들이 나오는 만큼 작업에 여러 어려움도 있었을 것 같아요. 아무리 저자가 쉽게 썼다고 하더라도 말이에요. 번역하면서 특히나 고심했던 점이 있을까요?
별: 제게는 생소한 내용들이 많아 공부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너무나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페미니즘들』을 번역한 일이 저에게는 공부이기도 했으니 이 공부를 앞으로의 작업에 잘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역자 주나 첨언을 어디까지 다는 것이 좋을지 고민했어요. 글의 흐름을 해치거나 불필요한 과잉 정보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요. 이런 고민들은 오월의봄 편집자 선생님과 상의해 필요한 부분에 적절히 넣을 수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번역자로서보다 페미니스트 개인으로서 느끼는 ‘여성’이라는 범주, ‘여성운동’의 한계에 대한 고민이 작업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졌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고민은 책을 읽은 독자분들과도 자연스레 나누게 될 것이고, 또 저 역시 독자들의 생각으로부터 배움을 얻어야 할 고민이니 혼자 해결하려 열심히 애쓰지는 않았습니다.
캠: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스크롤바가 너무 짧아질 듯하니 이쯤에서 슬슬 정리를 해야겠어요. 사실 저희가 이 책에 따로 옮긴이 후기를 싣지 않았잖아요. 이 자리를 기회로 짧게라도 독자분들께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주세요.
별: 지난 200여 년의 페미니즘 지구사를 다루는 엄청난 책을 제가 번역해도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지만, 이미 해버렸고(!) 많은 분의 힘으로 책이 완성되어 나왔으니 천천히, 즐겁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어요. 분량이 적지 않은 책이고, 담겨 있는 이야기는 더 많지만, 시간과 공을 들여 읽을 보람이 있는 책입니다. 이 책이 서로에게 힘을 불어넣는 대화의 장을 열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