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으로 몸을 칠한 ‘행복한 왕자’는 작은 도시 광장의 가장 높은 곳에 서서 골목골목의 가난한 이들을 발견하고는 이들에 대해 ‘측은지심’을 갖게 된다. 그는 남쪽으로 가던 제비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손과 눈에 박힌 보석뿐 아니라 자신에게 칠해진 황금까지 벗겨 사정이 딱한 민중들을 도왔다. 가난한 이들이 너무 많아 너무 여러 번 돕다보니 왕자는 칠이 다 벗겨져 흉물이 되었다. 왕자의 동상은 철거되고, 제비는 겨울이 오자 얼어 죽는다. 19세기 후반 영국 작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의 동화 <행복한 왕자> 이야기다. 흥미로운 장면은 왕자가 돕는 가난한 민중 중에 글쓰는 작가도 있다는 점이다. 작가가 추위와 배고픔으로 글을 쓰지 못하자 행복한 왕자는 자기 눈에 박힌 보석을 떼어 그에게 주었다. <행복한 왕자>가 나온 19세기 말이나 지금이나 인문학 연구자(작가로 표상되는)는 아직도 ‘배고픈 선비’로 표상되어야 하는가? 아직도 불확실한 ‘자선’에 기대야 하는가? 그러니 국가의 학문적 책임성을 검토해 보자.
이 달 초 2026년 국가 R&D예산안이 발표되었다. 전체 R&D에서 인문사회 계열이 차지하는 비율이 1.2%(2025년)에서 0.93%(2026년)로 오히려 축소되었다. 절대 금액 자체는 2025년 2,996억 원에서 2026년 3,286억 원으로 289억 원(9.7%) 늘었지만, 비율이 줄었다는 것은 인문사회학술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갖게 한다. 정책입안자뿐 아니라 일반 대중들에게조차 인문사회과학에 대한 한국사회의 가치 평가는 냉혹한 듯하다. 인문사회과학은 더 이상 전공이나 연구까지 할 필요는 없고, 단지 유튜브의 교양동영상을 통해서도 습득가능하다고 여겨지는 듯하다. 몇 년 전 윤석열 전 대통령이 "인문학이라는 건 공학이나 자연과학 분야를 공부하며 병행해도 되는 것"이고 "많은 학생들이 대학 4년과 대학원까지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 것은, 한국사회의 상식적 견해가 아니라고 부정하긴 어렵다. 이런 사회적 가치평가 체계 변화 속에서 이제 인문사회 연구자들은 자선(즉 정부지원)조차 요구하기가 머쓱해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쟁점을 ‘인문사회학술 생태계’로 전환해야 한다. 배고프고 추워서 지원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학술생태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요구해야 한다. 생태계를 위한 지원을 방해하는 가장 큰 이데올로기는 능력주의(meritocracy) 같다. “소수의 탁월한 연구자에게 몰아주자”는 사고방식. 능력주의의 주요 발원지는 ‘대학’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수직적 ‘대학서열체제’와 신자유주의 대학구조조정 시기에 부상한 ‘연구중심대학’ 모델이 부상하면서, 한국 대학은 연구를 뛰어나게 잘하는 연구자를 중심으로 이들에게 자원을 ‘몰아주는’ 시스템을 지향하고 있다. 정부의 ‘선택과 경쟁’에 기반한 지원 방식은 이를 부추긴다. 진영 대결에 몰두하는 보수정권과 진보정권 모두 이 선택과 집중에 대한 신앙은 놀랍게도 동일하다. 최근의 ‘서울대10개 만들기’도 일단 3개 학교부터 선택과 집중으로 선정한다고 하니, 이건 분명 신앙이 맞다. “뛰어난 학자가 보상을 많이 받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고 누군가는 반문할 수 있겠지만, 실상을 벗겨보면 ‘논문수’가 논문의 질을 압도한다면 충분히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 할 수 있을 것이다. 논문수가 학문적 능력의 표상이 되는 것은, 마치 ‘시험점수’가 능력의 표상이 되는 것과 유사한 것 아닐까? 인문사회과학의 많은 분야가 연구자가 너무 적어 동료평가조차 불가능한데 무슨 능력에 대한 평가가 가능하단 말인가. 이처럼 논문수 중심의 능력주의가 지배하면서, 논문의 수보다는 책이라든가 단 몇 편의 논문이 매우 중요한 인문사회과학의 고유성이 사라지고 있다.
능력과 탁월성만을 추구하는 것이 학술생태계에 방해가 되는 점이 정말 없을까? 실제로 유능하고 탁월한 학문후속세대들은 대학 내 일자리 부족으로 연구를 지속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단지 능력주의는 이제 교수사회를 정년트랙 교원/비정년트랙 교원/강사 및 연구교수 간의 신분적 계층화와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하고 있는 듯하다. 지난 20여년간 대학의 기초학문 구조조정이 이루어져왔고, 후속세대 재생산이 어려운 현실이다. 생태계가 이처럼 고사하고 있는 상황에서 소수의 잘 나가는 학자가 있다한들 장기적으로 얼마나 더 성과를 낼 수 있겠는가. 후속세대의 재생산조차 어려워지는데 자신의 그 학문을 계승할 수 있는 후배들이 연구하기를 주저한다면 무슨 의미인가. 진부한 비유지만, 커다랗고 우거진 나무 몇 개만 잘 자라고 주변에 수풀이나 다른 나무들이 점점 사라진다면 제대로 된 숲 생태계를 형성할 수 없다. 그러니 이제는 인문사회학술 생태계를 최우선적으로 걱정할 때이다. 대학에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대학 외부에서라도 연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길은, 대학 내 학과 체계만 바라보지 말고 연구재단이 수년간 다듬어온 ‘인문사회학술연구교수 A,B’ 사업을 우선순위를 두어 확대하고 내실화하는 것이다. 이 사업은 이미 안정적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예산만 대폭 증액한다면 인문사회 학술생태계를 고사하지 않도록 방어하면서 인문사회과학 후속세대들의 재생산에 기여할 것이다.후속세대들은 그래도 최소한의 안전망은 있다는 생각에 대학원에 진학하고 연구에 인생을 거는 이들이 늘어날 것이다. 마치 이공계 후속세대에 지금 대대적인 투자를 시도했듯이 말이다. 일단 연구자들만 버틸 수 있다면, 대학도 그 혜택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