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뭐 할 거야?”라는 질문을 100번 정도 받으며 오래 다니던 단체에서 퇴사를 했다. 신기하게도 “뭐 하고 싶어?”라는 질문을 한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했다. “나는 뭐 하고 싶니?” K장녀이자 가난한 비영리단체 종사자에게 그런 질문은 가장 낯설고도 곤란했다.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 하는 일, 할 수밖에 없는 일에 몰두하는 데 익숙했으니까.
그 무렵 오래 알고 지낸 50대 남성 K와 대화를 하게 되었다. 그도 역시 “다음 스텝은 정해졌어요?”라는, 익숙한 질문을 던졌다. 그는 “아직”이라고 대답하는 내게 뜬금없이 말했다. “페미니즘 운동을 해보는 건 어때요?” 예상치 못한 훅이었다. 그는 페미니즘과 거리가 먼, 심지어 싫어하는 쪽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셨냐고 물었다. 대답은 간단했다. 나는 페미니즘을 잘 모르고 별로 안 좋아하지만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당신이 하고 싶어 하는 것 아니었냐고.
필요한 일.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일. 그 말이 부담은 되었지만, 격려가 되었다. 그러나 그 대화는 곧 잊혔다. 그로부터 딱 1년 후 미국에 있는 서소영 님과 페미니즘과 퀴어, 소수자 운동을 전면에 내세운 기독교 운동의 필요성에 관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퇴사 후에도 여전히 ‘해야만 하는 것들’에 둘러싸여 있던 내 마음에 ‘필요와 바람’이라는 씨앗이 날아와 박혔다. 아직 이름조차 붙여지지 않은, 태어나는 데 성공할지도 가늠할 수 없는, 타래의 시작이었다.
“타래를 언제부터 구상했나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아마도 지난겨울 이야기부터 할 것이다. 서소영 님과의 깊고도 솔직한 대화, 대학원 졸업을 앞둔 배지은 님에게 앞으로 뭘 하고 싶냐고 질문했을 때 “기독교 페미니즘 운동을 하고 싶다”는 말을 듣고 심장이 두근거렸던 날, 그리고 세 명이 처음 온라인으로 만난 날.
그러나 그것만으로 타래의 시작을 다 말할 수는 없다. 짧게는 강남역 여성 혐오 살인 사건 이후 사회적으로 중요한 화두가 된 ‘페미니즘’ 의제들, 기독교 영역에서 발랄하게 튀어나온 믿는페미와 갓페미와 같은 대중운동들 속에 이미 타래가 있었다. 길게는 남성 중심 성서해석 일변도의 기독교 생태계에서 여성신학을 올곧게 붙들어 온 여성 연구자들, 남성 중심 구조에서 여성 목사 안수 운동을 전개하고, 호주제 폐지 운동과 노동 운동 등을 박력 있게 해온 언니들의 눈과 입, 손과 발에도 타래가 포개졌다. 긴긴 세월 동안 여성과 퀴어, 소수자들의 몸에, 눈물과 분노에, 속 깊은 연대 속에 타래는 존재했다. 그러므로 타래는 새로운 단체이지만, 아주 오래된 이름이기도 하다.
“타래에 누가 함께하나요?”라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타래를 처음 구상한 3명과 타래의 처음을 함께 만들어갈 운영위원들과 전문위원들에 관해 길게 자랑을 할 수 있다. 도대체 뭘 믿고 함께하자는 말에 선뜻 손을 잡았는지 신기할 정도로 이상하고도 멋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래는 보다 ‘많은’ 사람들의 총합이기도 하다. 교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퀴어와 소수자들, 교회를 떠받치면서도 늘 뒷자리에 있던 여성들, 차별과 혐오를 신앙의 이름으로 듣다가 조용히 교회를 떠난 청년들이 ‘타래들’이다.
누군가는 “굳이?”라는 의문을 타래의 출발점 앞에 놓고 싶을 것이다. 그러게. 이미 많은 단체들이 있고, 사회 운동들이 하나둘 문을 닫는 요즘, 타래가 굳이 태어날 이유가 뭘까? 페미니즘을 별로 안 좋아한다던 K조차 필요한 일이라고 했던 걸 떠올려보면, 가부장제의 마지막 보루처럼 버티고 선 교회, 차별과 혐오의 격전지가 된 교회 안팎에 지금 가장 필요한 언어는 페미니즘이 아닐까. 그리고 우리에게는 이 주제를 깊이 있게, 그러면서도 넉넉하게 이어갈 공간이 필요하다. 그러니 타래는 몇몇의 바람이 잠깐 우연히 만나 생긴 일이 아니라, 오랫동안 쌓여온 많은 이들의 필요와 바람이 끝내 만들어낸 일이다.
타래를 준비하면서 나는 다시 하고 싶은 일을 하나씩 상상해보는 사람이 되었다. 타래를 기다려왔다고 말하는 이들도 만난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타래가 오래 기다려온 반가운 자리가 되면 좋겠다. ‘나’의 이야기에 주목하고, ‘우리’의 이야기를 만나고, 뭐라도 함께할 거리를 발견하는 곳으로 타래를 마음껏 써먹으면 좋겠다.
물론 쉽지 않은 길이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면, 타래 하나를 시작하고 이어가는 데도 사람과 자원, 그리고 함께 엮을 이야기가 필요하다. 타래는 완성형 운동이 아니다. 많은 ‘타래들’과 함께 이유를 만들고 쓸모를 발견하며 굴러가는 동안 만들어질 운동이다. 그러니 부디 함께 모여 와글와글 발랄하게 타래를 키워주시길. 오래오래 함께 엮여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