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어 공부를 해야겠다 싶었다. 프린터를 샀다.
2. 내가 필요한 건 흑백 프린터. 컬러일 필요는 없다. 어차피 텍스트만 뽑을 거니까. 영문을 읽고 해석하는 작업을 통해 영어 실력을 늘려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맘먹은 영어 공부는 아니다. 대학생 때부터 원어민처럼 영어를 하고 싶어서 필리핀으로 6개월간 어학연수를 갔고, 연수를 다녀와서는 외국인 친구를 사귀기 위해 이태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정도였으니까.
3. 얘기가 갑자기 또 산으로 가는데, 필리핀 연수 덕분에 영어 실력이 정말 많이 좋아졌다. 36년의 인생 중 가장 영어를 잘하던 시기였다(PPL 아니구요). 그 학원은 모놀어학원이라는(모놀 인스티튜트) 곳인데 필리핀 바기오에 있는 스파르타 학원이다. 바기오는 한국으로 치면 강원도와 비슷하게 산이 많은 지역. 근처에 놀만한 곳이 없어서 스파르타 학원을 차리기엔 최적의 위치라 할만하다. 스파르타 학원은 기본적으로 한국어와 외출을 제한하는 '빡센' 학원이다. 안 그래도 빡세게 공부하는 한국인들이 더 빡센 스파르타 학원을 찾아간다는 게 지금 생각해 보면 좀 웃기고 애잔하기도 하다. 우리는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
4. 그럼에도 스파르타 학원에 가면 여러 유형의 학생들이 모이기 마련이다. 절대로 한국어를 쓰지 않는 그룹이 형성되고 그들은 감시하는 선생이 없을 때도 당연히 영어를 쓴다. 학원 첫날 룸메이트 형은 식당에서 그들을 보며 "저렇게 공부하는 게 맞아."라고 말했다. 3개월쯤 다녔다는 그 형은 그 말을 한국어로 말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럼 너도 그렇게 하든가'. 대부분의 학생들은 어느정도 친한 친구들을 사귀고 수업 시간 외에는 당연스레 한국어를 쓴다. 그러다가 저녁 수업이 끝난 후에는 휴게실에 모여 다 같이 <무한도전>을 다운받아 보고(10년 전 이야기다), 주말에는 삼겹살을 먹으러 나간다. 나는 두 그룹의 중간 정도에 있었다. 영어 실력 향상에 필사적이었기에 노는 걸 자제하고 매일 밤 공부를 했다. 적당히 친구들과 모여 술도 마셨다. 하지만 삼겹살은 한 번밖에 먹지 않았다.
5. 삼겹살보다는 필리핀 전통 음식을 취급하는 술집에서 파는 버터치킨을 더 좋아했고(이때도 나 치킨 좋아했네?), 판데살을 좋아했다. 판데살은 필리핀식 모닝빵인데 아침 일찍 판데살을 사는 사람들이 베이커리에 길게 줄을 선다. 갓만든 빵은 다 맛있지만 판데살은 유독 맛있다. 한국에서는 파는 곳이 없는 듯하다.
6. 또 갑자기 산으로 가는 얘기를 하자면, 연수가 끝나고 한국에 오니 영어 실력이 급속도로 안 좋아짐을 느꼈다. 외국어를 쓰는 일상이 필요했다. 그래 외국인 친구를 사귀자. 외국인이 많은 이태원으로 가자.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자. 알바몬에 검색을 해보니 '이태원 알바' 키워드로는 괜찮은 게 없었다. 무작정 이태원으로 가서 걸어 다니며 '알바 구함'이라고 적혀 있는 곳을 찾았고, 알바를 구하지 않아도 일하고 싶은 가게면 들어가서 물어봤다. "혹시 알바 필요 없으세요?" 스파르타 학원 졸업생다운 패기가 아닌가.
7. 그렇게 이태원역 근처에 있는 CU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됐다. 8개월 정도 일했던가. 여기서의 에피소드가 재밌는 거 많은데 다음에...
8. 근데 꼭 나는 다음에 한다고 하면 안 하기 때문에 지금 해야겠다.
9. 확실히 외국인 손님이 4할이었다. 거기까지는 예상 적중이다. 하지만 문제는 영어 실력. 말을 걸고 친구가 될 정도로 잘하진 못했고, 나는 내향인이었던 거다. 대부분의 외국인은 편의점에 들어와서 필요한 물건을 사거나 내가 찾는 물건이 어디 있는지 묻고 계산하고 나갔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대화를 이끌 자신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웨얼 아 유 프롬부터 물으면서 두유 노 손흥민까지 이어지면 될 거 같은데 좀 부끄러웠다 보다. 이태원 영어 천재 프로젝트는 허무하게 이렇게 끝.
10. 나에게 먼저 친근하게 대화를 건 사람은 두 사람 있었다. 한 사람은 동남아쪽 계열로 보인 남자였고, 내게 번호를 물었다. 친구가 되고 싶다고 했다. 다른 한 사람은 60대쯤 되는 한국인 남자였는데 방금 나간 그 동남아 사람은 게이니까 알고 있으라고 했다. '게이니까 조심해' 이런 뉘앙스라기보다는 '너 친구 사귀고 싶은 거 내가 아는데 그 사람은 너를 친구로 생각해서 번호를 물은 건 아닌 것 같으니까 알고 연락해.'라는 뜻이었다. 어르신의 직업은 번역가로 츤데레 같은 스타일의 단골이었다. 번호를 준 날 밤 11시에 문자가 왔다. "석준, 오늘 밤 뭐해?"
11. 아무튼 프린터를 샀다. 네이버 쇼핑에서 검색하면 40만 원쯤하는 프린터인데 당근에서 4만 5,000원에 구했다. 잘해보자.
12. 이번 주말에 먹기 좋은 음식 하나 추천해야겠다. 식당 하나, 밀키트 하나, 전통주 여러 개 추천한다. 우선 식당은 서울숲 근처에 있는 '오스테리아 파로'. 생면파스타와 내추럴와인을 파는 곳이다. 블루리본, 미쉐린가이드, 생생정보통 등 어디에서 소개되지 않았지만 모든 메뉴가 다 맛있었다. 큰 테이블이 있어서 8명쯤 모여서 시끌벅적하게 모이기에도 좋다. 나는 시칠리아 한달 살기 멤버들과 함께 방문했는데 여기가 이탈리아인가 싶었다. 네이버 예약도 가능하다. 링크는 [여기]. 일식을 원한다면 성수동의 우리마키 성수점도 좋다. 비싸지 않고 맛이 좋으며 배부르다. 단점은 웨이팅이 분명히 있다는 것. 밀키트는 까탈로그에서도 소개한 적 있지만 카라멜 밀키트 3종이다. 생면파스타이며 반드시 3종을 다 시켜야 한다. 링크는 [여기]. 전통주는 '전통주계의 아이돌' 너드브루어리에서 만든느 너디호프 추천한다. 바질향이 솔직한 매력적인 막걸리다. 링크는 [여기]. 그리고 맑은술이 땡긴다면 제주곶밭 양조장의 만다린 약주를 추천한다. 약주의 곡물향과 만다린의 상큼한 향이 잘 어울린다. 비슷한 약주로는 고흥유자가 유명한데 개인적으로 만다린 약주가 더 맛있다. 링크는 [여기].
p.s. 나의 일, 남의 일에 대해 얘기해보는 오프라인 모임을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에디터, 개발자, 마케터, 디자이너, 기획자 등등 다양한 회사의 다양한 직군의 사람들이 모여 발전적 토크를 하며 세계에 대한 이해를 넓혀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낫뱃다이너 모임 1기가 될 것 같아요. 그러니 당연히 맛있는 음식도 먹겠죠. 구체적인 기획이 나오면 또 공지하도록 할게요(현생이 바빠서 언제가 될지는 모름). 모임에 대한 의견이나 기타 등등의 할말이 있으시면 [여기]에 남겨 주세요.
p.s. 사진은 오스테리아 파로의 생면 파스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