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결, 민경이야.
오늘은 독서실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어, 엄마가 서울에 놀러 왔거든.
엄마랑 있으면 수다 떨고 싶어질 것 같고, 또 너에게 집중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 이곳에 왔어.
결, 혹시 길 잘 찾아? 나는 공간에 약하거든, 길치인 건 기본이고 지도 자체를 이해하는 데도 오래 걸려. 아까 독서실 들어오는데 키오스크 화면에 자리를 선택하라고 도면이 뜨는 거야. 근데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어서 한참을 서 있었어. 그런 나를 보곤 관리자분이 오셔서 자리를 설명해 주시고 결제도 도와주셨지. 그 모든 과정에 다정이 한두 스푼씩 함께 건네져 왔는데, 그 덕에 이 낯선 공간이 나는 벌써 편해.
낯선 것들이 편해지는 순간 너는 어때? 나는 대체로 안심을 했던 것 같아. 수업 시간에 배운 어려운 개념들이 (다행스럽게 시험 전에) 이해가 될 때, 자전거 균형 잡는 법이 몸에 익을 때, 네이버 길 찾기를 하지 않아도 어떤 길을 찾아갈 수 있게 될 때, 어떤 사람의 농담과 진담을 구분할 수 있게 될 때, 어떤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을 때. 나는 마음이 놓이고 그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무언가를 만나게 되기도 하는 것 같아. 익숙함을 든든한 지지대로 삼고 또 다른 모험을 떠나는 거지.
우리 동네에는 내 단골 카페가 있어. 처음 이 동네로 이사 왔을 때 마음 붙일 공간이 없었거든. 그런데 어느 날 산책을 하다가 멋진 꽃무늬 커튼으로 꽁꽁 가려진 어떤 가게를 발견하게 되었어. '곧 만나요'라고 적혀 있길래 개업 날짜를 기쁜 마음으로 기다렸지. 그리고 3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 카페를 내 아지트로 삼았어. (웃음) 크고 작은 식물들과 저마다의 사연이 깃든 물건들로 다채로운 공간이야. 그곳에서 글을 쓰고, 구움 과자들을 먹고, 미숫가루 크림라떼를 마시고, 사장님이랑 떠들고 웃고, 또 사장님께 위로도 많이 받았어. 그리고 지금은 카페 손님들과 독서모임도 하고 있지.
동네 사람들과 독서 모임을 하는 건 내 오랜 버킷리스트였어. 사람 모으기가 생각보다 어려워 번번이 실패했기 때문이지. 하지만 이번 동네에서는 다정한 공간을 꾸려주신 사장님 덕에 그 공간을 함께 좋아하던 사람들과 연이 닿게 되었어. 아끼는 유리구슬처럼 그 모임을 대하자고 매번 다짐하는데 모임 때마다 성큼성큼 빠져들고 있어. 애초에 내가 손에 쥐고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던 것 같아. 벌써 모임을 시작한 지 반년이 되었어.
지난 토요일에 그 모임에 다녀왔어. <타이탄의 도구들>이라는 책을 같이 읽었는데 세계적으로 부와 명예를 쌓은 '타이탄'들의 습관, 마음가짐, 행동 등을 엮은 책이야. 서로 인상 깊었던 부분을 이야기하는데 한 모임원분이 꼽은 부분이 참 좋아서 너에게도 말해주고 싶어.
"1분 동안 밤하늘을 쳐다보면 우리가 모두 같은 시간에, 같은 별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지구는 우리가 아는 한 생명이 존재하는 유일한 행성이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별은 빛이 이곳에 도착하는 순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우주에 관한 경외심을 선물할 때 우리의 불안과 두려움은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특히 죽음의 문턱에 놓인 사람들은 우주와 더 큰 교감을 한다. '아주 빠르고 짧은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는 걸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멸한다는 것, 사라진다는 것은 불안이 아니라 아름다움 후에 남은 평화라는 걸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모임원분의 낭독을 들으며 언젠가 내가 썼던 문장을 떠올렸어.
'영원하지 못함에 데이는 일도 있었지, 하지만 이제는 위로받고'
영원하지 않음에 한없이 슬퍼하던 날들을 지나, 바로 그것에 위로를 받던 순간을 기억해. 졸업 후 취업을 준비하던 때였어. 매일이 매일 돌아온다는 게 버겁고, 잠들지 못한 새벽을 어렵게 견디던 때였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그 새벽에 처음으로 '영원은 없다'라는 말에 위로를 받았지. 비슷한 맥락으로는 '망각은 축복'이라는 말을 고를 수 있을 것 같아. 영원하지 않음과 망각에는 슬픔과 위로가 공존하는 것 같아.
지금은 어떻냐고 누군가 물어온다면, 나는 '영원하지 않음'에 슬픔을 더 강하게 느낀다고 답할 것 같아. 하지만 언젠가처럼 거기에 푹 빠져 우울로 가기보다는 그 슬픔에 조금은 감사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그리워할 것이 생기는 게 좋은 일이라고 여기게 된 거지. 하지만 그 마음에 빠져 '현재'를 잃어버리는 일은 조심해야 할 것 같아. 망각에 대해서는 아직은 축복이라 생각하기 어려운 것 같아. 나는 나를 꼬박꼬박 기억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 하지만 언젠가는 모든 걸 잊고 싶어지는 순간도 오겠지?
모임원들에게 이런 마음을 이야기하고 또 질문을 건네고 싶었어. 하지만 이야기가 너무 늘어질까 꾹 참았지. 나는 모임을 할 때 발화 시간이 고르게 돌아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이미 나는 말을 많이 한 상태였거든 (웃음) 그래도 언젠가는 물을 기회가 있을 거야.
이 질문은 너에게도 역시 건네고 싶은 질문이야.
지금의 너에게 '영원하지 않음'은 슬픔과 위로, 어느 쪽에 더 가까운지 혹은 또 다른 무언가와 가까운지.
그리고 '망각은 축복'이라는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지 궁금해.
결, 날씨 좋다고 이야기하는 게 지칠 만큼 좋은 날들이 이어지고 있어. 어느 날 눈 떠보면 아카시아가 펴 있고, 또 어느 날은 장미가, 또 다른 날은 버드나무가 무성해진 걸 목격하는 요즘이야. 이런 축복 같은, 축제 같은 날들 속에서 언제나 네가 안녕하길 바라.
다음 주에 또 반갑게 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