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를 사랑한 비운의 여자 1" 박명인
by 박명인(한국미학연구소장, 아티파이 고문)
- 영혼을 알면 눈을 그릴 수 있다. -
모딜리아는 인물화를 많이 그렸지만 대부분 눈을 그리지 않았고, 긴 목에 긴 얼굴이 독창적인 모티브로 알려졌다. 모딜리아니가 쟌에게 말했듯이 그의 작품에서 눈을 그린 것은 영혼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눈을 그리지 않았지만 모딜리아니의 인물화는 무엇인가 원망(願望)이 담긴 눈빛으로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 보듯이 베일에 쌓여 있다. 원망·우울·기쁨·희로애락이 담긴 눈을 그렸고, 불꽃 같은 상상력을 지닌 인물화는 차갑게 느껴지기도 하고, 몽상적인 시의 세계를 떠올리기도 한다. 혹자는 쟌의 비극적인 사랑이 모딜리아니의 삶을 신화로 만들었다고도 말하고 있다. 짧은 인생을 산 모딜리아니는 눈 내리는 거리에서 만취된 상태에서 미술시합장으로 가다 강도를 만나 폭행을 당하고 자선병원으로 이송되어 숨졌다. 무엇보다 모딜리아니는 여성 편력이 심했고, 아편과 알콜 중독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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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Self-Portrait), 1919,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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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뭔지 알아? 진정한 사랑을? 그런 사랑을 했다고 영원히 비난받아야 할까?”
쟌의 가정은 부유했기 때문에 가난하고 알콜, 마약 중독자인 모딜리아니로부터 딸을 구하겠다는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쟌은 일편단심 모딜리아니에 대한 사랑뿐이었다. 진정한 사랑이란 제약이나 조건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1919년 파리, 레스토랑 테이블에는 음식을 먹는 사람들이 있고, 음악연주와 춤을 추는 사람들 사이로 벽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림을 끝내자 지배인은 환한 미소로 그를 반겼다. 피카소였다. 디에고는 옷을 벗은 여인의 등에 그림을 그렸다.
밖에는 비가 내렸다. 모퉁이에 한 여인이 아기를 안고 서 있었다. 쟌이었다.
쟌의 아버지가 말했다.
“뭘 하려는 거야?”
“딸을 보여 주려고요.”
모딜리아니는 자신의 딸이 태어난 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무도 사생아를 봐서는 안 된다.”
쟌은 딸을 모딜리아니에게 보여 주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주정뱅이에게 보이는 것을 반대했다. 그리고 입양을 강요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레스토랑 안은 아직도 시끌벅적했다. 그때 한 청년이 꽃을 한다발 들고 들어왔다. 테이블에 성큼 올라서서 말했다.
“사랑을 한가득 가져왔지만 함께 할 사람이 없구나.”
그리고 꽃다발을 군중 사이로 던졌다. 모디였다.
“더 이상 사랑을 찾지 말라. 예술의 미래는 여성의 얼굴에 있다.”
이런 말을 하는 모딜리아니는 쟌을 생각이나 할까?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한쪽 테이블에 앉아 있는 피카소에게 다가섰다.
“피카소, 말해보게, 그림에 사랑을 심을 수 있나?”
좌중이 시끄럽게 웃었다.
모딜리아니는 피카소 앞으로 다가서서 엉덩이를 피카소 얼굴에 들이대고 무릎에 걸터앉았다. 피카소는 모딜리아니에게 덤벼들어 넘어트리고 말했다.
“왜 나를 미워하는 거야?”
“그렇지 않아. 네가 아니라 나 자신이 미울 뿐이야.”
모딜리아니는 거리로 나갔다.
거리에는 술병을 들고 마치 모딜리아니를 기다렸다는 듯이 반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결국 쟌은 그러한 모딜리아니를 보면서 딸을 보여 주지 못하고 아버지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아버지는 어린 딸이 모딜리아니와 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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쟌과 모딜리아니가 처음 알게 된 것은 강의실에서 였다. 모델로 선 강아지가 전혀 말을 듣지 않아 학생들이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이때 모딜리아니가 강아지를 다독이더니 두 발로 서게 만들었다. 학생들이 환호했다. 쟌은 여기에서 그림을 배우고 있었다. 밖에는 비가 내렸다.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이 몰려나왔다.
“비의 속삭임이 좋아”
쟌에게 모딜리아니가 말했다.
“재미있군요. 비가 말도 하는군요.”
쟌은 신기하게 생각하며 웃었다.
“그럼요. 비가 모자를 서야 한데요.”
모딜리아니는 모자를 벗어 쟌의 머리에 씌웠다.
두 사람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주로 인물화를 많이 그린 모딜리아니는 쟌의 얼굴을 많이 그렸다. 목이 긴 여인으로 독창적인 인물화를 남긴 모딜리아니는 ‘영혼을 알게 되면 눈을 그릴 수가 있다’고 말하면서 쟌의 눈빛에 빨려 들어갔다. 사랑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지중해 연안의 코트다쥐르에서 동거를 시작했다. 그러나 모딜리아니는 알콜 중독과 마약에 찌들어 거리를 방황하며 2년이 지나도록 딸이 태어난 것도 모르고 거리를 헤맸다. 그러한 모딜리아니를 쟌의 아버지는 사위로 인정하지 않았다. 술과 마약을 절제하지 못하는 괴팍한 성격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하루는 뉴욕의 거대 화랑에서 모딜리아니를 찾아왔다. 작품에 흥미를 느낀다고 했지만 모딜리아니는 그림을 볼 줄 모른다고 말하며 와인 잔을 그 사람의 얼굴에 뿌리고 뛰쳐나갔다.
모딜리아니의 괴팍한 성격은 성장기의 환경 영향이 컸다. 1892년 이탈리아 르보르노에 거주하던 모딜리아니는 어린 나이에 조세 미납으로 집을 압수당하고 전 재산 가재도구 일체를 정부의 세금으로 충당한다는 명목으로 빼앗기는 아픔을 겪었다. 당시 모딜리아니의 어머니는 출산 직전이었고, 특히 유태인이라는 점에 더욱 억압이 심했다. 어머니의 출산 임박으로 제외된 물품은 임산부가 누워 있던 침대, 의자 5개, 샹들리에 2개, 탁자 2개, 담요 2장, 그림 4점, 대형 거울 1개, 받침대 1개, 양탄자 2장, 자루 2개, 재봉틀 하나였다.
쟌은 딸이 세례를 받는 자리에서 아비에게도 알리지 못한 설음에 눈을 흘렸다. 쟌은 성당 의자에 앉아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 그림을 보다가 고해성사를 했다.
“신부님 도와주세요. 제가 무슨 잘못을 했지요? 사랑에 빠진 것도 죄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은 전혀 죄가 될 수 없습니다.”
신부가 말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뭘 원하는지조차 모르겠어요. 미치도록 그이가 보고 싶어요. 그이를 잃고 싶지 않아요. 왜 미워하는 거죠. 종교가 달라서인가요? 그래서 모디(모딜리아니의 애칭)를 싫어하는 건가요?”
고해성사는 하는 딸을 바라보던 쟌의 아버지는 밖으로 나갔다.
“종교 때문이 아닙니다. 신앙심 때문도 아니고요. 당신과 아기를 위해서라도 강해지십시오.”
밖에서 차를 대기하고 서 있던 아버지는 쟌에게 말했다.
“이게 최선이란 걸 알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 미혼모로 살아가긴 힘들거든.”
쟌은 야속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미혼모로 살수 밖에 없는 것은 모딜리아니를 인정하지 않고 만나지도 못하게 하는 아버지 때문이었다. 쟌은 차에 타지 않고 돌아섰다. 아버지는 달려와 쟌을 잡아 세웠다.
“이 멍청한 계집애야. 넌 아직 어린애야. 어떻게 살아갈지도 모르잖아.”
“그럼 아빠는 알고 있나요?”
쟌은 반항하며 뿌리치고 거리 속으로 사라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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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열악한 환경에서도 쟌은 허드렛일을 하며 모딜리아니 만나기만 학수고대하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거리의 행진이 있던 군중 속에서 쟌은 모딜리아니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쟌은 사랑을 확인하고 쟌이 살고있는 집으로 왔다. 하룻밤을 함께 자고 아침에 모디는 일어나 구두를 신었다.
“어디를 가게요?”
쟌은 더 이상 헤어지는 것이 싫었다.
“주위를 둘러봐. 이런 곳에서 아기가 살 수 있겠어? 난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 무일푼이야. 거지라고. 이래서는 아빠가 될 수 없어.”
모딜리아니의 말에 쟌은 암담했다.
“그럼, 됐어요. 그냥 회피하세요.”
쟌은 절망이 깊어졌다.
“미안해.”
“당신은 너무 이기적이에요. 당신과 있고 싶어서 애도 버렸어요.”
첫째 딸을 어머니에게 맡기고 혼자 궂은일을 하며 살았는데 한 가닥 희망도 무너져 내렸다.
“이젠 부모님에게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쟌은 모딜리아니가 떠나고 허망한 발길이 화상을 찾게 했다.
“저를 도와주세요. 피카소를 만나게 해주세요. 그의 전시회에 모디의 작품을 걸 수 있는지 물어 봐 주세요.”
화상의 말은 신빙성이 없었다.
“모디와 피카소라, 그런 일 했다가는 모디가 날 죽일걸요. 미안해요. 안 되겠어요.”
쟌은 돈이 필요했다. 화상에게 피카소 옆에 모딜리아니가 있으면 작품이 잘 팔릴 거라고 말했다.
“당신 둘 다 좋아하지만, 애를 포기하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러면 애가 입양한 데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잖아요?”
쟌은 피카소를 찾아갔지만 냉담했다. 허 참, 그림 한 점에 한 번이라, 여자와 자기 위해서 그림을 그린다? 올가, 얼마 정도야? 수백 프랑?”
피카소는 연인 올가에게 말하며 모딜리아니의 타락을 비웃었다. 그리고 쟌에게 다가섰다.
“내가 당신을 그려 줄께, 쟌, 그러면 불후의 명작이 될 거야.”
“그러기엔 전 가격이 너무 비싸답니다.”
“그럼 안 되겠군.”
사실 피카소는 올가가 옆에 있었기 때문인지 쟌을 농락했다. 올가가 듣지 못하게 귓속말로 제시했다.
“그림을 걸어주는 대신…….”
쟌은 뒤도 보지 않고 피카소를 벗어났다.
모딜리아니는 쟌을 피하는 이유가 또 있었다. 마약, 알콜 중독에 폐결핵이었다. 당시만 해도 폐결핵은 죽음의 병이었다. 쟌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 새로운 삶을 살기를 원했고 자신의 정신적 고통을 술로 보내고 있었다. 이러한 모딜리아니의 삶은 쟌을 더욱 힘들게 했다. 돈이 필요하지만 피카소는 받아 주지 않고 농락을 일삼았고, 아버지에게 돌아가지 않는 쟌은 겨울이 되어도 난로도 피울 수 없는 생활에 화장실 변기 청소에 닥치는 대로 일하면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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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초상화( Portrait de Picasso), 1915,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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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10번째 전시회장에서 사건이 생겼다. 모딜리아니의 작품을 관중이 보고 환호하고 있었을 때 뒤에 가려진 후장을 걷었다. 뜻하지 않게 피카소가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모델은 다음 아닌 쟌이었다. 피카소는 쟌의 초상화를 관중들에게 펼쳐 보였다. 모딜리아니는 자신의 작품을 들어 집어 던졌다. 박살이 났다. 그리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쟌은 밖으로 따라 나왔다.
“모디 기다려요. 서요!”
모디는 주변의 기물을 쟌에게 마구 집어던졌다.
“당신을 위해서 그랬어요, 당신을 도울려고요. 그래요, 아기를 위해서 그랬어요. 애기를 데려와야 되는 건 알지요? 애기가 있어야 되요.”
쟌은 모딜리아니를 설득해 집으로 갔다. 어머니가 아기를 안고 있었다. 모디는 아기를 안고 좋아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오기 전에 떠나기를 바랐다. 쟌은 아기를 데리고 모딜리아니와 함께 떠나려고 했지만 어머니의 근심은 컸다.
“또다시 무시당하고 절망하고 싶어?”
그때 쟌의 아버지가 들어왔고, 두 사람은 충돌했다.
“이 아기가 이쁘지 않은가요?”
모딜리아니는 자신의 딸이 어딘가 입양되는 것이 싫었다. 그러나 딸을 양육할 능력도 없는 자신이 한없이 미웠다. 모디는 입양을 반대하며 뛰쳐나왔다. 자신의 숙소에 돌아온 모딜리아니는 즐비한 술병을 하나하나 흔들었다. 술이 담긴 술병은 하나도 없었다.
거리행진이 있던 날 쟌과 하루를 보내고 둘째 아기가 생겼다. 태어날 시간이 촉박하여 모딜리아니는 시청에서 결혼증명서를 발급받고 쟌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 기분이 들떠 있었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모딜리아니는 주점에 들어가 술을 마셨다. 마시고 또 마시고 왠지 모르지만 결혼증명서를 주머니에 넣고 쟌을 만나러 가다가 카페 바에서 술은 마신 것은 아마 기쁨으로 흥분한 탓이겠지만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 서둘렀다. 이날이 화가들의 그림 경기가 발표되는 날이었다. 8시까지 당도해야 하지만 모딜리아니는 거리에서 폭행을 당했다. 경기장에도 당도하지 못했다. 피카소는 큐비즘 스타일의 모딜리아니를 그렸고, 모딜리아니는 쟌을 그렸는데 당시 유일하게 눈을 그렸다. 그것을 안 쟌은 모딜리아니가 ‘영혼을 알면 눈을 그릴 수 있다’라고 한 말을 기억하며 눈물을 흘렸다. 모딜리아니는 대부분 눈을 그리지 않았다. 그런데 쟌의 눈을 그렸다는 것은 바로 자신의 영혼을 안다는 의미였다. 피카소를 비롯하여 많은 관중이 갈채를 보냈다. 그러나 모딜리아니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거리에서 강도를 만나 소지품도 모두 강탈당했고, 결혼증명서도 강도들이 찢어 버렸다. 자선병원으로 실려 간 모딜리아니는 끝내 쟌에게 결혼증명서도 전하지 못하고 숨졌다.
비운의 화가, 비운의 여자, 사랑이란 이런 것이었던가? 쟌의 순진무구한 사랑이 고통을 감내하면서 오직 14살이 더 많은 모딜리아니를 위해 살았고, 그의 술과 마약 중독으로 방황하는 것을 탓하지 않고 오직 사랑으로 감싼 여인이었다. 그러한 쟌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모딜리아니는 열정적인 화가로써 뭇 여인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어 그러한 환경이 방탕하게 만들었고, 술과 마약은 육신을 썩어들어가게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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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딜리아니의 죽음은 예술가들에게 알려졌다. 후배 화가 키슬링은 이탈리아 리보르노의 양친과 로마에 있는 사회당 국회의원 형 엠마뉴엘에게도 소식을 전했다. 형은 키슬링에게 전보를 보냈다. 모딜리아니의 죽음이 쟌에게도 전해졌다. 시체 안치실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마지막 만남. 쟌은 오열하며 한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다음날 쟌은 자신의 집 6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파리의 예술가들과 시민들이 모인 가운데 장엄하게 장례가 치러졌고, 3년 후 쟌은 모딜리아니와 합장했다. 한 여성의 지고지순한 사랑은 생전에 함께 누리지 못하고 죽음으로써 영원을 찾았다.
모딜아니의 묘비에는,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1884년 7월 12일 리보르노(이탈리아)생. 1920년 1월 24일 파리에서 죽다. 이제 바로 영광을 차지하려는 순간에 죽음이 그를 데려 가다』
그리고 그 밑에 나란히 세워진 쟌의 묘비에는, 『쟌 에뷔테른느. 1898년 4월 6일생. 1920년 1월 25일 파리에서 죽다. 모든 것을 모딜리아니에게 바친 헌신적인 반려』라고 쓰여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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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의 초상화(Portrait of Jeanne Hébuterne), 1918,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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