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너의 수수께끼 💌 우.시.사 레터 3회 (2021.05.05) 어른, 너의 수수께끼 안녕하세요, 소설 쓰는 김금희입니다. 한 시인이 인생 페이지 곳곳에 드리워 있다는 건 축복일 거예요.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허수경 시인이 제게는 그렇습니다. 대학의 어느 시절은 허수경 시인의 「혼자 가는 먼 집」이라는 작품으로 기억됩니다. 그 시에서 저는 “무를 수도 없”이 “참혹”하게 사랑하는 누군가를 부르면서도 “킥킥”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치병”과 “환후” 속에 킥킥 웃으며, 무덤가로 저 스스로 걸어들어가는 것이 사랑이라는 사실을요. 놀라웠죠.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에 수록된 「고구마별」에는 이런 풍경도 등장합니다. 💗 김금희 소설가가 사랑하는 첫번째 시 고구마별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별도 구워 먹으리라 했어요 70년대 초반 가장 어린 나 가운데 하나가 별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어요 위에서 내려다보면 먹다 만 고구마 형상이었어요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곰별자리였어요 👍 소설가의 감상 아이에게는 고구마도, 별도 같은 것이 됩니다. 먹는다는 것은 가질 수 있다는 것. 그런 불가능한 꿈을 꾸다가 꾸다가 싫증이 날 때쯤 우리는 어른이 된 척을 하지만, “쪼그리고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던 어린 나는 사라진 것이 아니지요. 숨은 것에 가까울 뿐. 그런데 그 예쁠 것도 잘날 것도 없는 아이에 비해 세상은, 우주는 얼마나 광활하고 힘이 센 무엇일까요? 그렇게 아이는 문득 가엾어지고 마는 듯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아래, 다른 인식의 차원들을 그려볼 수 있다면 아이 역시 어엿한 곰별자리, 제우스가 너무도 사랑해 슬프게도 하늘의 곰이 되어버린 그리스신화 속 ‘칼리스토’도 될 수 있습니다. 별이 된 제우스의 연인이 되어 쪼그리고 앉은 누군가에게 또다시 사랑을 증거해줄 수 있겠죠. 그렇다면 우리는 태생적으로 알고 있는 것일까요? 별과 고구마와, 다시 별과 고구마라는 숱한 ‘레이어’들을 관통하는 사랑이라는 이 우주적(?) 비극에 대해 말이에요. 별이라는 그 멀고 차가운 물질에도 사랑의 서사를 입히는 것이 인간이니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 막간 시인선 소식 ![]() 2021년 시인선 초판에 수록되어 있는 스티커를 수집하세요. 10종 이상 수집하시면 '2021 시인선 배지'를 드립니다. ![]() 💜 김금희 소설가가 사랑하는 두번째 시 수수께끼 극장을 나와 우리는 밥집으로 갔네 고개를 숙이고 메이는 목으로 밥을 넘겼네 밥집을 나와 우리는 걸었네 서점은 다 문을 닫았고 맥줏집은 사람들로 가득해서 들어갈 수 없었네 안녕, 이제 우리 헤어져 바람처럼 그렇게 없어지자 먼 곳에서 누군가가 북극곰을 도살하고 있는 것 같애 차비 있어? 차비는 없었지 이별은? 이별만 있었네 나는 그후로 우리 가운데 하나를 다시 만나지 못했네 사랑했던 순간들의 영화와 밥은 기억나는데 그 얼굴은 봄 무순이 잊어버린 눈(雪)처럼 기억나지 않았네 얼음의 벽 속으로 들어와 기억이 집을 짓기 전에 얼른 지워버렸지 뒷모습이 기억나면 얼른 눈 위로 떨어지던 빛처럼 잠을 청했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당신이 만년 동안 내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들여다보고 있었네 내가 만년 동안 당신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붙들고 있었네 먼 여행 도중에 죽을 수도 있을 거야 나와 당신은 어린 꽃을 단 눈먼 동백처럼 중얼거렸네 노점에 나와 있던 강아지들이 낑낑거리는 세월이었네 폐지를 팔던 노인이 리어카를 끌고 지하도를 건너가고 있는 세월이었네 왜 그때 헤어졌지, 라고 우리는 만년 동안 물었던 것 같네 아직 실감나지 않는 이별이었으나 이별은 이미 만년 전이었어 그때마다 별을 생각했네 그때마다 아침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던 다리 밑에 사는 거지를 생각했네 수수께끼였어, 당신이라는 수수께끼, 그 살(肉) 밑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잊혀진 대륙들은 횟빛 산맥을 어린 안개처럼 안고 잠을 잤을까? 👍 소설가의 감상 「수수께끼」는 이 시집을 읽고나서 가장 자주 떠올린 시예요. 바로 이 장면 때문이죠. 안녕, 이제 우리 헤어져 바람처럼 그렇게 없어지자 먼 곳에서 누군가가 북극곰을 도살하고 있는 것 같애 차비 있어? 차비는 없었지 이별은? 이별만 있었네 이 선문답들은 모두 무엇일까요? 지금 우리는 헤어져 다시 만나지 못하는데 말입니다. 사랑했던 사람과 이별한 뒤 정작 “그 얼굴은 봄 무순이 잊어버린 눈(雪)처럼” 사라지고 시시껄렁한 말장난들만 남은 기억들은 그래서 더 무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돌아갈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맞닥뜨린 이별, “기억이 집을 짓기 전에 얼른” 지워버려야 하는 이별, 손끝에 닿았던 ‘당신의 살(肉)’마저 아득해진 그 이별은 “만년”을 물어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해 저 너머의 일이 아닐까요. 발화의 의미 찾기가 끊임없이 지연되고 때로는 그 지연 자체가 발화의 목적이 되는 수수께끼처럼 허수경 시에서 사랑의 경험자들은 에둘러 에둘러 휘청이는 걸음으로 사랑을 탐사합니다. 그렇게 해서 죽어버린 “북극곰”과 이제 또다른 별이 된 아이가, 곁에 없는 연인의 눈물을 영원히 상상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어른이 만납니다. 그런 그들의 행로가 그려내는 사랑의 발생과 진행 그리고 종료의 리듬 같은 것, 그 무참함 속에 끼어드는 난데없는 “킥킥” 하는 웃음소리 같은 것, 그래서 오랫동안 허수경의 시를 좋아했습니다. 내가 스무 살을 지나 더 어른, 더더 어른이 되어서도 절대 장악할 수 없을 감정의 이면에 대해 예고해준 그의 언어를요. 😀 구독자님 오늘 메일은 어떠셨어요?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메일링 <우.시.사>가 바로 성장할 수 있도록 많은 의견 부탁드려요! 🙇 ![]() 다음주 <우리는 시를 사랑해> 시믈리에💚 김효선 인터넷서점 알라딘 담당자 다음주 아름다운 시 두 편을 추천해줄 추천인은 바로 인터넷서점 알라딘의 한국소설과 시를 담당하는 MD 김효선님입니다. 그럼 모두, 다음주 수요일에 만나요! 이미 신청하신 분들은 구독하기 버튼을 누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