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회적 약자와 동행해야 하는 세 가지 이유

 

김현철 (연세대 의대, 홍콩과기대 경제학과 및 정책학과 교수, KPI 연구위원)


요약

  우리가 사회적 약자와 동행해야 하는 세 가지 이유 1) 우리 인생의 성취가 대부분 주어진 것이다. 태어난 국가와 부모에 의해서 80% 이상의 성취가 결정된다. 2) 우리 사회에 숨겨진 혁신가들이 저소득층에 집중되어 있다. 국가가 이들을 발굴해 내면 사회 전체에 기여하게 된다. 3) 약자와의 동행이 우리 사회를 더욱 안전하게 만든다. 특히 방임된 저소득층 아이들은 비인지 능력을 함양할 기회가 적어 범죄인이 될 확률이 높다. 양질의 영유아 프로그램을 통해 이들의 바른 성장을 도우면 미래의 범죄 예방 효과가 있다. 약자와의 동행은 시혜의 차원을 넘어서 이들이 국가에 이바지하여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적극적으로 기여하게 하는 것이다.

 

  왜 의사를 그만두고 경제학을 공부하세요? 제가 경제학을 공부한 지 벌써 20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저를 만나는 사람들은 궁금해합니다. 의사였던 저는 사회를 치료하는 의사가 되고 싶어 진료실을 나와 경제학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명백한 말기 유방암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부인하던 촌부. 북한이탈주민 정착지원사무소 (하나원)에서 만나던 생명을 걸고 이 땅에 온 북한이탈주민들. 산재를 입고 서러워 울던 외국인 노동자. 말라리아로 아이를 잃고 밤새 구슬프게 울던 아프리카 말라위의 엄마. 단돈 천 원에 성매매를 제안하던 아프리카의 어린 소녀들. 저는 이분들을 통해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사회의 약자들이 더 아프고, 더 일찍 죽는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습니다. 이것이 제가 경제학 연구를 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불행은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요? 대부분이 나라를 잘 못 만나고,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났고, 사회의 적절한 보호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불운한 것이죠. 그럼 반대로 내가 좋은 교육을 받고 건강하게 잘 먹고 잘사는 것은 내 능력과 노력 때문일까요?


첫 번째 이유: 인생 성취의 대부분은 주어진 것

   우리가 사회적 약자와 동행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우리의 성취가 스스로 이룬 것이 아닌 대부분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태어나면서 첫 번째로 만나는 운은 ‘어디서 태어났는가’입니다. 세계은행 출신 경제학자 브랑코 밀라노비치는 태어난 나라가 평생 소득의 절반 이상을 결정한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Branko Milanović, 2015). 태어난 나라의 평균소득과 불평등지수만으로 성인기 소득의 최소 50%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저개발 국가에서 태어나면 능력이 뛰어난 사람도 성공할 가능성이 작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선진국에 태어난 것만으로도 우리는 상위 20% 안에 들어가는 운 좋은 사람들입니다.

  다음으로 만나는 운은 ‘부모’입니다. 부모는 유전·환경 요소를 모두 제공하므로 둘의 역할을 구분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경제학자들은 입양된 아이들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다트머스대학의 브루스 새서도트가 홀트아동복지재단을 통해 미국에 입양된 대한민국 출신 아이들을 추적 조사한 연구가 유명합니다(Bruce Sacerdote, 2007). 양부모가 입양할 아이를 고를 수 없으므로 아이들은 사실상 무작위로 입양가정에 배정됐습니다. 입양 자녀는 부모에게 환경만을 제공받고, 친자녀는 유전과 환경을 모두 받으므로 이들을 비교 분석하는 것입니다. 이 논문은 유전이 교육 연한의 44.3%를, 소득의 32.4%를 설명한다고 결론짓습니다. 부모를 자기가 결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부모를 만났는지도 명백히 운이고 주어진 것이죠. 그렇기에 “인생 성취의 8할이 운이다. 주어진 것이다”는 전혀 과장된 말이 아닙니다. 그럼 나머지 20%는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인가요? 그런데 우리가 노력할 수 있는 힘조차도 사실 상당 부분 타고난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인생 성취의 대부분은 우리가 스스로 이루어 낸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은 이 사실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 코넬대학 동료였던 로버트 프랭크 교수는 2016년 낸 책 <성공과 운>(Success and Luck)에서 크게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이 모든 것을 스스로 해냈다고 믿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합니다. 그 부작용이 큽니다. 자기 성취가 스스로 이룬 것이라 믿을수록 세금 납부에 더 적대적입니다. 정부와 사회가 도와준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죠. 그리고 실패한 사람을 운이 나쁘기보다는 노력하지 않은 사람으로 인식하므로, 이들을 돕는 일에도 소극적입니다. 하지만 국가가 개인의 성취에 미치는 엄청난 영향력을 생각할 때 이런 믿음이 타당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내가 될 수 있던 것은 8할 이상이 공동체와 다른 사람 덕분입니다.

  지금까지 개인의 성취 대부분이 태어난 국가와 가정 환경과 같은 운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러한 운은 모두에게 골고루 나누어지지 않음을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국가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국민의 성취 대부분이 국가가 결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령, “풍요로운 잘사는 국가” 하나만으로도 국민의 성취 절반이 보장됩니다.

  승자 독식 사회는 건강하지 못합니다. 부모를 잘못 만난 불운, 살아가며 만난 이런저런 불운을 극복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은 국가의 몫이죠. 골고루 나누어지지 못한 운을 좀 더 골고루 나누는 것은 중요한 국가의 역할입니다.


두 번째 이유: 능력보다 환경의 차이

  우리가 사회적 약자와 동행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우리 사회에 숨겨진 아인슈타인이 저소득층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하버드대 경제학과의 라즈 체티(Raj Chetty) 교수팀은 혁신적 발명가 120만 명의 삶을 추적했습니다. 지난 수십 년의 특허 자료, 국세청 및 뉴욕시 교육청 자료를 통합한 대형 프로젝트죠. 혁신가는 대부분 중산층 이상에서 태어났습니다. 소득수준 하위 50% 이하의 가정에서 발명가는 1000명 중 1명 미만이나, 상위 1%는 그 확률이 10배도 넘었습니다.

  이 연구의 가장 중요한 발견은 이러한 격차가 타고난 능력 차이보다는 환경의 차이에 의한 것이 더 크다는 점을 보인 것입니다. 가령 초등학교 시절 수학 시험 점수가 비슷한 아이들 사이에서도 가정 형편에 따라 발명가가 될 확률에 큰 차이가 존재합니다. 또 어린 시절 특정 분야의 기술 혁신이 일어나는 동네·가족에서 자라면 그 분야의 발명가가 될 확률이 증가합니다. 이는 혁신의 자질이 롤모델 또는 인턴십 등을 통한 네트워크 효과 등으로 다음 세대에 전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연구 결과를 종합해보면 어린 시절 혁신에 노출되었다면 중요한 발명을 할 수 있었던 ‘잃어버린 아인슈타인’이 저소득층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고소득층은 자녀들이 능력을 꽃피울 수 있도록 개인이 충분한 투자를 하지만, 저소득층은 그럴 수 없는 현실입니다. 개인의 힘으로는 꽃피울 수 없었던 이들의 숨겨진 재능을 찾아내 사회에 이바지하게 돕는 것은 국가의 역할입니다. 이 사실은 저소득층을 돕는 것이 시혜의 차원을 넘어서 이들이 국가에 이바지하여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적극적으로 기여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 번째 이유: 동행이 주는 공동체적 효과

  우리가 사회적 약자와 동행해야 하는 세 번째 이유는 약자와의 동행이 우리 사회를 더욱 안전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최근 20년 동안 경제학의 가장 중요한 업적이 무엇인지 제게 묻는다면 “(임신 기간을 포함한) 5살 미만 어린 시절 환경의 지대한 중요성을 밝힌 것”이라고 답하겠습니다. 경제학이 이런 것도 연구하냐며 놀랄 분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 환경의 장기 효과’는 최근 경제학의 주요 연구 주제였고, 불우한 어린 시절은 불평등이 대물림되는 가장 중요한 경로라는 것도 밝혀냈습니다.

  시카고 대학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제임스 헤크만은 사람을 성공적인 삶으로 이끄는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 연구했습니다. 성공적인 삶을 몇개의 변수로 간단히 정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임금수준, 교육 연한, 건강, 안정적 가정생활 등을 성공적인 삶의 척도로 잡았습니다. 헤크먼 교수의 연구 결과는 인지능력과 더불어 그동안 우리가 소홀히 여겼던 자존감, 자기효능감, 참을성(끈기), 성실성, 개방성, 정서적 안정, 개인이 자기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 같은 비인지 능력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주목할 부분은 인지능력 못지않게 비인지능력이 중요합니다.

  사회를 어렵게 만드는 범죄자들의 비인지 능력은 대체로 낮은 편입니다. 많은 수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죠. 불우한 가정의 아이들에게 양질의 영유아 조기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비인지 능력을 기르는 일이 미래 범죄를 예방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임을 경제학자들이 밝혔습니다. 요약하면 양질의 영유아 프로그램이 불우한 아이들을 보호하고, 불평등을 개선할 뿐더러, 범죄예방 효과도 있습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약자와의 동행, 즉 사화적 약자를 보호하고 돕는 일은 단순히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는 수준을 넘어섭니다. 살기 좋은 공동체를 함께 만들어가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참고문헌

Milanovic, Branko (2015). “Global Inequality of Opportunity: How Much of Our Income Is Determined by Where We Live.” Review of Economics and Statistics 97.2: 452-460.

Bell, Alex, Raj Chetty, Xavier Jaravel, Neviana Petkova, and John Van Reenen. "Who becomes an inventor in America? The importance of exposure to innovation." The Quarterly Journal of Economics 134, no. 2 (2019): 647-713.

Heckman, James, Rodrigo Pinto, and Peter Savelyev(2013). “Under-standing The Mechanisms Through Which an Influential Early Childhood Program Boosted Adult Outcomes.” American Economic Review 103.6: 2052-2086.

Heckman, James J., Jora Stixrud, and Sergio Urzua(2006). “The Effects of Cognitive and Noncognitive Abilities on Labor Market Outcomes and Social Behavior.” Journal of Labor Economics 24.3: 411-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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