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교역의 구조와 흐름에는 외교관계 정상화라는 큰 전환점이 있었다. 1992년의 수교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쏟아내는 서막을 열었다. 지난 30여 년간 우리나라 총수출 규모는 8배 정도 늘어난 데 반해 대중국 수출은 60배 이상 급증했다. 대중국 수출은 수교 이듬해 바로 두 배로 커졌고 1996년 100억 달러, 2010년 1,000억 달러를 각각 돌파했다.
중국은 오랫동안 한국의 제1위 무역흑자 시장이기도 했다. 흔히 양국 간 교역의 태동기인 1970~80년대부터 줄곧 한국이 흑자였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수교 당해 연도인 1992년까지는 한국이 중국에 대해 한해도 빠짐없이 매년 무역적자를 보는 구조였다. 흑자로 반전된 것은 1993년이다. 수교 전후로 무역·투자 관계 협정 등 제도적 장치가 속속 마련되면서 대중국 가공무역형 투자가 본격화된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
당시 한국 기업은 해외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저비용 생산기지가 필요했고, 저임금의 풍부한 노동력을 가진 중국에 대거 진출해 공장을 세웠다. 기업들은 한국에서 보낸 원자재를 가공해 만든 완제품을 구미 선진국으로 수출했다. 이렇게 해서 한국은 통계적으로 대중국 무역과 투자가 동시에 급증했고 전 세계에서 벌어들인 무역수지 흑자액보다 더 많은 이익을 중국에서 일궈내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대중국 경제의존도가 지나치게 높다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기술력이 부족했던 중국이 고용과 수출 확대를 위해 외국인 투자에 절대적으로 의존한 시기였다. 한국과 중국은 일부 무역마찰이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경쟁 없는 상호보완적 관계를 유지했다. 중국이 성장하면 한국도 성장했고, 중국의 수출이 잘되면 한국도 수출 경기가 좋아지는 시절이 수교 후 20여 년간 이어졌다. 하지만 중국 내수시장 용도의 수출 비중이 높지 않아서 엄격한 의미에서 본다면 많은 한국 기업에 있어 중국은 상품 판매 시장이라기보다는 가공기지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대중국 수출실적이 중국 내 수요보다는 선진국의 경기 등락에 따라 움직이는 특수성이 작용했다.
계속 늘어날 것만 같았던 대중국 수출은 2010년 이후부터 추세가 달라졌다. 연도별로 증가와 감소가 번갈아 나타나기 시작했다. 연간 수출실적은 2,000억 달러에 도달하지 못한 채 1,000억 달러 대에서 멈춰 선 듯하다. 출발이 좋았던 2022년은 첫 석 달 동안 10%대의 증가세를 보였으나 4월부터 불안해졌고, 5월부터 감소로 돌아섰다. 유의해서 볼 점은 양국 간 경제의 상관성을 나타내는 상관계수(correlation coefficient)가 과거 마이너스에서 수교 이후 한때 +0.8 수준으로까지 커지며 매우 강한 동조성을 보이기도 했으나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수명 다한 대중국 가공무역 모델
지난 수십 년간 지속돼온 대중국 가공무역(processing trade)에서 수출 부진과 무역수지 악화의 근원적 요인을 찾을 수 있다. 국가 간 가공무역형 경제 관계는 평시에는 문제가 없지만, 두 가지 상황이 되면 제대로 작동하기 어려워진다.
첫째 가공무역 기지 역할을 하는 국가(중국)의 경제가 성장하거나 정책이 변하는 경우다. 둘째 가공무역 기지 국가와 해외 수출시장 국가(구미 선진국)가 갈등 모드에 접어드는 경우도 그렇다. 한국과 중국 간 가공무역은 이 두 가지 상황 모두에 해당한다.
중국은 경제가 발전하고 산업 경쟁력이 강화돼 무역과 투자에서 가공무역의 비중이 크게 줄었다. 중국의 경제산업 경쟁력은 앞으로도 강할 것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 재임 시기에 관세부과, 환율조작국 지정 등으로 시작된 미국의 대중국 압박은 바이든 대통령 취임 이후 핵심부품과 소재의 공급사슬 제한, 첨단기술 단속, 금융시장 개방 압력으로 옮겨가면서 양국 간 갈등이 심화·장기화 국면에 진입했다. 결국, 중국이 바뀌고 세계가 바뀌어 한·중 가공무역형 경제교류 모델도 지속 가능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구조가 된 것이다.
대중국 무역수지 악화는 반도체 수출이 줄었다고만 하기보다는 2가지 측면에서 입체적으로 관찰해볼 필요가 있다. 첫째 한국의 대중국 상위 주요 수출품 가운데 수출 증감률 측면에서 부진한 품목을 살펴볼 수 있다. 2022년 대중국 주요 수출 품목의 증감률을 기준으로 할 때 품목 합성수지(2위 수출품목 –6.0%), 무선통신기기(3위 –4.7%), 평판디스플레이 및 센서(4위 –16.6%), 석유제품(8위 –35.5%), 반도체 제조용 장비(10위 –25.3%), 컴퓨터(–29.4%) 등으로 나타난다.
둘째 우리나라의 대중국 주요 수출품 가운데 대중국 수출보다 대중국 수입 금액이 더 큰 품목군이 있다. 5위 수출 품목은 정밀화학원료는 수출 64억$, 수입 140억$로 무역수지 적자가 매우 크다. 컴퓨터(수출 31억$, 수입 93억$)와 철강판(수출 26억$, 수입 42억$)도 무역역조로 전환한 품목이다.
최근 대중국 수출 부진은 일부 품목의 현상이라기보다는 전반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중국 정부의 국제정치 환경 등에 따른 제재 혹은 특정 품목의 부진 때문이라기보다는 중국이 전부터 계속 추진해오고 있는 자국 산업 육성 및 해외 거래선 다변화의 품목 중에 한국의 대중국 주력 품목과 겹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경쟁과 협력 동시 구사하는 ‘코피티션’ 전략에 주목을
한국의 대중국 경제의존도가 매우 높은 상황에서 중국은 경제와 산업 경쟁력을 키워가면서 수입대체 효과가 급속히 확대되고 있다. 양국 간 상품교역의 특징은 과거 산업 간 교역에서 산업 내 교역으로 옮겨가고 있다. 양국의 미래 신산업 정책도 겹치는 부분이 많아 앞으로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수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대중국 수출 부진과 무역수지 적자 구조는 자칫 고착화할 가능성에도 대비해야 한다. 한국과 중국은 이제 마찰과 경쟁이 없는 무대에서 만나기 어렵게 된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중국은 버릴 수 없는 시장이다. 이 글에서는 중국의 내수시장에 주목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방안을 제안한다.
첫째 경쟁(competition)과 협력(cooperation)의 개념과 관계를 결합한 코피티션(coopetition) 전략을 선별적으로 적용해볼 수 있을 것이다. 코피티션은 시장의 파이를 키워서 이익을 공유하는 것이다. 사안별로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경쟁하는 전략이다. 최근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들의 대중국 전략 포지셔닝 변화와도 연결되는 측면이 있다. 해외시장에서 한국과 중국의 기업은 필연적으로 경쟁 관계에 있지만, 중국 내수시장에서는 경쟁 속에서도 협력해서 시장의 파이를 키워나갈 필요가 있다. 시장의 파이를 키워나갈 때는 협력 관계를 모색하고 형성된 시장을 분할 할 때는 경쟁 전략으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롭게 떠오르는 상품과 서비스 시장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둘째 새로운 경제협력의 연결고리를 찾아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중국의 변화와 새로운 트렌드를 관찰하고 기회를 찾아가면서 우리가 잘하는 분야에 선택과 집중을 하기보다는 중국이 필요로 하는 상품과 서비스를 내놓는 구조로 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중국의 정책 변화와 시장 정보를 잘 들여다보아야 한다.
셋째 새로운 시장 공간을 관찰하자. 가장 주목해야 할 분야는 중국 내 도시화 건설과 인구 고령화다. 중국은 이를 위해 토지 제도와 소득분배 제도를 손질하고 있으며(제도적 개혁) 지능형 교통체계(ITS)를 포함한 도시 인프라를 구축하고(하드웨어), 보건 의료 시스템, 교육, 공공 서비스도 확충하고 있다(소프트웨어). 여기서 다양하고 새로운 상품과 서비스 시장 공간이 형성되고 있다. 동시에 고령화 진전과 함께 인구구조가 변하면서 실버시장이 팽창하고 있는 점도 포인트다. 중국 내 각 지방 정부는 전반적으로 한국 기업과의 경제교류 협력을 희망하고 있어 지방 도시에서 시장 기회를 살펴볼 수 있겠다.
넷째 리스크 요인을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 한중 간 경제의 연결 정도에는 ‘초얽힘(hyperentanglement)’ 특징이 있다. 지정학적·지경학적으로 경제뿐 아니라 모든 이슈가 얽혀 있다. 하나를 당기면 줄줄이 올라오기도 하지만, 자칫 부분이 얽히면 전체가 얽힐 수도 있다. 한중 간 민관합동 체제로 갈등관리 시스템을 운영해야 하는 이유다.
위 해법들의 공통점은 기본적으로 중국 내수시장을 활용하는 데 있다. 한국이 수출과 수입에서는 현재 불리한 국면이지만 중국 내수시장의 가능성을 보자는 것이다. 과도한 대중국 경제의존도를 지속적으로 줄여나가는 ‘디 리스크’(de-risk)를 기반으로 하되 중국 내수시장도 잘 관찰할 때다.
*이 글은 테크앤트레이드연구원 박한진의 『한중저널』 VOL. 16, 2023 SUMMER 기고문에서 발췌한 것임을 밝힙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