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슬기로운 미술여행입니다.

8말~9초에 짧은 스코틀랜드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007 스카이폴>과 <해리 포터>의 촬영지인 스코틀랜드 하이랜드의 자연은 정말 장엄했습니다. 겨울에는 오로라까지 볼 수 있다는 북위 60도의 거대한 U자형 빙하 계곡을 달리면서, 이 나라에 관한 인상이 달라졌습니다. 

스코틀랜드는 중세의 흔적이 남아있는 옛 수도 에딘버러와 현재의 금융중심지인 글래스고가 대표도시입니다. 에딘버러에는 세 곳의 꼭 가볼만한 국립미술관이 있습니다. 이 곳을 천천히 둘러보고 왔습니다. 그리고 현지에서 막을 내리기 직전 서도호의 개인전을 만났습니다. 오늘은 작정하고 서도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3회 (2024.09.10)
바위산 위에 세워선 에딘버러성. ⓒ김슬기
Prologue : 에딘버러에는 쌍둥이 미술관이 있다
모던1의 문주에는 마틴 크리드의 네온 작품 <EVERYTHING IS GOING TO BE ALRIGHT>가 설치됐다. ⓒ김슬기
조경가 찰스 젠크스가 디자인한 갤러리 앞의 초승달 모양의 아름다운 호수. ⓒ김슬기
미술관 앞에 광활한 잔디밭이 펼쳐진 모던2 ⓒ김슬기
네이선 콜리의 <There Will Be No Miracles Here>가 설치되어 있다. ⓒ김슬기
스코틀랜드 국립 현대미술관은 1960년 개관해 이사와 확장을 거쳐 지금의 이원화 구조가 정착됐습니다. 현재는 도심에서 살짝 떨어진 곳에 모던1과 모던2라는 두 곳의 미술관을 품고 있습니다. 쌍둥이처럼 나란히 자리한 이 미술관은 무척 자연친화적입니다. 미술관 앞 드넓은 잔디밭에는 들꽃이 만발해 있었습니다. 

모던1은 1825년 윌리엄 번이 설계한 신고전주의 건물에 입주해 있습니다. 조경가 찰스 젠크스가 디자인한 갤러리 앞의 초승달 모양의 호수와 둔덕에는 시민들이 햇살이 좋은 날이면 망중한을 즐깁니다. 천국 같은 모습이죠. 토니 크래그, 바바라 헵워스, 헨리 무어, 레이첼 화이트레드 등의 조각이 미술관 곳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모던2는 원래 1833년에 지어진 건물을 1999년에 갤러리로 개조해 개관했습니다. 잔디밭에는 네이선 콜리의 <여기 기적은 없을 것(There Will Be No Miracles Here)>이라는 네온 조각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사회, 정치적 문제제기를 꾸준히 해온 작가가 2007년 세운 이 공공미술은 정치와 종교, 이성과 신앙 등 역사적 갈등을 컨텍스트 삼아 첨예한 대립을 연상시키는 실존적 선언을 합니다.


모던2에서는 특별전 <Women in Revolt! Art and Activism in the UK 1970–1990

>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여성 작가들의 저항적인 작품들이 대거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두 미술관은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모던1은 매혹적이고 가벼운 모든 것들, 모던2는 엉뚱한 것과 멋진 것들을 전시한다고 미술관은 스스로를 소개합니다. 모던1에는 특별히 스콘으로 유명한 카페가 있습니다. 

Deep focus : 서도호의 <Tracing Time>
서도호의 평면과 드로잉 작업이 전시된 미술관. ⓒ김슬기
달리는 집들이 그려진 <My Homes>, 2010  ⓒ김슬기
한동안 천착했던 <Karma Juggler>, 2010 ⓒ김슬기
8월 20일 출국을 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기사를 쓴 전시가 서울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서도호의 <스페큘레이션스(speculation)>였습니다. 21년 전 아트선재센터에서 첫 미술관 전시를 열고 스타가 된 작가의 감개무량한 귀향이랄까요.

이 전시는 3개의 층에서 각각 다른 주제를 선보입니다. 1층은 서울-런던-뉴욕의 등거리에 집을 짓는 상상을 하는 <완벽한 집:다리 프로젝트>, 2층은 별똥별처럼 세계 곳곳에 불시착시킨 자신의 고향집(<연결하는 집, 런던>, <별똥별>)과 삼국유사 시대에 관한 상상력을 펼친 <사천왕사를 위한 제안> 등을 만날 수 있습니다. 현실화되지 못한 기상천외한 제안, 혹은 구현된 프로젝트의 모형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살았던 60여년의 집들을 모두 만날 수 있기도 하구요.

3층은 7년의 시간동안 그가 천착한 공동주택의 생애에 관한 사유를 만날 수 있습니다. 철거된 대구 동인아파트(2022)와 런던 로빈 후드 가든(2018)의 마지막 순간을 영상으로 박제한 겁니다. 2018년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 본전시에서 그는 로빈 후드 가든을 실제로 통째로 절단해 베니스에 설치했습니다. 그때 작가를 인터뷰를 한 적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죠.

"나는 미술이란 것을 우리 삶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내 작품이 늘 옮겨 다니는 것도 인생이라는 것이 끊임없는 이주의 과정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영상은 이런 면을 표현하기가 참 좋다. 다만 영상에서는 냄새와 온도, 소리를 느낄 수 없어 늘 새로운 방법을 찾는다."

철거되는 아파트를 통해 그는 젠트리피케이션의 문제의식을 심층적으로 파고 들었습니다. 그들이 삶의 흔적, 시간의 흔적을 남기는 방법은 누군가가 '기억'을 해주는 것 뿐이겠죠. 미술관에서 우리가 직접 할 수 있는 일일겁니다. 서울 전시는 시간을 충분히 들여 꼼꼼히 볼수록 더 재미가 있는 전시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서도호는 내년 5월 자신의 이력에 가장 빛나는 순간이 될 테이트 모던에서의 서베이 전시를 앞두고 있습니다. 이 전시를 앞두고 선보인 서울 전시는 작가가 2020년대 자신의 머리 속을 지배하는 중추적인 아이디어들을 펼쳐 보이는 자리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부족한 감이 있었습니다. 상호보완적인 전시가 바로 모던1의 <Tracing Time> 입니다. 제목을 굳이 옮기자면 시간의 흔적이랄까요. 저는 9월 5일 막을 내리는 이 전시만을 보기위해서 에딘버러에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충분한 보람이 있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전시는 '서도호 월드'를 담아낸 시계열이 조금 더 깁니다. 2000년대를 두루 여행합니다. 동시에 이 전시 또한 주력은 아마도 작가의 개인전에서, 처음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듯한 평면 작업입니다.

처음 만나는 작업은 <My Home>(2010)입니다. 작가는 "나는 언제나 내 집을 들고 다니고 싶다. 달팽이처럼"이라고 말했습니다. 뉴욕의 서울의 런던의 발이 달려서 '달리는 집'을 그는 자유롭게 구상해 드로잉을 합니다. 

그렇게 달리는 집과 실타래 끝에 매달린 집들이 전시장을 가득 매웁니다. 2010년 그는 뉴욕의 3층 아파트먼트를 푸른색 폴리에스테르를 사용한 반투명한 조각으로 재현해냈습니다. 이 천으로 지은 집의 청사진을 그는 2014년 드로잉으로 다시 그립니다.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집에서 구불구불 흘러나온 실타래은 무지개색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그 위엔 작가가 홀로 서 있죠. 그에게 집이란 단단한 육체가 아니라, 기억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존재입니다.  

유년기를 보낸 성북동 한옥집이 무수하게 많은 실로 작가에게 묶여 있습니다. 이 평면 작업은 <자화상>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이 집으로 구축되었음을 고백하는 듯합니다. 아파트 키즈가 넘쳐나던 시대에 그가 살았던 이 한옥집은 그의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주인공'이 됩니다. 

뉴욕에서 그에게는 아서라는 집주인이 있었습니다. 그의 작업을 응원해준 조력자였죠. <아서와 나>에는 두 사람이 긴 살타래 끝에 매달려 있습니다. 마치 마리오네트처럼요. 세대를 초월한 우정을 기념하는 그림입니다. 그의 건물에서 작가는 많은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2016년 치매로 투병한 끝에 세상을 떠난 그의 머리속을 엉크러진 실타래로 그는 표현했습니다. 

서울에서 전시된 세 도시를 잇는 <완벽한 집>을 구상하기 전, 뉴욕과 서울을 이으려했던 이전 버전의 <완벽한 집>의 드로잉과 영상, 서울에서 키네틱아트로 구현된 <군중들>의 미니어처도 만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인공지능 로봇이 그린 드로잉도 함께 전시됩니다. 모던1의 전시는 서울 전시의 완벽한 짝입니다. 
뉴욕의 3층 집을 그린 <Blue Print>, 2014. ⓒ김슬기
성북동 한옥집을 진 작가 <Self-Portrait> ⓒ김슬기
<완벽한 집>을 구상하며 그린 드로잉 ©김슬기
이번 전시에서도 천으로 지은 집은 한 작품만 설치됐습니다. 한번에 1명만 들어가 연결된 3개의 집을 통과해볼 수 있습니다. 그의 베를린, 런던, 베를린의 집을 하나로 꿰어 만든 '집속의 집속의 집'입니다. 이 공간의 옆을 뉴욕집의 문과 창문, 파이프등을 색의 파스텔로 탁본한 <Rubbing Loving> 연작이 함께 합니다. 

서울 전시에서 그는 자신이 살았던 모든 집을 양각과 음각으로 조각해 전시장에 걸었습니다. 그 이전에 그가 한 작업이 <My Homes - 3> 일겁니다. 2012년 그는 동일하게 자신이 살았던 모든 집을 드로잉으로 그렸습니다. 정면에서, 측면에서, 위에서 본 집의 도면을요. 영상 작업 속에서 작가는 이 무한히 이어지는 듯한 집들을 쉬지 않고 걸어갑니다. 

집을 탁본하고, 손때가 묻은 물건을 탁본해 그는 결국 자신의 기억을 탁본합니다. 천으로 지은 집이 그의 전시에서 비중을 줄이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그에게 집은 등에 지고 다녀야하는 달팽이집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머리 속에서, 자신의 수첩에서 꺼내 되살려 낼 수 있는 집이 되었으니까요. 

집은 그런 곳입니다. 나를 만들어낸 곳이자, 타자와 함께 공감하고 경험을 나눌 수 있는 공간. 서도호의 집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의 집을 떠올리게 됩니다. 누구나 그의 전시를 만나면 큰 노력 없이도 공감하게 되는 이유일 겁니다.  
모두에게 열린 미술관, 테이트 브리튼. ⓒ테이트 브리튼
키네틱 아트로 구현된 서울과 달리 미니어처로 전시된 <공인들> ⓒ김슬기
인공지능 로봇이 그린 작품 <ScaledBehaviour_Drowing(Inverted Monument_1_28_02), 2022> ⓒ테이트 브리튼
Art of this Week
9월 10일 막을 내린 하우저&워스 런던의 전시는 <HOSPITAL ROOMS>이었습니다. 이 기간동안 갤러리는 알록달록한 병원으로 변신했습니다. 정신 건강 환자들을 위한 창의적인 병원을 만드는 실험을 하고, 워크샵도 열었지요. 서도호, 수타파 비스와스, 피터 리버리지 등이 전시에 참여하고 경매가 열려 기부가 될 예정입니다. 작년 리만머핀 서울의 ‘삼세대: 서세옥(1929-2020)을 기리며’ 전시에서 서세옥-서도호-서도호의 딸의 작업을 한자리에서 만난 적 있습니다. 아내와 딸과 한 몸이 된 것처럼 서로 안고 있는 이 드로잉 <Family Cuddle>을 서도호는 이번 전시에 출품했습니다. 이토록 가족적인 작가가 '집'을 사랑하게 되는 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어린이들이 좋아할 아기자기한 공간으로 꾸며진 병원을 미술을 통해 구현한 갤러리. ⓒ하우저&워스
What's hot in LONDON
에딘버러성 앞의 남여주인공. ⓒ넷플릭스
영국에 도착하니 넷플릭스의 인기 드라마 순위가 꽤 달랐습니다. 영국에서 인기가 뜨거운 <원 데이>를 봤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데이비드 니콜스의 소설이 앤 해서웨이 주연 영화에 이어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건데요. 1988년 에딘버러대학 졸업식에서 우연히 만난 엠마와 덱스터가 졸업식 날 밤을 함께 보낸 이후의 20년을 매년 7월 15일의 하루만을 보여주는 매우 독특한 형식의 이야기입니다. 

똑부러지는 인도계 여주인공 암비카 모드와 한량인데다 퇴폐미의 정석을 보여주는 레오 우들의 케미가 정말 좋았습니다. 니콜스의 소설 <어스>를 보며, 정말 감탄에 감탄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혼을 앞둔 부부의 유럽 미술관 여행을 다룬 배가 아플 정도로 웃긴 소설인데요. 배우 출신의 중년 아저씨가 어쩜 이렇게 기가막힌 로맨스 이야기를 쉬지 않고 쓰는지 놀라울 정도입니다.

드라마에는 반가운 곳들이 많이 나옵니다. 초반부에는 에딘버러대학과 유명 관광지인 아더스 시트, 런던의 프림로즈힐 등이 주요한 장소로 나옵니다. 영국 여행의 추억이 있는 분들이라면 재미있게 보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국내에는 니콜스의 신작들이 번역 되지 않고 있습니다. 서점에서 <The Understudy>, <Sweet Sorrow>, <You are Here>까지 죄다 집어왔습니다. 1년 동안의 소소한 행복이 될 거 같습니다. 
오늘의 뉴스레터는 여기까지
다음주에는 두번째 에딘버러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우리 건강히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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