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시청 후 일독을 권합니다. 
• 영화의 원작 소설 <내 친구 기리시마 동아리 그만둔대(자음과모음, 2013)>을 함께 다뤘습니다. 해당 도서는 절판됐지만, 저는 운 좋게 동네 도서관에서 대출해 볼 수 있었네요. 등장인물의 이름을 딴 챕터마다 해당 인물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형식이라 영화로는 다 이해할 수 없었던 인물들의 속내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됐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에게 추천해요!

영화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는, 고등학교 배구부 주장인 키리시마가 어느 날 갑자기 배구부를 그만뒀다는 소식에서 시작한다. 모두가 ‘키리시마가 배구부를 그만뒀대?’라 묻지만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없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키리시마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아서 보는 관객은 그의 얼굴도 모르고 끝날 정도다. (그의 부재에 당혹감을 표하는 후기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맥빠지는 스포일러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키리시마가 아니다. 키리시마의 부재를 경험하고 견디는 ‘주변인’ 친구들이다. 

아니, 근데 키리시마가 누구길래?

야구부 히로키에게 키리시마는 친한 친구다. 친한 친구가 왜 학교를 그만두는지 몰라도, 그는 내내 쿨하고 심드렁한 얼굴이다.

취주악부 사와지마에게는 키리시마보다 히로키의 일거수일투족이 더 관심사다. 색소폰을 연습한다는 핑계로 학교 옥상에 올라 히로키가 농구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영화부 마에다에게 키리시마는 영화부의 앞길을 사소하게 방해하는 이름이다. 영화부는 조례 시간에 상을 받아도 비웃음을 사는데, 키리시마는 모두가 애타게 찾아다니며 촬영을 방해한다.

배드민턴부 카스미에게 키리시마는 함께 어울려 다니는 친구 리사의 남자친구다. 리사와 사나, 미카와 카스미는 같은 무리기 때문에 키리시마의 행방은 카스미에게도 절로 중요한 일이 ‘되어야 한다.’

키리시마에게서 시작한 작은 원은 아이들 사이의 틈과 선을 보여주며 파장을 넓힌다. 코이즈미는 빈자리를 채우려 고군분투한다. 키리시마를 기다리려고 농구를 시작한 히로키 무리는 농구를 그만둔다. 사와지마는 히로키를 몰래 지켜보는 걸 그만두기로 한다. 마에다는 새로운 영화를 구상한다. 카스미는 우연히 일요일에 극장에 갔다가 마에다를 만난다. 영화 속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키리시마의 존재감은 서서히 옅어진다. 대신 이들의 사소한 변화와 만남, 주고 받는 대화에 주목하게 된다. 인물들은 키리시마의 행방을 여전히 궁금해 하지만,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은 이 인물들이 만드는 일상에서 나온다.

미래는 어디까지든 펼쳐져 있다.

아냐, 출발점에서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이야. (6장 ‘다시 야구부, 기쿠치 히로키’ 중, p.171) 

마에다의 표현에 따르면, 히로키는 학교 ‘위’ 그룹에서도 ‘최상’에 속하는 남자아이다. 3학년 주장보다 실력 좋은 야구부 에이스면서, 농구도 축구도 잘하고, 눈에 띄는 외모를 가졌다. 예쁘고 잘 꾸미는 여자친구도 있다. 그러나 히로키는 ‘오후의 버스에서 깨어 방황하는 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언뜻 쿨하고 심드렁해 보이는 그의 겉모습 아래에 무엇이 흔들리고 있길래 그럴까.

영화에는 다소 불친절하게 표현됐지만, 히로키는 지구 대회에서 연거푸 패배한 뒤 야구부 활동에 마음이 떠난 상태다. 야구부에게 지정된 커다란 가방은 짊어지고 다니지만 야구로 먹고 살 것도 아니고, 전국 대회에 나갈 실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야구부 친구들이 딱히 좋지도 않은데 밤늦게까지 연습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다른 것에 관심을 두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히로키는 키리시마를 기다린다는 핑계로 농구나 하며 시간을 죽이는 것이다.

교복을 벗고, 이제 공부하라고 강요당하는 일도 없어지고. 별안간 새장에서 풀려난 듯 자유로워져. 어떤 일이든 모두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무엇부터 순서대로 나열해갈까? 

무엇을 가장 위에 두게 될까? 일렬로 나열된 많은 것 중에서 나는 과연 무엇을 고를까? (6장 ‘다시 야구부, 기쿠치 히로키’ 중, p.184)

나는 교복을 벗고도 고르는 게 무서워서 무전공 입학이 가능한 학교로 도망쳤다. 내게는 가능한 선택지가 3개나 있었다. 다른 전공을 택하면 그 길을 따라 평생 살아야 할 것만 같아 그땐 선택을 유보하는 게 합리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사범대에 갔다고 꼭 임용고시를 치를 필요도 없고, 무전공으로 입학해도 언젠간 선택해야 할 텐데 그땐 그게 정답 같았다. 그래서인지 대학 입시에서 일찌감치 자신의 갈 길을 정하고, 전공을 살려 일하는 친구들을 보면 난 경외심을 느낀다. 수많은 선택지 중 하나를 단호히 골라서, 앞으로 걸어가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원작 소설을 보면, 히로키 역시 그런 선택을 앞두고 무력한 상태처럼 보인다.

두려웠다.

열심히 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을 깨닫게 될까봐…….

사실은 새하얀 도화지라는 말을 듣는 것도, 기리시마도, (...) 전부 맞서지도 도망하지도 못하는 나 자신을 일깨우는 듯하여, 초조하고 초조하고 초조하여, (6장 ‘다시 야구부, 기쿠치 히로키’ 중, p.199)

나는 히로키의 초조함을 이해한다. 선택을 유보하면 마음이 편한 건 잠시뿐, 무엇이라도 되어야 한다는 강박과 무엇이 되어야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마음을 짓누른다. 그 와중에 자신이 원하고 잘하는 것을 기민하게 알아차린 사람이 눈을 반짝이며 다가오면 참담한 기분을 느끼기도 한다. 원작의 히로키가 영화에 몰두하는 마에다의 모습에 감명받는 동시에(마에다를 ‘빛 그 자체’라 표현할 정도다!), 초조하고 초조하고 초조함을 느끼는 것처럼. 영화 속 히로키가 마에다의 프레임에 서 있지 못하고 박차고 나갔을 때도 비슷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빛 그 자체’인 사람을 만나면 나는 나를 잔뜩 비하하거나 그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해 버리고는 했다. 조바심이 났고, 그건 대체로 나에게 나빴다.

이제 단호히 말할 수 있게 된 건, 초조함과 조바심과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서는 그걸 결국 해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도망도 쳐보고 남 탓도 해보고 고민을 털어 놓고 징징대봐도 결정이 필요하면 선택해야 하고, 잘하고 싶으면 지금 연습해야 하고, 영화를 찍고 싶으면 카메라를 켜야 한다. 고민만 늘어 놓고 행동하지 않으면, 결국 불안은 끊임없이 나를 따라 다닐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늘 ‘어떻게 하지?’라는 고민만 많이 하고, 정작 해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것 같다. 대신 나보다 한 뼘 앞서 있는 친구들을 늘 곁눈질하면서 부러워만 했다. 나는 왜 이 모양이냐며 자괴감을 느낄 시간에 내가 되고 싶은 모양을 만들 방법을 궁리했다면 여러모로 좋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과거의 나와 히로키가 느끼는 불안을 이해한다. 아직 경험하지 못한 게 많으니까, 무엇을 책임져야 할지 모르니까 겁내는 건 당연하다. 서른인 내가 이들을 위로해 보자면, 정확한 선택을 내리는 게 어른이 아니라, 선택한 것을 책임지는 게 어른스러운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러니 꼭 모든 걸 다 경험해 볼 필요도, 매 순간 확신을 가져야 할 필요도 없다고. 다만 비슷하거나 전혀 다른 경험을 통해 내가 책임질 수 있는 만큼을 알아차리면 된다고. 그러니 마에다의 말을 빌려, ‘싸우자 이곳이 우리들의 세계다. 우리들은 이 세계에서 살아가야만 하니까.’라고.

원작 소설이 2009년에 나왔으니까, 그 해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와 이 이야기 속 아이들은 대충 동년배일 것이다. (원작에서 마에다가 언급하는 영화도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나 <메종 드 히미코> 같은 작품이다. 느낌 알잖아~) 안내 방송 멘트를 읊고, 고심해 선곡한 노래를 틀던 열여덟 살 방송부 김서른은 방송과는 전혀 상관없는 어른이 됐다. 팟캐스트 진행자가 되는 게 여전히 꿈이긴 하다. 마에다는 영화감독이 돼서 <키리시마> 같은 작품을 찍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어쩌면 히로키가 영화감독이 되고 마에다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됐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게 또, 삶의 재밌는 아이러니니까.

영화는 밤늦게까지 운동장에서 연습하는 야구부를 바라보는 히로키를 비추며 끝난다. 키리시마가 떠난 배구부도, 옥상에서 싸운 여자아이들 무리도, 히로키도 다음 날엔 어떤 모습이었을지 관객은 알 수 없다.

김서른은 <아직도 하이틴>을 그만두지 않고, 오늘의 원고를 끝냈다. 

익명의 주민님이 피드백 창구를 통해 영화 <무스탕: 랄리의 여름>을 추천해 주셔서, 다음 <아직도 하이틴>에서는 이 영화를 함께 보려 합니다. 터키의 어느 시골 마을에 사는 다섯 자매가 남자애들과 물놀이한 것이 발각돼 외출 금지를 당하며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자매들은 학교에 가는 대신 억지로 결혼해야 할 처지에 맞닥뜨립니다. 과연 자매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미리 영화를 보고 느낀 점이 있다면, 함께 나누고 싶은 생각, 비슷하게 경험한 사연(?)이 있다면 자유롭게 김서른에게 알려주세요! 영화는 넷플릭스 또는 왓챠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저의 감상뿐만 아니라, 다른 주민님들은 어떻게 영화를 보고 계신지 궁금해서 이런 코너를 마련해 봤어요. 다음 레터는 저의 감상과 주민님이 보내주신 사연을 함께 버무려 준비해 보겠습니다٩( ᐛ )و 

기다리고 있을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