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철없이 살기로 했다 |  성시윤

나는야, 수영장 '언니'

“어머! 우리 언니! 수영모 바꿨네?”


흰 수영모를 처음 쓰고 수영장에 간 날. 나랑 같은 강습반에 속한 여성이 내 수영모를 보고 농을 건다. 옆 레인의 다른 반 회원들은 나와 그녀를 번갈아 쳐다본다. ‘사내더러 웬 언니?’ 하는 표정들이다.


수영장에서 언니가 된 것은 내가 자초했다. 중급반에만 있던 내가 지난해 가을 호기롭게 상급반으로 반을 변경한 첫날에 사건이 벌어졌다.   


수영장에선 같은 강습반 회원들 사이에도 '서열'이 존재한다. 서열은 수영 실력으로 결정된다. 강사가 “자, 자유형 네 바퀴!” 하면 서열대로 움직인다. 제일 빠른 이가 맨 처음, 그다음으로 빠른 이가 출발한다. 그렇게 해야 물속에서 지체가 안 생긴다. 실력이 처지는데도 앞에서 출발하면 ‘연쇄 추돌’이 일어난다. 추돌을 피하려면 온 힘 다해 헤엄쳐야 한다(엄살 아니냐고? 내가 다니는 수영장은 길이 50m, 수심 2m다!)


이러니 중급반에서 상급반으로 막 옮긴 나로선 맨 뒤에서 출발하는 게 상책이지. 내가 슬금슬금 빠지려 하는 순간. 맨 뒤에 있던 여성이 나를 막아섰다.

“남자분이 앞에 서야지, 왜 뒤로 가요?” 그녀의 어조는 강경했다.

여기서 밀리면 안 된다. 나도 정색하고 말했다.   

“아니, 수영장에서 남자, 여자가 왜 나옵니까? 실력대로 하는 거지!”

다른 여성이 끼어들었다. “남자분인데 먼저 출발하셔야죠!” 하며 여성을 편들었다.

나는 엉겁결에 말했다. “저, 남자 아니에요. 여자라고요!”

그들은 실소를 터뜨렸고, 나는 맨 뒷자리를 쟁취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언니’가 됐다. 

여성들은 친화력이 뛰어나다. 수영장에서 여성들은 엄마뻘 여성을 곧잘 언니라고 부른다. 엄마뻘 여성들도 언니라 불리는 걸 반긴다(이런 줄도 모르고 나는 초기에 ‘여사님’이라고 불렀다. 그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던 이유를 이제 알 듯하다).


수영장 여성들은 나도 언니라고 불러주었다. 어쩌다 내가 강습을 하루 빼먹으면 이튿날 “언니! 어제는 왜 안 왔어요? 언니가 없으니 재미가 없대”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런 장면을 보는 남성들은 ‘이건 무슨 상황?’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때면 동생들은 “우리 언니는 남자 아니에요. 호호호” 하며 웃었다.


어느 날 동생 하나가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언니! 꽃무늬 들어간 흰 수영모 하나 사요. 파란 수영모만 쓰면 어떻게 해?”

하릴없이 나는 인터넷을 뒤졌다. 검색창에 ‘여성’, ‘수영모’를 입력해서 내가 쓸 만한 수영모를 찾아보았다. 그런데 적당히 타협할 만한 것이 눈에 띄지 않았다. 꽃무늬가 들어간 수영모는 물론 많았다. 하지만 귀퉁이에만 조그맣게 하나 들어간 수영모는 없었다. 아뿔싸!

그렇다고 동생들의 청을 외면할 순 없었다. 아쉬운 대로 하얀 수영모를 하나 장만했다. 내 수영모가 바뀐 것을 본 동생들이 잇달아 한마디씩 했다.

“와! 우리 언니, 드디어 수영모 바꿨네!”

“어디 보자. 하늘색 꽃인가?”

“어? 고래네?”

고래! 내 수영모에 새겨진 것은 꽃이 아니다. 하늘색 고래다. 윤도현 밴드의 노래 흰수염고래 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우리도 언젠가 흰수염고래처럼 헤엄쳐 두려움 없이 이 넓은 세상 살아갈 수 있길.”

나도 열심히 하다 보면 흰수염고래처럼 유유히 헤엄치게 되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품고 이 언니는 오늘도 헤엄친다. 맨 뒤에서, 죽을 둥 살 둥. ✉️

성시윤은 글쓰기 강사다. 신문사 기자를 지내며 20여 년 매일 글을 썼다. 지금은 매일 같이 수영을 하고, 이따금 글을 쓴다. 다양한 페르소나를 꿈꾸며 새로운 도전을 즐긴다.

🍳 오늘의 요리 |  최갑수

가쓰오부시 계란말이, 이 작은 요리가 제법 성취감을 주네요

일을 하다 보면, 실수를 할 때가 있다. 실수는 여러 가지다. 챙겨야 할 것은 놓칠 때도 있고,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도 있다. 결과물을 잘 만들었는데 생각보다 성과가 좋지 않을 때도 있다. 이 모든 것을 내 실수라고 여긴다. 왜냐하면 일이라는 것은 반드시 책임 소재가 있어야 하는데, 책임질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실수를 하고 나면, 나는 나대로 열패감과 실망감이 든다. 아직 많이 멀었구나, 이것밖에 안 되는 인간이었나, 하는 생각과 함께 실의에 빠지곤 한다.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고 하루 종일 마음이 무겁다. 이런 날에는 주방으로 도망간다. 주방은 도망가기 좋은 곳이라고 언젠가 ‘굴튀김’을 만들며 말한 적이 있다.


오늘도 주방으로 왔다. 주방에 서서 팔짱은 낀 채, 주방 한쪽에 놓이고 주방 벽에 걸려 있는 조리 도구들을 본다. 냄비, 국자, 집게, 프라이팬, 냄비 받침, 찜기 등등. 각자의 모양으로 각자의 자리에 당당하게 또는 수줍게 자리 잡고 있다. 이것들을 보고 있으면 모두에겐 각자 해야 할 일이 있고, 모두는 나름 성실하게 각자의 일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별달리 쓸 데가 있을까 하고 보이는 것도 있지만 세상에 필요 없는 물건은 없다. 각자의 인생에는 자신이 없으면 안 될 결정적인 순간이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성공한 인생은 결정적인 그 순간 힘을 힘껏 발휘하는 데서 만들어진다. 성공한 국자로 살기 위해서는 국을 떠야 하는 그 순간에 뛰어 나와 힘껏 힘을 쓰면 되는 것이다. 뛰어난 스트라이커는 상대방의 골문 앞에서, 훌륭한 링커는 하프라인 근처에서, 최고의 센터백은 상대 공격수 앞에서 최선의 힘을 쏟듯이 말이다.


아무튼 오늘은 무얼 만들어 볼까. 딱히 뭔가를 먹고 싶지는 않다. 하루 종일 입맛이 없었다. 점심으로 칼국수를 먹다가 반 이상을 남겼다. 그래도 먹기는 먹어야지. 먹기 싫을 때일수록 챙겨 먹어야지. 이렇게 말해놓고 보니 뭔가 좀 옛날 사람 같지만, 그래도 뭐라도 먹어야지. 나는 옛날 사람이니까.


사각 팬이 눈에 띈다. ‘저요.’ 하고 손을 드는 것 같다. 그래, 오늘은 이거다, 계란말이. 계란말이 팬은 오직 계란말이를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다. 냄비는 된장찌개도 끓일 수 있고 파스타 면도 삶을 수 있다. 프라이팬으로는 계란 프라이도 할 수 있고 감자를 볶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계란말이 팬으로는 계란말이를 만들어야 한다. 계란말이 팬에 다른 재료를 올려놓으면 뭔가 어색하다. 검은 수트와 구두에 흰색 양말을 신은 것 같다.


계란말이는 누구나 만들 수 있는 간단하고 쉬운 요리다. 게다가 계란말이 재료는 웬만한 냉장고 속에는 있기 마련이다. 계란 서너 개를 커다란 볼에 풀어서 잘 저어주고, 프라이팬에 얇게 펼친 후 적당히 익을 때마다 감아주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계란말이는 맛이 만들 때마다 다르다. 이 녀석은 의외로 예민한 면이 있어서, 재료의 비율과 조리를 약간씩만 달리할 때마다 맛의 차이가 크게 나타난다. 모든 요리가 그렇지만, 계란말이 역시 맛있게 만들기 위해서는 조금의 노력과 수고, 세심함, 그리고 시간이 필요하다.

재료는 일단 계란과 우유(없어도 되고), 소금, 후추, 참치액(가쓰오부시 대신). 여기에 추가로 넣고 싶은 재료가 있다면 취향껏. 나는 파, 양파, 당근을 듬뿍 넣는다. 이건 어른을 위한 계란말이니까 파와 양파, 당근을 잔뜩 넣어도 된다.


재료 준비가 끝났다면, 계란을 깨고 볼에 넣고 우유를 조금씩 넣어가며 거품이 생기도록 저어준다. 소금과 후추도 함께 넣어주며 간을 맞춘다. 나는 소금을 조금 덜 넣고 참치액 한 숟가락을 넣는다. 그러면 호프집에서 먹는 계란말이 맛이 난다. 부드러운 계란말이를 만들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 볼 안의 계란물이 충분히 거품이 나도록 섞어주어야 한다. 팔이 아픈 만큼 부드러운 계란말이를 만들 수 있다.


자, 이제 팬에 식용유를 넉넉하게 두르고 중약불로 예열하자. 예열, 이것도 상당히 중요한 과정이다. 팬을 제대로 예열하지 않으면 계란말이가 끈적거릴 수도 있다. 봐봐, 세상에 쉬운 요리는 없다니까. 잠깐만 방심하면 어긋나 버린다니까. 충분히 예열이 된 것 같다면, 계란물을 조심스럽게 붓는다. 한쪽 면이 익으면 접어서 반대편 면도 익힌다. 그리고 정성을 다해 접는다. 상당히 중요하다. 그러고 보니 계란말이를 만드는 과정은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군. 계란말이, 상당히 까다로운 녀석이군. 접어지는 면에는 다진 파와 양파, 당근을 넣는다. 그리고 계란물을 더 부어가며 감고 또 감는다.


계란을 감을 때면 계란말이 팬을 만든 사람에게 감사하게 된다. 둥근 프라이팬으로 계란말이를 감기는 쉽지 않다. 모양도 예쁘게 나오지 않는다. 요리는 맛도 중요하지만 생김새도 중요하다. 일단 눈으로 보기에 이뻐야 자부심이 든다. ‘내가 이걸 만들었단 말이지? 제법 그럴싸한데.’ 하는 뿌듯함이 솟아난다. 좋은 계란말이 팬에서 멋진 계란말이가 탄생하는 법. 훌륭한 도구가 흡족한 인생을 만들어 준다.


다 만들었다. 성공적이다. 팬 위에는 어른 손바닥 만한 두툼한 계란말이 놓여 있다. 붉은색 당근이 보기 좋게 박혀 있다. 도마 위로 조심스럽게 옮기고 식힌다. 그래야 계란말이가 부서지지 않게 잘 자를 수 있으니까. 계란말이가 식는 동안 밥을 뜬다. 그리고 챗GPT에게 묻는다(요즘 여기에 다 물어보더라고).


‘오늘은 계란말이를 했어. 어떤 술이 어울릴까? 추천해 줘.’

챗GPT에 대답을 준비하는 동안 계란말이를 먹기 좋게 썰어 연두색 접시에 담는다. 노랑과 연두의 조화가 보기 좋다. 오오, 그럴싸한데, 팔아도 되겠는걸. 케첩은 계란말이 위에 뿌릴까, 접시에 짤까 잠시 고민하다가 접시 한쪽에 케첩을 짜는 것으로 결정. 탕수육은 부먹파지만, 계란말이는 찍먹파입니다.


그 사이 챗GPT가 대답을 보내왔다.

‘계란말이는 부드럽고 쫄깃한 식감과 달콤한 맛이 특징입니다. 이에 따라 계란말이에 어울리는 술은 달콤한 향과 부드러운 맛이 나는 술이 좋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맥주나 소주와 같은 도수가 높지 않은 술이 계란말이와 잘 어울립니다. 또한, 과일 맛이 강한 칵테일이나 사케, 와인 등도 계란말이와 잘 어울릴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계란말이와 사케를 함께 즐기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사케는 부드러운 맛과 높은 산미를 가지고 있어 계란말이의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을 균형 있게 잡아줍니다. 하지만, 술은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수 있으므로, 자신이 좋아하는 술을 골라 계란말이와 함께 즐기면 좋습니다. 또한, 식사 전후에 따라 술의 선택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호 이 녀석, 영리한데. 맥주, 소주, 사케, 와인…… 그러니까 뭘 마시란 말이지? 요리조리 빠져나갈 방법을 다 만들어놓았군. 역시 일은 이렇게 하는 건가?


뭘 마셔야 할지 모르겠다면 일단 맥주부터. 시원한 맥주를 컵에 따르고 한 잔 마신다. 그리고 계란말이 한 점. 부드럽고 감촉, 달콤한 맛. 계란말이의 상냥함과 다정함이 오늘의 실수를 위로해 준다. ‘오늘의 실수일 뿐이지. 내일의 실수는 아니잖아. 저녁 식탁에서는 실수를 잊자.’ 계란말이 이 녀석, 작지만 실력은 굉장하다. '위로의 선수'라는 느낌이 든다.


그래, 열패감이 들 때는 주방으로 가자. 가서 뭔가를 만들어 보자. 주방은 도망치기에 좋은 곳이지만, 용기를 회복할 수 있는 장소기도 하니까. ✉️

최갑수는 시인이자 작가다. 시집 『단 한 번의 사랑』과 에세이 『음식은 맛있고 인생은 깊어갑니다』 『어제보다 나은 사람』 등을 펴냈다. 그의 일과 일상이 궁금하다면 인스타그램 @ssuchoi를 들여다 보자.

📎 Words | 3할이면 훌륭하죠

타율 3할이면 훌륭한 타자다. 자기가 좋아하는 공을 노려서 친다. 칠 수 없는 공은 걷어내고 자신이 좋아하고 칠 수 있는 공이 들어오면 힘껏 스윙을 한다. 일도 그러할 것. 다 잘 할 수는 없다. 거를 일은 거르고 잘 할 수 있는 일에는 최선을 다해 배트를 휘두르자. 잊을 건 잊고 다시 타석으로. 
- alone & a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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