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풀칠러님. 이번 주의 에세이 당번 마감도비입니다. 오늘은 중심에 대한 세 번째 이야기로 찾아왔습니다.


이번 풀칠 레터 주제는 ‘사수로서 중심잡기’입니다. 얼마 전 태어나서 난생 처음으로 부사수와 함께 합을 맞춰 일을 하게 되었는데요. 하나부터 열까지 혼란스럽더라고요. 이게 맞나, 잘하고 있나 하는 생각에 머리가 아플 지경입니다. 여러분은 부사수 혹은 팀원과의 2인3각 달리기, 잘 하고 계신가요?

“막내가 편하다.” 인력 충원을 해주지 않는 관리자들이 해대는 농담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던 중 회사 생활에 전기(轉機)가 될 법한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일을 함께 나눠 맡을 후배 직원을 받은 것이다. “이제 저 친구는 네 부사수야. 잘 관리해.” 늘 믿고 일을 맡긴다던 상사는 마치 기사 작위를 주는 여왕처럼 엄숙하게 말을 했다. 늘 그렇듯 네, 하고 짧게 대답했다. 속으로는 ‘뭐라는 거야?’


회사 생활에서 처음으로 부사수를 맞이하는 일은 흥미롭고도 불안한 경험이다. 일단 사람이 생각이 많아진다. 그건 내 MBTI가 I로 시작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람을 대하는 게 서툴고 어렵기 때문에 내 옆에 앉은 사람이 후배건 후배 할아버지건 상관없이 복잡한 심경이 된다. 뭐라고 말을 터야하지. 밥을 먹었냐고 물어봐야 하나. 취미는 뭐냐고 물어봐야 하나. 이런 회사는 왜 왔느냐고 말을 해야 하나.


커피를 한잔 하자고 하며 사무실을 잠깐 벗어났고 자기소개부터 했다. 나는 이런 사람이올시다. 이 회사에서 몇 년차고 그전에는 무슨 일을 했고 지금은 무슨 팀에서 뭘 맡고 있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나랑 같이 이러이러한 일을 하면 된다. 약간은 어려울 수 있지만 괜찮다 금방 배울 수 있다 따위의 말을 두서없이 내뱉었다. 우리 회사가 온보딩은 따로 없지만, 이라고 입 밖으로 냈다가 후회했다. 첫 날부터 ‘런’하는 게 아닐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 순간의 두려움은 지금까지도 후배와의 관계를 쌓아가는 주된 감정 중 하나가 되고 있다. 두렵다. 퇴사한다고 하면 어떡하지?! 업무를 나누고 일을 지시하긴 해야겠는데 어디부터가 업무 분장이고 어디부터가 떠넘기기인지도 모를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날마다 일종의 기준을 만들어서 하루하루 아주 조금씩 목표치와 기대치를 높이기로 했다. 다음날 제 자리에 앉아있는 후배를 보고 말했다. “아주 잘 하셨어요.”


후배를 받는 일은 회사에서의 나를 재정립하는 일이기도 했다. 지금 회사는 차장급 이상의 관리자가 아니면 별다른 직책이나 직급이 주어지지 않는다. 보자보자~ 내가 올해로 이 일을 한 지 몇 년 째니까 나는 대리인가? 음.. 그럼 그냥 내 할 일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닌가? 아닌가? 왜 아닌가? 나는 누군가? 여긴 어딘가? 음냐음냐. “선배, 어디세요? 저는 오늘 뭘 하면 될까요?” “저는 오늘 지각입니다.. 저를 버리고 가세요.”


그렇게 누군가에게 일을 분배하고 일의 마감 시간과 퀄리티를 설정하고 피드백을 주고 조직에 잘 적응하고 있는지 살피고, 회식에는 나올 건지 눈치를 보고, 나 몰래 상사에게 왜 근무 외 수당이 없는지 물어보지는 않았는지 체크하고, 인터넷 브라우저 탭 중 ‘사람인’이 있지는 않은지 살피고 하는 이 복잡다양한 과정들은 나에게도 무척 새로운 일이다. 후배를, 부사수를 받음으로써 새로운 일을 맡게 된 수준이 아니라 일의 성격이나 내 역할 자체에 변화가 생겨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사수로서 내 역할은 반짝거리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부사수가 어느새 눈으로 욕할 줄 아는 어엿한 직장인이 될 수 있도록 돕는 일일 것이다. 물론 자기 길은 스스로 잘 찾아내겠지만. 어쩌면 나는 ‘멍청하고 부지런한(멍부)’ 사수가 되지 않기만을 바라며 노력해야 할지도 모른다. 미안합니다. 사실 저도 사수는 처음이에요. 그래서 오늘도 무사히 일을 마치고 퇴근한 후배에게 말해주고 싶다. “너, 납치된 거야."

야망백수 작년은 1월부터 12월까지 1년을 통째로 직장인으로 보낸 첫 번째 해였습니다. 반 년쯤 일하면 때려치우고 장기 여행을 가던 게 제 나름의 ‘리추얼’이었는데 말이죠. 뺀질이로 살았던 옛날이랑 비교해 보면 일도 꽤 열심히 했습죠. 뭐가 달라졌나 생각해 봤더니 제게 리드할 팀원이 생겼더라고요. 이전엔 회사를 다니는 이유가 ‘내 한 몸 먹고 살 돈 벌기 위해서’ 였다면, 지금은 ‘남의 커리어를 말아먹어서야 되겠냐’는 위기의식인 거죠.

올해는 이 위기의식을 조금 양지바른 쪽으로 옮겨보기로 했습니다. 앞으로 회사를 옮긴다고 해도 5곳 미만일 거고, 사람들을 새로 알아간다고 하더라도 기껏해야 몇 백 명 정도일 텐데, 우연히 삶의 동선이 겹친 이들과 이왕이면 멋진 일을 해내기 위해서 출근한다고 생각하려고요. 팀원들이 저를 '경제활동 인구'라는 안락한 정규분포에 붙들어두는 닻인 셈입니다.


팀원들이 제게 미친 영향을 생각해 보건대, 마감도비님에게 부사수가 생긴 건…음…회사에서 마감도비님을 붙잡으려고 술수를 부린 게 아닐까 싶은데요. 누군가는 부사수님과 티타임을 갖는 마감도비님을 보며 이렇게 혼잣말을 읊조렸을지도 모릅니다. “너 붙잡힌 거야”

아매오 : 섭동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행성의 공전 궤도가 제3의 천체의 중력에 의해 정상적인 타원형에서 벗어나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이때 제3의 천체의 개수는 복수입니다. 여기로도 끌리고 저기로도 끌리는 운명이죠.


사수로 중심잡기에 애쓰는 스스로의 모습을 볼 때면 이상하게 그 단어가 자꾸 생각납니다. 어딘가 현학적인 면이 좀 있지만 그만큼 앎이 덜하다는 것이겠죠. 그러니까 때마다 중심잡기에 매달리느라 온갖 노력을 하고.


그러다 깨달은 건 내가 중심을 잡든 말든저 친구에겐 저 친구 나름의 중심잡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당연히 중심잡힌 사수가 그렇지 않은 사수보다 훨씬 낫겠지만, 여튼 딱히 상관 없는 거 아닌가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제가 ‘사수로 중심잡기’라고 여겼던 건, 그냥 저 자신의 중심잡기였던 것이죠. 거기에 들이는 노력과 시간을 타인을 위한 것이라며 위로했던 거고. 으아아. 쓸 데 없는 자존심 부리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파주 :  사람을 향하는 감정이 두려움이라니! 세상에 그런 안타까운 일이 또 있을까 싶지만, 저도 그렇습니다. 정확히 부사수는 아니지만 비슷한 일을 하는, 하지만 이 일을 한 지는 얼마 되지 않은 분이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건네는 농담이 피드백처럼 들리지는 않을지, 재미있다고 전달한 영상에 억지 웃음을 지으시는 건 아닐지 두렵기만 합니다.


하필 며칠 전에 제 취향의 개그영상을 하나 공유한 적이 있는데 말이죠. 뒤늦게 후회가 되네요. ‘이게… 재미있다고? 유머세포가 어떻게 된 거야?’라고 생각하진 않을지… 이제 와서 어쩌겠어요. 내일 출근해서 따뜻한 라떼나 한 잔 사드려야겠습니다. 저희도 이제 입은 닫고 지갑을 열어야 하는 시기가 슬슬 다가오고 있나 봅니다. 언젠가 올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솔직히 조금 슬퍼지기도 하네요.

▲ 관리자
풀칠러A

천국에 가기 전 인생에 단 한 순간을 꼽아보라고 한다면, 저는 2023년에서는 꼽지 않을 것 같아요. 아름다운, 그리고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도 물론 많았지만요. 그런데 만약 신께서 더 많은 여유를 갖고 매년 한 순간씩, 40장면 정도 떠올릴 시간을 주신다면, 저는 퇴근 후에 겨우 3살된 아이가 고생했다며 안아줬던 그 날, 그 순간을 떠올리고 싶습니다. 비록 유치원에서 배운 내용이었다고는 하지만, 그 때의 벅차오르는 감동은 잊혀지지 않네요. 오늘도 잘 읽고 따뜻해져서 갑니다!

아매오
아이고, 정말로 감동적인 순간이네요. 사실 그런 경험을 해본 적도, 그런 감정을 느껴본 적도 없는 입장에서 공감하기 참 어려웠었는데요. 요즘엔 릴스나 숏츠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장면들이라 어떤 마음일지 일부나마 이해합니다. 아마 풀칠러님의 표정 또한 그 영상 속 부모님들처럼 놀라는 한편 기쁘고 웃음과 눈물이 함께 나오는 것이었겠죠? 저도 풀칠러님의 이야기에 따뜻져서 갑니다!

풀칠러B

일이 바쁜 것은 이제 초연한 수준으로까지 받아들였는데, 바쁜 와중에 심상해서 짜증내는 동료를 아직 못 받아들이겠네요... 어떻게든 아직까지 화는 내지 않고 있는데, 차라리 내는게 나았을까... 체한 것 같어요.

아매오

완전히 같지는 않으나 비슷한 일로 곤욕을 치렀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답답하고 괴롭고 짜증나고…그럽니다. 다행히 구조적으로 분리된 덕에 자연스럽게 해방(?)됐었는데요. 현명한 해결책을 제시해드리고 싶지만 참 쉽지 않네요. 부디 풀칠러님의 마음이 다치지 않는 선에서 문제가 풀리길 바라봅니다.
저희는 여러분의 이야기도 궁금해요. 일하면서 겪은 일, 늘상 끌어안고 있는 고민, 오늘 편지에 대한 피드백 무엇이든 좋답니다. 아래 버튼을 눌러 여러분의 풀칠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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