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의 리듬으로, 6월
이젠 정말로 비를 피할 수 없는 날씨가 서서히 다가옵니다. 예고조차 없이 내린 비에 우산도 가져오지 않아 홀딱 젖거나, 건물의 처마 끝에서 비를 피하기도 하는 요즘. 가만히 어둔 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비는 어떻게 한 방울씩 뚝뚝 떨어지는지 궁금해집니다. 이렇게 많은 빗방울이 어떻게 뭉쳐 구름이 되는지도요.

까만 먹구름이 머리 위로 몰려오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이번 비도 피하기는 글렀습니다. 높이 든 우산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의 리듬을 따라 톡 토독. 당신도 함께 걷는다면 춥고 외롭지만 않을 것 같은 기분입니다. 빗방울 사이로, 그 가운데로 들어가볼까요.
중앙으로 걷기 /별림

픽션과 실화가 혼재된 글은 둘 중 어느 쪽이 중앙일까 고민하며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가운데로 걷는 법을 연습했다. 네모로 조각난 블록들이 오밀조밀 모여 선을 이룬 인도 위, 걸을 때마다 어디가 진실된 가운데인지 한참 고민해야 했다. 어떤 선도 그려지지 않은 횡단보도의 가운데는 누구도 개척하지 않은 없는 길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니 미개척지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 하는 말인데 지도를 펼쳤을 때 중앙은 어디일까. 가장 커다란 대륙의 중앙을 기준으로 그어야 하는 걸까. 네모로 만들어진 지도의 정확한 중앙을 자로 재야 하는 걸까. 지구의 정확한 중앙은 지구본에 나와있는 걸까. 북극은 끝에 있어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선에 가까워지지도 않는 걸까. 남극은 중앙이 아닐까. 사람들이 생각한 중앙선을 전부 지도에 그어둔 다음 그 선에 걸쳐지는 땅 중 누구도 가보지 못한 땅은 있을까. 우리가 모르는 미지가 있을까. 이쪽과 저쪽으로 나뉘는 세상이라면 나는 가장 가운데가 언제나 미지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모르는 세상에 가고 싶었다. 혼자 남고 싶다는 감상적인 이야기는 아니었고, 콜롬버스가 고작 자신이 처음 본 대륙을 발견하고 최고의 모험가 타이틀을 따냈을 때 희열을 나 역시 느끼고 싶었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콜롬버스도 남의 땅을 자기 땅이라 우겼으니 나도 남이 이미 걸어간 길을 아무도 걷지 않았다고 우기는 걸지도 모른다. 애초에 사람 발이 닿지 않은 길은 어디에도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최초가 될 수 없다면 최후가 되겠다는 금세기 가장 사랑받을 로맨스 소설의 대사처럼 굴어야 하는 걸까. 모든 땅을 파내고 모든 발을 막아야 하는 걸까. 나는 아직도 어딘가에 내 이름을 박는 상상을 한다. 가령 어느 광장에 새겨져 있었던 유명인의 발 음각처럼. 어렸을 적 그 음각 위에 내 발을 겹쳐보며 깔깔 웃곤 했는데, 그래서 타르가 진득한, 새로 만들어진 도로 앞에서 나는 꼭 아무도 몰래 내 발을 슬쩍 내려 발도장 하나를 남기곤 했는데.

 

아직도 우리 마을의 오래된 도로에는 내 발자국이 남아 있다. 정작 들킬까봐 두려워 내 이름 하나 남기지 않았다. 시골 골목을 걷다 보면 도로 위에 죽죽 그어진 글자를 발견하기도 했다. 나 여기 왔다 갔다, 누구랑 같이 있었다, 그런 흔적들이 가득했다.

 

나는 종종 중앙으로 걸으며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찾았다. 양쪽을 전부 볼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보게 되는 것들도 있다. 한쪽 구석에 잠들어 있는 누군가의 글자. 우리가 남기길 바랐던 이름은 어떤 형태로 흘러갔을까. 그때의 내가 남긴 발자국은 아직도 남아 있을까. 어쩌면 내 발자국이 남은 곳부터 중앙으로 통하는 선을 긋는다면 그게 또 중앙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어쨌든 나는 여전히 욕심을 품는다. 내 가운데를 누군가 알아주기를. 그들의 가운데를 내가 알기를. 한 번도 열어본 적 없는 타인의 마음 가운데를 열어 확인해보기를. 그리고 선을 긋는다. 이 글의 가운데는 어디일지 판가름하듯이. 우리의 마음이 어디서부터 시작했는지 확신하고 싶다. 그러나 누구도 적확한 중앙을 알지 못하고 오역하는 바람에, 우리는 서로의 의미를 채 파악하지 못 하고 여기에 남았다. 모든 것이 중앙인 동그란 행성 안에.

터널 /심연



올해의 가운데 어디쯤을 지나가며. 퍼센트로 차오르는 달력처럼,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의 성취도를 알려주는 프로그램도 있다면 좋을 텐데 생각해요. 넘쳐나는 목록을 아무리 지워내도 이번 주 다음 주, 나는 영원히 바쁜 것만 같고. 퓨즈가 툭 끊겨서 전원이 꺼져버리는 기계라면 차라리 좀 나을지도요. 집 나간 의욕과 애초부터 없었던 기운을 되찾아 보려고 애쓰던 때도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걷잡을 수 없는 시간의 흐름에 몸을 아무렇게나 맡겨 두고. 질질 끌려가듯 이어지는 시간들. 사실은 다들 피곤하다는 거 알잖아요. 중심을 맞추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도요. 균형감 부족한 이 삶을 지나는 동안 우리는 우리의 시야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가운데를 가지고 싶을 뿐이었을 텐데. 투정이나 부리려는 건 아니지만 세상엔 어려운 일이 너무 많고. 그러나 꼭 정중앙이 아니더라도 뭐 어떤가요, 하나뿐인 게 아니더라도 뭐 어떻냐구요. 삼각형은 중심이 여러 개라고 하잖아요. 우리는 삼각형보다도 훨씬 복잡하게 생긴 사람들인데. 설령 중심이 이상한 곳에 있거나 아예 없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겠죠.

 

당분간 끝나지 않는 길 위를 걸으며. 원할 때 쉬어갈 수 없다고 해도, 의미 같은 건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우리는 계속해서 걸어가고 또 걸어가고. 사실 우리가 걷지 않아도 풍경은 끊임없이 뒤로 밀려가고 있으니까. 무빙워크에 올라탄 것처럼, 물살에 휩쓸리는 것처럼.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를 통과해 가고 있어요. 제자리걸음이든 도약이든 상관 없이, 우리는 계속, 계속.

 

제각각 전부 다른 모양을 가진 빗방울처럼. 부딪혀 깨어질 때조차 수없는 모습들로 무너지는 비정형의 아름다움처럼. 우리 각자의 리듬을 가지고 걸어요. 일부러 맞추지 않더라도, 서서히 스며드는 템포를 따라. 그냥 순간을 온전히 느끼면서. 우리에게서 흘러나와 우리를 둘러싸는 음악을 들어요. 그렇게 내리는 비와 함께 걸어요. 문득 피어나는 흙냄새처럼, 짙어지는 세상의 향기를 온통 맡으면서. 내가 발 디딘 이 자리가 세상의 중심이 될 수는 없더라도, 그렇다면 그깟 거 그냥 없애 버리자는 마음을 먹어보는 건 어때요. 대책 없이 중구난방인 세계라면 뭐 어떤가요. 우리는 모두 우리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을 때조차도, 그것마저 이야기로 읽어내는 사람이 어딘가엔 있어줄 텐데.

 

사랑이 있다고 삶이 무작정 아름답기만 한 건 아니지만. 어떤 사랑이라도 함께 하고 있다면, 분명 좋은 시간도 있을 거예요. 잠깐의 고통을 잊을 수 있다면 아무래도 괜찮잖아요. 나의 가운데를 내어주고 싶은 것들에게 안녕, 인사해 볼까요. 나의 바깥보다 중요한 것은 나의 내부이니까. 지금은 우리가 우리를 둘러싼 길 위에서 휘청이며 잠깐 헤매고 있더라도. 내가 걸어가는 길이 곧 내가 그리는 지도가 될 테니. 

휘청이는 날들 /자두


요즘은 자꾸 깨어있으면 생각이 나를 좀먹고 잠에 들면 꿈이 나를 갉아먹는다. 이러한 반복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한다. 거기에서 각각 떠오르는 상념들에 이유를 붙인다. 애써 변명을 생각해낸다. 나 자신을 이해시키고 합리화를 하는 것에서 그치면 좋겠는데, 인정 욕구도 있는 것 같다. 타인에게 나를 나로서 받아들이도록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괜히 SNS에 의존하기도 한다. (이때, 내가 주로 사용하는 것은 트위터다. 140자라는 글자 수 제한 덕분에 딱 그만큼으로 요약하다보면 조금은 검열이 되는 기분을 체험할 수 있으므로.) 종종 이런 나를 돌이켜보다 수업에서 말하는 ‘사유’의 시작이, ‘글’의 시작이 여기일까, 그렇다면 잘하고 있다고 조금 자만한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그런 지점이라면 사유든 상념이든 멈추지 않는 게 나에게 더 도움이 될 텐데.


들이닥친 과제 글을 제출하기 위해 노트북을 켠다. 한글 화면을 띄워 학번과 이름을 적어놓고 기억들을 떠올린다. 구체화 과정이 괴로워서 나는 생각을 멈추는 생각을 한다. 열아홉 해를 살아오며 스스로에게 커다랗게만 느껴졌던 문제들은 지하에 파묻혀 있다. 내가 서 있는 땅은, 세상은 너무 넓어서 그런 작은 기억은 묻었다는 흔적만 남아 있는 것 같다. 흔적을 찾고 땅을 파기 시작하는 나는 지금 들이 닥친 문제를 새로 끌어안고 살아간다. 애를 쓰다 지쳐서 기억을 먼저 놓아버린다. 그러고도 현재를 놓고 싶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여기서 ‘잠깐!’ 하고 외치는 만화적 연출에 익숙한 내가 끼어든다. (지금처럼 말이다.) 나는 무기력한 나를 원망한다. 그리고 무기력한 나에게 변명을 해주려고 또 기억을 헤집는다.


나는 그것들 중에서 제일 그럴싸한 변명을 골라내는 작업을 계속한다. 날 것의 마음을 보여주기에는 내가 너무 초라하고, 정리하다보면 작은 고통을 부풀려 말하는 것 같아서 망설여진다. 그렇다고 사소하게 넘기고 싶지는 않은 알량한 자존심이 다시 붙잡아 글자들을 끌어내린다. 그러다보면 노트북 화면은 여전히 새하얗고 눈은 피로해지고 두통이 몰려온다. 나는 나를 자책하며 돌아 눕는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다가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냥 머리를 뽑아서 던져버리는 상상을 한다. 사 년째 머리를 뽑아 아스팔트 위로 던지는 상상을 하다 보니 그려지는 장면이 있다. 상상 속의 내가 내 머리를 뽑는 것까지는 실제로 내가 하고 있는 반면에 그 후에는 내가 제 3자가 되어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 스스로도 웃음이 나는 지점은 깨진 내 머리가 깨진 수박과 비슷하게 흐릿한 효과로 처리되어 있는 것이다.


수업을 마칠 때까지 겁이 났다. 중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종종 이러는 날을 견디지 못하고 조퇴할 때면 ‘쟤 안 아픈데 아픈 척하는 거 아냐?’, ‘맨날 병원 간다는데 진짜야?’, ‘나도 병원간다고 조퇴하고 싶다.’ 하며 수군거리던 목소리들. 그래서 내가 학교를 그만 두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린 마음에 어린 마음들을 견디지 못해서. 다 알면서 시간을 거슬러 간다면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학교는 꼭 가야한다는 강박을 강요받으며 중학교 3년을 내내 아침마다 울고, 부모님과 말싸움을 하다 결국 내몰려서 등교했다. 중학교 3학년 때는 타의로 인해 선도부 활동을 했기에 7시까지 학교에 갔다. 선도를 위해 나가기 전까지 혼자 교실에 앉아 자해를 했다. 피를 쏟은 것도 아니었고, 상처도 그다지 깊지 않았지만 온 팔뚝이 그래야만 하루를 버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고등학생이 되던 해에, 나는 부모님에게 나를 이해시키려는 싸움을 포기했다. 계속해서 서로 상처만 입힐 바에야 나만 상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가족이라는 건 그래서는 안 된다. 서로 아끼고 사랑해야한다. 부모님이 말하는 사랑을 받으려면, 나는 학교를 가야했고, 대학에 진학해야 했고, 살아야 했다. 그래서 군소리 없이 학교에 갔고, 뭘 하면 좋을지 몰라 집에 돌아와선 잠만 잤다. 부모님은 나를 게으르다고 말했지만 나는 더 이상 변명하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그 연장선에 서 있고, 대학교도 마찬가지로 집에서 스스로를 내쫓은 듯한 마음가짐으로 등교했다. 웬만하면 수업엔 앉아 있으려고 아등바등 했다. 오늘도 그렇고 내일도 그럴 것이다. 괜찮아지고 싶어서 약을 먹지만 사실 중학교 전의 기억들은 묻은 흔적조차 모르겠고 괜찮지 않은 삶에도 가치가 있다며 이대로 살고 싶기도 하다. 머릿속에서 부딪히는 생각들이 나를 다 파먹으면 그 때에는 죽을 용기도 생길 것 같다는 생각도 한다.


죽을 만큼 아픈 것도 죽을 만큼 힘든 것도 아니라 죽고 싶다 말하면 진짜로 아프고 힘든 사람들에 대한 기만인 것 같아서 참았다가 이 글에 실어 보내려고 한다. 아무나 같이 얘기해줬으면 하는데 그렇다고 얘기를 이어나갈 힘도 없고, 이런 건 글에 쓰라던데. 라는 심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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