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밤에는 잠을 좀 설쳤습니다.
가을 소풍의 수확  

전날 밤에는 잠을 좀 설쳤습니다. 부모님과 함께 국립중앙박물관에 가기로 한 날이었거든요. 날이 갈수록 외출이 드물어지는 엄마를 모시고 어디라도 좀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한 건 꽤 오래전부터입니다. 하지만 우선 졸업부터 하고, 여름 무더위가 가시고, 이 일부터 끝내고…하며 미루다가 드디어 날씨가 선선해지고 저도 좀 한가해지니 더는 핑계가 떠오르지 않더군요. 어디선가 ‘우리들의 밥상’ 전시가 좋다는 얘길 보고 이거다 싶었습니다. 제가 운전을 못 하니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는데 식문화에 대한 전시라면 엄마도 관심 있게 보실 것 같았거든요.

 

사실 제가 언제 마지막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다녀왔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어쩌면 한 번도 못 가 봤는지도 모르겠어요. 아는 건 없지만 가을 소풍의 기획자로서 저에겐 책임이 생겼습니다. 제 표를 예매하고(65세 이상 노인은 무료입니다) 교통편을 확인하고 다른 사람들의 후기를 읽으며 일정을 구상했어요. 아이들과 함께 다녀온 적 있는 언니는 1층에 푸드코트 말고도 경천사탑 뒤쪽 한식당이 있으니 거기서 점심을 먹으면 좋다고 알려주었어요. 대략 계획을 짜고 나서 엄마에게 얘기했더니 당연히 관심 없으실 것 같던 아빠가 같이 가겠다고 하시더군요. 갑자기 불안이 밀려왔습니다. 2년 전 가족여행 후기에서도 썼듯, 아빠와 함께 어딜 다니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놀랍게도 예상보다 괜찮은 하루였습니다. 날씨는 적당히 화창했고 지하철역에서 박물관 마당까지의 통로는 쾌적했어요. 전시장에 들어선 순간 보이는 이종구 작가의 아크릴화 <밥상> 앞에 발을 멈춰선 부모님에게 “이거 그림이야”라고 설명해 드리자 두 분 모두 “사진이 아니라고?”라며 깜짝 놀라시더군요. 아빠는 3천 년 전 청동기 시대의 불탄 볍씨가 보존되어 있다는 데 감탄하셨고, 엄마는 디지털로 구현한 5첩·7첩·9첩 반상 차림을 신기해 하셨습니다. 1950년대의 장터 풍경 영상을 보며 “우리 어릴 때 갔던 그대로네”라며 기억을 더듬으셨고 장독대 앞에선 부안 할머니 댁에 있던 장독들에 관해 얘기하셨어요.

 

‘밥상’ 전시를 다 보고 나와 상설전시장도 몇 군데 둘러보았습니다. ‘기증관’에는 도자기와 공예품 등 개인이 기증한 문화유산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한 일본인 사업가가 일제강점기에 수집했던 다량의 공예품을 기증했다는 데 눈길이 머물렀어요. 그 나라의 문화재는 그 나라에 돌려주어야 한다는 부친의 뜻을 따른 거라는 설명을 읽어드리자 아빠가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엔 나쁜 놈도 많지만 좋은 사람도 참 많아. 나쁜 놈만 있으면 금세 망해버렸을 텐데 이렇게 좋은 사람이 있으니까 안 망하고 돌아가는 거겠지…” 단순한 감상이었지만, ‘프로불평러’인 아빠가 이렇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때도 있다는 걸 제 눈으로 보니 신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전시보다도 부모님을 구경하는 게 더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일상적 공간인 집에서 만날 땐 두 분이 이렇게 사소한 정보나 간단한 기술의 구현에도 즐거워하신다는 걸 몰랐거든요.

 

점심을 먹으며 저는 최근 있었던 좋은 일을 조금 더 신나게 이야기했습니다. 사실 원고료를 받았다거나, 어떤 섭외가 들어온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어쩐지 부모님에게는 다 잘 되어가는 것처럼 말하게 됩니다. 제 친구들이 그렇듯 아파서 병원에 간 일 같은 건 얘기하지 않고요. (작년에 저는 어느 대학병원에 갔다가 우연히 코앞에 계신 아빠를 보고 기둥 뒤로 도망치기도 했답니다.) 틈틈이 물을 마시고 싶지는 않은지, 화장실에 가실 건지, 여기서 잠깐 쉬고 가는 게 어떨지 챙기다 보면 이것이 ‘보호자’의 역할이구나 싶고, 제가 어릴 때 부모님이 해주었던 돌봄이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모님은 여전히 저보다 어른이지만 어떤 어른의 역할을 제가 맡게 된 거지요.

 

지하철을 타기 위해 역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던 중, 뒤에 서 계시던 엄마가 제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이고…너도 이제 흰 머리가 많아졌다”라고 한탄하셨습니다. 이르게 나기 시작한 흰 머리는 아마도 모계 유전이겠지만 그냥 웃었습니다. 아기가 태어나 자라고 자신과 함께 늙어가는 걸 보는 기분은 어떤 걸까요? 그걸 원하지는 않았지만 이럴 땐 좀 궁금해집니다.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