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탕 비가 휩쓸고 갔습니다. 크고 작은 비 피해 소식에 연신 마음이 먹먹해지는 며칠을 보내고 있습니다. 예고되어 있는 주말 비 소식은 공포감마저 일으킵니다. 가끔은 이렇게 무시무시한 재앙 앞에서 컴퓨터 자판만 두들기는 일의 공허함이 마음 한 켠에 일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아무 일 없는 듯 눈감는 것은 공허함 아닌 자책감을 불러옵니다. 긴긴 역사의 국면들에는 그 시간만큼의 재난과 비극이 새겨 있습니다. 예술가라고 비극에서 비켜설 수 없어요. 비극을 노래하는 것은 한가한 예술 놀이가 아니라 슬픔을 마주하려는 용기입니다.

Alana Blackburn

한 음악가의 작업을 알아가는 과정은 마치 어떤 차원의 공간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어느 한 작품이 그 안으로 들어가는 관문이 되어, 그 안을 돌아다니며 듣고, 비교하며 앞으로 무엇을 기대해야 할지 알아가는 겁니다. 그런 다음 비슷하게 생긴 여러 개의 문을 마주하게 된다면 먼저 들어갔던 방에서 본 친숙한 방식의 배치, 친숙한 범위의 사물들이 드러날 것이라 기대하며, 또 모두가 비슷한 차원의 공간으로 통할 것이라는 합리적인 추측과 함께 또 다른 문을 열고 들어가죠. 그렇다면 이러한 기대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는 전혀 다른 차원의 공간으로 문이 열린다면 어떨까요? 이 글의 저자가 미국 작곡가 마이클 허쉬(Michael Hersch)의 작품을 알아가는 3년의 과정이 그랬다고 합니다. 이 글에서는 허쉬가 최근에 쓴 세 개의 작품에 초점을 둔 사례 연구를 시도합니다. 저자는 먼저 세 개의 음악 작품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상이한 양상들에 대한 논의에서 출발하고요. 그런 다음 허쉬가 내적으로, 혹은 스타일적으로 일관성 있게 음악 언어를 배치하는 과정을 살핍니다. 또 작곡가가 소재로 취한 문학 텍스트에 그 스스로가 어떤 식으로 연결되는지, 그의 일련의 음악 작업에서 드러나는 표현적 관심사가 궁극적으로 그가 경험한 정치, 사회, 개인적 트라우마와 어떤 방식으로 얽혀 있는지 등을 풀어냅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저자는 한 작곡가가 음악의 혁신뿐 아니라 그가 발 딛고 선 삶의 현실에 어떻게 참여하는지, 그 실존적 변화가 작품에 어떤 방식으로 반영되는지를 비추어 냅니다.

📌 The Vanishing Pavilions (excerpts) - Michael Hersch

Carlos Garrido Castellano, J. Griffith Rollefson

Miki Kaneda

님은 혹시 16세기 독일 화가 마티아스 그뤼네발트(Mathias Grünewald, ca.1480- ca.1530)를 아시나요?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활동한 이 화가의 작품들은 중세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담고 있으면서도 20세기 초의 사회와 사람들의 모습을 예언적으로 그려 후대에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흠, 아무래도 조금 생소한가요? 그렇다면… 파울 힌데미트의 오페라 〈화가 마티스〉(Mathis der Maler, 1935)는요? 아마 이 작품은 제목이라도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화가 그뤼네발트의 환상 속 이야기를 다룬 이 오페라는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힌데미트의 대표작으로, 자주 공연되지는 않지만 꽤나 많이 연구되었습니다. 논문에 따르면, 기존 연구의 대부분이 나치 정권에 대한 작곡가 힌데미트의 대응을 오페라 속 주인공 마티스의 모습과 대비하고 마티스를 그 롤모델인 그뤼네발트와 대비하여 사회 속 예술가의 위치를 논하는 데 주로 초점을 맞추었다고 합니다. 반면, 이 논문에서는 르네상스 화가인 그뤼네발트가 19세기 후반 재발견되어 제1차 세계대전 때 민족주의의 맥락에서 독일 문화의 상징이 되는 과정과 수용의 역사를 살펴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힌데미트가 독일인으로서 자신과 그뤼네발트 사이에 유사성을 찾았으며, 이는 독일 예술을 장려한 제3제국 초기의 정책에 부합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자신의 오페라의 주인공으로 삼았다고 주장합니다. 논문 제목에 쓰인 제단화(Alterpiece)는 원래 기독교 교회 건축물의 제단 위나 뒤에 설치하는 그림이나 조각 또는 장식을 뜻하는 용어지만, 이 논문에서는 종교의 신성함을 상징하는 동시에 독일적인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쓰였는데요, 나치 정권과 충돌을 피하면서 독일 작곡가로서 자신의 예술적 정체성을 지키고자 했던 힌데미트의 고뇌가 읽히는 대목입니다.

음악학자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좋아하는 음악가나 음악작품에 대해서 떠들고 싶어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음악학자는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가나 작품을 무작정 숭배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고 따져 보는 사람입니다. 여기에서 긴장이 생깁니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과 좋아해야만 하는 음악 사이의 긴장이라고나 할까요? 이 글에서는 그런 긴장이 느껴집니다. 그 과정을 상상해 보면 이렇습니다. 논문의 저자는 본 윌리엄스의 〈탤리스 판타지아〉의 매력에 빠집니다. 그런데 이 매력적 작품은 음악사 책에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 거죠. 그도 그럴 것이 이 작품은 ‘불협화음의 해방’이 화두인 시대에 천연덕스럽게 3화음을 기초로 하고 있고, ‘아름다움’이라는 한물간 가치를 지향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니까요. 저자는 살짝 화가났을 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훌륭한 음악이 음악사에서 이렇게 가볍게 다뤄지다니!”라면서 말이죠.

그러나 저자는 곧 음악학자로서의 침착함과 냉정함을 되찾습니다. 그리고 왜 이 작품이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지 살피기 시작하는 거죠. 그렇게 시작했던 일이 점점 커집니다. 이 작품만이 아니라 서양음악사에서 뭔가 어색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영국음악사의 문제, 그리고 그 문제의 핵심인 ‘영국성’의 문제, 그리고 정전과 천재의 문제에까지 가닿게 되구요. 자, 과연 저자는 어떤 결론으로 나아갔을까요? 좋아하는 음악과 좋아해야만 하는 음악 사이의 긴장을 느끼는 분이라면 한번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저자는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이나 그 음악을 좋아하는 자신의 마음에 대한 변명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이 했던 작업이 음악학자들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까지 주장합니다. 그리고 저도 그 주장에 동의합니다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