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신학자 #80 철학자에 관하여 #81 로완 윌리엄스의 글쓰기, 인용하기(1) #82 히브리어 수업 #83 장 칼뱅의 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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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은 희미하지만 근본적인 것이고 근본적인 만큼 공유하기 어렵다. 잠을 자려고 하는 시인과 소설가들 앞에서 내가 춤을 추기도 했을 것이고, 내가 춤을 출 때 독자들이 잠을 자기도 했을 것이다. 때로 우리는 한 배를 타게 되지만 그 배가 하늘로 날아오를지 벼랑으로 떨어질지 대부분 알지 못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그런 줄을 알면서도 그 어떤 공동체를 향해 노를 젓는 일이다.
_신형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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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로완 윌리엄스, 그의 글쓰기에 관하여 세 번째 – 인용하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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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독자님.
민경찬 VIA 편집장입니다.
로완 윌리엄스의 글쓰기를 살펴보면서 그의 사상의 결과 깊이를 더듬어보는 세 번째 시간입니다. 이번에는 로완 윌리엄스가 어떤 방식으로 인용을 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지요. 기본적으로 인용이란 남의 말이나 글을 자신의 말이나 글에 끌어 쓰는 행위를 뜻합니다. 크게 인용은 두 가지 방식으로 쓰입니다. 우선은 ‘나’의 주장이나 해석을 지지해 줄 수 있는 ‘내 편’을 끌어들이는 방식입니다. 내 생각의 뿌리가 되는 이들, 내 현재 생각에 도움을 준 이들을 밝히는 방식도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둘째는 ‘적’을 끌어들이는 방식입니다. 자신의 주장을 선명히 하기 위해 자신의 주장, 혹은 믿음과 대척점에 서 있는 이들, 그들의 전통을 밝히고 그들이 어떤 점이 잘못되었는지를 비판하고, 때로는 비난하지요. 이러한 맥락에서 인용은 글쓴이가 자신의 친구와 적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이야기하는 바가 ‘진리’와 관련되어 있다고 여기는 기독교 사상가들은 후자의 방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곤 했습니다. 자신의 입장과 다른 이들을 향해 비난을 퍼붓는 공격적 수사들은 기독교 저술가들의 글에서 흔히 엿볼 수 있지요. 마르틴 루터는 한때 자신이 커다란 영향을 받고, 찬사를 보내기도 했던 에라스무스에게 이러한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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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무스가 교황의 미신들을 공격했을 때 그것은 세상을 매혹시켰던 사탄의 놀라운 기만이었습니다. 그런 후에 에라스무스는 자신의 담화록들에서 표현한 사악한 의견들로 젊은 사람들을 타락시켰습니다.
_마르틴 루터 <탁상담화>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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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은 세르베투스를 반대하며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목회자들에게 이런 편지를 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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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인 오류들로 가득한 유해 출판물로 오염시켰던 에스파냐 사람 세르베투스의 이름을 틀림없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 이 쓸모없는 인간이 최근에 일부는 이전 책에서 가져오고 일부는 지어낸 새로운 허구에서 가져와 더 두꺼운 책으로 짜깁기하여 만들어 냈습니다. ... 얼마나 오류가 많은지 ... 하나님을 대적하는 끔찍한 신성 모독이 넘쳐 납니다. 모든 시대의 경건치 못한 헛소리를 모아 놓은 광기 어린 책을 직접 확인해 보세요. ... 이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형을 선고하는 게 차라리 나을 겁니다. ... 전염병 같은 독이 더 퍼지지 않게 하는 것은 여러분의 의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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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는 틸리히를 언급하며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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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리히는 양자(철학과 신학)를 질문과 대답의 끊을 수 없는 상관관계 안에서 통합하려고 했으며, 타율과 자율이라는 이원성을 신율이라는 사고의 단일성 안으로 지양시키려고 했다. 그와 같은 철학자가 또한 신학자도 되고 싶어 했다니!
_칼 바르트 <개신교신학 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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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공격적인 수사들은 자신의 지지자들을 결집하게 하며, 당시 맥락을 고려해보면 충분히 이해할 만한 여지가 있고, 거친 말임에도 어느 정도 새겨볼 부분이 있습니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 이들 중 가장 공격적인 수사학에 능했던 루터조차 자신이 적이라고 여기는 쪽이든, 친구라고 여기는 쪽이든 궁극적인 판단은 하나님께서 하시지 자신이 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는 걸 염두에 둘 필요가 있지요. 하지만 적들을 언급하며 증오의 수사학을 쏟아내는 방식이 얼마나 짙은 그늘을 만들어 냈는지를 새삼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이런 수사들은 대체로 그 수사들이 의도한바 이상의 폭력을 낳는 원료로 쓰였습니다. 루터의 가톨릭 교회, 유대인, 무슬림에 대한 수사들이 로마 가톨릭에 대한 극심한 적대감, 반유대주의, 반이슬람주의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쓰였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요. 때로는 적들의 이야기들이 울려 퍼지지 못하게 됨으로써 오히려 적들이 비극을 맞이한 영웅으로, 거짓에 억압당한 진실을 이야기한 이들로 미화되거나 낭만화하는 움직임도 일어났습니다(도마복음을 대표로 하는 영지주의 복음서들에 대한 과도한 주목과 상찬, 마르키온, 아리우스, 펠라기우스등과 같은 고전적인 이단들을 혁신적인 움직임으로 평가하는 어떤 현대 신학의 경향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로완 윌리엄스는 자신의 친구와 적을 어떻게 대할까요? 젊은 시절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상처 입은 앎>에서 그는 그리스도교 사상사에서 대표적인 이단으로 꼽히는 펠라기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를 비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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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의 세계와 펠라기우스의 세계 사이에는 논쟁이 있을 수 없다. 그 간극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세상을 어렵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길들일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발휘하고 확장할 수 있는, 도전해 볼 만한 곳으로 여길 것이다. 그에게 세상은 영웅주의heroism가 가능한 세상이다. 그는 선한 대의를 믿고 맑은 눈과 깨끗한 양심으로 자신과 타인을 개선할 수 있고, 이를 추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죄는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 의도적인 비행非行과 관련이 있고 덕은 책임을 지는 것, 자발적으로 법, 질서, 도덕을 따르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세상에는 언제나 정답이 있다. ... 이와 달리 누군가는 세상을 단순히 살기 어려운 곳이 아니라, 견딜 수 없는 곳으로 본다. 그에게 세상은 헤아릴 수 없으며, 어떤 도전과 기회가 있다 해도 뚜렷이 보이지 않고, 인간의 완전한 패배만을 드러낼 뿐이다. 그렇기에 어떤 의미에서 이 세상에 영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동기가 불확실한, 영웅으로 보기 어려운 비극 속 주인공들만 존재할 뿐이다. 이런 세상에서는 가장 열정적으로 행동하는 이들조차 희생자다. 도덕적으로 나아질 수 있다는 전망, 사회가 개선될 수 있다는 전망은 분명한 실패와 퇴보로 인해 흐려진다. 죄와 덕은 애매하고 양가적인 개념이다. 책임감을 갖는 것, 신중히 선택하는 것은 좋든 나쁘든 별다른 동기 부여가 되지 않는다. 이런 세상에서 정답이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렇기에 제일 중요한 범주는 죄와 사랑이다. 둘은 모두 측정이 불가능한, 열정적인 힘이다. 온화한 도덕주의자의 성실함은 우리가 실제로 정직한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다는 절망적인 정직함 앞에서 무너진다. 우리 자신에 관한 진실을 볼 수 있다고, 혹은 말할 수 있다고 확신하기에 우리 영혼에는 모호한 부분이 너무나도 많다.
_<상처 입은 앎>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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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어렵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길들일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발휘하고 확장할 수 있는, 도전해 볼 만한 곳으로 여”기는 이는 펠라기우스고 “세상을 단순히 살기 어려운 곳이 아니라, 견딜 수 없는 곳”으로 여기는 이는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여기서 로완 윌리엄스가 아우구스티누스의 편을 들고 있음을 알아차리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후자의 경우에 가장 중요한 범주가 “죄와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고, “죄와 사랑”은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중요한 범주이기 때문이지요. 로완 윌리엄스에 대해 좀 더 알고 있는 분이라면 이 대목을 애써 읽지 않아도 그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았음을 여러 곳에서 밝혔기에 결국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손을 들어줄 것이라고 예상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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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세상 중 어떤 세상이 “그리스도교적” 관점에 부합하는 세상이냐고 (거칠게) 묻는다면 대답은 어느 쪽도 아니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의 표지는 절망도 아니고 온화한 확신도 아닌, 신앙이기 때문이다.
_<상처 입은 앎>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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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천재성과 업적을 인정하고, 그의 사상에 커다란 빚을 졌음을 노골적으로 밝히면서도 그가 그린 그림이 어떤 위험에 빠질지를 좌시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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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가 제시한 그림은 자칫 비합리주의irrationalism, 정적주의quietism에 빠질 위험이 있으며, 아우구스티누스주의Augustinianism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결코 용인하지 않았을 무책임한 일들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쓰이곤 했다. 망가진 마음을 치유하는 사랑에 대한 전망을 잃는다면 그리스도교는 언제든 이런 위험에 빠질 수 있다.
_<상처 입은 앎>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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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증오의 수사학을 통해 피아식별을 분명히 하고, 상대를 억누르는, 그리하여 (부지불식간에) 자신이 지지하는 입장을 어떠한 흠결도 없는 입장으로 만들어버리는 기독교 사상가들의 인용 방식, 서술방식과는 다릅니다. 그는 덜 적극적인 방식으로, 어떤 면에서는 비판적인 시선을 잃지 않은 채 아우구스티누스를 지지하고, 덜 공격적인 방식으로 펠라기우스를 비판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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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제시한 그림을 “기꺼이” 볼 수 있는 능력, 즉 세상을 분명하지 않은 곳으로 볼 수 있는 능력, 인간의 영혼이 혼란스럽고 환상들에 갇혀 있음을 볼 수 있는 능력에 의지한다. 펠라기우스주의자(혹은 합리주의자)는 갈라진 마음을 보지 못하기에 치유와 화해의 필요성을 보지 못한다.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바울의 이해가 옳다면, 인간에게는 근본적으로 화해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렇다면 아우구스티누스의 세상은 펠라기우스의 세상보다 좀 더 복음에 열려 있다고 할 수 있다.
_<상처 입은 앎>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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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이 지지하지 않는 이들, 더 나아가서 자신이 반대하는 이들에게서도 ‘선의’를 보려 합니다. 이는 기독교와 완전히 대립각을 세우는 비기독교인, 무신론자들을 대할 때 잘 드러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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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스티븐 호킹 - <인간이 된다는 것> (내가 대단히 존경하는 철학자) 대니얼 데닛 - 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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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호킹, 대니얼 데닛은 모두 기독교에 회의적이거나 비판적인 무신론자들로 널리 알려진 이들이지요. 그럼에도 그는 “위대한”, “대단히 존경하는”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그들을 존중합니다. 심지어 그는 ‘신무신론 운동’을 이끌었던 리처드 도킨스를 긍정적으로 언급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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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점에서 저는 리처드 도킨스가 쓴 글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이 글에서 그는 세계에 대한 경이로움과 경외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저 16세기 신비주의자(십자가의 성 요한)를 메아리처럼 따라 합니다.
_<삶을 선택하라>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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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들에게 악명 높은 리처드 도킨스가 (<상처 입은 앎>에 따르면 기독교 영성을 가장 포괄적으로 보여준) 십자가의 성요한을 메아리처럼 따라한다니 흥미롭지 않나요? 이러한 태도는 기독교 세계 안에서 로완 윌리엄스가 반대하는 신학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일관되게 적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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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독일의 가장 위대한 교회사가였던 요한 로렌츠 폰 모스하임 ...
_<과거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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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점은 요한 로렌츠 폰 모스하임은 로완 윌리엄스가 <과거의 의미>에서 가장 강하게 비판하는 사람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가장 위대한 교회사가”라는 표현을 붙이며 자신과 반대되는 입장에 서 있는 모스하임의 공헌을 존중하지요. 기독교 안에서 자신과 견해를 달리하는 이들이든, 기독교 밖에서 자신과 거리가 먼 사람이든 로완 윌리엄스에게 ‘적’이란 ‘내가 살려면 네가 죽어야 하고, 네가 살려면 내가 죽어야 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 혹은 결투장의 상대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내 친구들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 이들에 가깝지요. 그렇기에 그는 상대의 선의와 공헌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당신과 나의 입장이 왜 끝끝내 다를 수밖에 없는지를 세심히 살핍니다. 앞서 언급한 기독교 사상가들, 특히 루터와 바르트가 그 빛나는 업적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반대한 이들(루터의 경우에는 중세 신학, 바르트의 경우에는 틸리히나 불트만, 혹은 에밀 브루너)에 대한 이해가 대체로 편향되었다는 평가를 받는 반면, 윌리엄스가 그런 평가를 잘 받지 않는 건 바로 이 자신의 적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 적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서 나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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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님과 소통하며 함께 <이달의 신학자>를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오늘의 뉴스레터를 어떻게 읽으셨는지 독자님의 생각과 민경찬 선생님에게 하고 싶은 말을 보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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