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이 켜켜이 쌓인 부산의 어느 곳에 대하여
2024.1.23. 열한번째 이야기
70대 아버지, 30대 두 딸이 함께 같은 주제로 글을 써내려가는 뉴스레터 '땡비'
땡비에서 나눠볼 오늘의 이야기는 🐝부산에서 기억하고 싶은 장소입니다. 여러분이 사는 도시에서 꼭 기억하고 싶은 곳이 있나요? 생각만 해도 행복하거나 혹은 아려오는 자신만의 장소가 있는지 곱씹어 보았습니다. 이번 글을 준비하면서 몰랐던 가족의 이야기를 알게되어 많이 울고 또 울었습니다. 오늘 땡비와 함께 여러분의 마음에 박혀있는 장소가 어딘지, 어떤 의미인지 편하게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고관 입구 3층집(@못골)

결혼할 때는 참 암담한 시기였다. 무엇을 시도해도 취업이 되지 않으니. 장애물로 꽉 막힌 듯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제대하고 복학한 뒤로 2학년 2학기부터 야간학교 강사로 일했다. 생활비가 급했다. 졸업하고 야학을 그만두고 결혼 전 아내의 도움으로 취업 시험을 준비하려 남산동에 있는 ‘문창 고시원’에 들어갔다. 들어가서 보니 나처럼 나이 많은 절박한 사람들이 고시를 목적으로 쉼 없이 공부를 하고 있었다. 

금방 들어온 나에게 같은 방 고시생이 물었다. 

“형씨는 무슨 공부를 해요?” 

“나는 오래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되어서 6개월 정도 예상을 하고 6급 공무원 공부를 한다. 제대로 되지 않을 경우 연령제한이 없는 순위 고사 준비도 함께하고 있다”라고 했다. 

“선택의 여지가 있어 좋겠다”며 부러워했다. 그들은 그냥 계속 고시생으로 낭인이 되어 공부에만 전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고무신을 신은 채 수염도 깎지 않고 시험장에 갔다. 꼭 합격해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절박하면 통한다는데 절박하기 때문에 오히려 되지 않기도 하나보다. 또 낙방이었다.      


나보다도 아내는 동생이 여럿 있어 결혼이 급했다. 어머니가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결혼을 해보는 것도 난국을 헤쳐가는 방법이 되니 결혼을 하는 것은 어떻겠냐?”하며 물었다. 어머니와 의논하여 우선 결혼을 하기로 했다. ‘결혼하면 또 다른 변화가 있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도 함께 하였다. 그만둔 야학에서 “다시 일을 해달라”며 연락이 왔다. 다른 수입원이 없기 때문에 최소한의 생활비가 필요해 다시 출근하였다.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신랑집에 딸을 데려다주고 가시는 장인어른을 보면서 참 면목이 없었다. 야학에 나가서 겨우 알바처럼 일하는 반실업 상태에 있는 사위를 보고 얼마나 낙심했을까? 처음 우리 집에 와서 딸을 두고 돌아가는 그날 장인어른과 함께 걸었던 수정동 산복도로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아내와 사이가 나빠지면 늘 그때를 기억해 본다.


결혼 후에도 여기저기 취업원서를 내었지만 계속 실패였다. 막연히 시험만 기대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니던 야학을 그만두고 조방 앞 성모병원 근처 화랑 염직 회사 현장 노동자로 취업하여 맞교대로 근무했다. 포충기(원단 폭을 늘리는 기계)에 원단의 양쪽 가장자리를 기계가 물어서 당기면 원단에 수증기로 열을 가하여 펴고 말아서 저장하는 작업이었다. 열기로 늘 수증기가 안개처럼 피었다. 12시간 일을 하고 12시간 쉬는 근로제였는데 자고, 먹고, 일하고 그 이외는 어떤 여유도 없었다. 세상 돌아가는 일로부터 격리된 생활이 이어졌다.     


점심시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작업반장이 아미동에서 출퇴근하던 직원의 이야기를 나에게 해주었다. 그 직원이 월급을 받은 어느 몹시 추운 겨울날 퇴근하여 조방 앞에서 아미동 집까지 걸어서 갔다고 한다. 군데군데 있는 포장마차나 잔술집에 들러 한두 잔씩 소주 대포를 계속 마시며 걸어서 자기 집까지 갔다. 그는 눈길 속에 집에 거의 이르러 쓰러져 아침에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저임금으로 생활이 되지 않으니 가난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가난의 굴레로 절망감이 얼마나 컸을까? 작정하고 월급으로 술을 마시며 걸어서 자기 집까지 걸어갔을 그의 좌절을 생각하면 얼마나 암담한가?

야간작업 중 자정이면 야식으로 제공되는 국수를 노동자들이 욕심내어 지나치게 많이 먹고 여기저기 토해 놓는 경우도 무수했다. 원단 운반 수레 속에 처박혀 잠자는 노동자들을 보며 ‘세상 사는 것이 모두 참 힘들구나’하고 생각하였다.      


신문광고란에 강사모집 광고를 보고 찾아간 학원에서 강의하게 되어 염직 회사는 그만두었다. 수업한 시간 수에 곱하여 수당을 주니 염직 회사에 근무할 때보다는 수입이 좋았다. 

신혼집은 동대신동 적산가옥(敵産家屋:적들의 재산. 왜놈들이 살던 한옥)이었다. 부엌과 방이 붙어있고 방의 창문을 넘어서 부엌으로 가야 하는 불편한 구조였다. 그렇지 않으면 방을 나가서 한참을 돌아 부엌으로 가야 했다.      


신혼집에서 두 번째로 이사 간 곳이 고관 입구이다. 이 고관 입구는 윤흥신 장군 동상이 있는 대로변 옆 3층 집이다. 나는 이 집에서 내 인생의 많은 변화를 맞이했다. 1층은 보장구(장애인의 활동을 보조하는 기구)를 만드는 공장이고 2층은 주인집이 사용하고 3층을 우리에게 임대해 주었다. 이사 간 첫날 친구들과 술을 한잔하고 집에 들어가려니 잠긴 3층 출입구를 열지 못해 끙끙거리다가 주인집 문을 두드려 좀 열어 달라고 했다. 자고 있던 집주인은 기독교인이었는데 술 마시는 자체도 싫어했지만 밤늦게 무례하다고 생각하여 매우 불쾌한 표정으로 응답을 해주며 그날 이후로 술 처마시는 무례한 인간으로 나를 취급해 주었다.      


이 집에서 30분 정도를 걸어가면 어머니에게 갈 수 있었다. 어머니를 자주 볼 수 있는 가까운 거리로 오니 나는 좋았다. 어머니는 무슨 별식을 만들면 갖고 와서 먹으라고 했다. 그러면서 아이가 없는 우리를 보고 어머니는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냐? 못 낳는 것이냐?”며 애타하셨다. 학원 강사로 일하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보너스로 받은 돈 한번 써보면 좋겠다”는 말로 은근히 정규직 교사가 되길 바랐다.   

   

예비군 훈련을 마치고 오니 어머니가 배가 아프다고 하셨다. 성분도 병원에서 진찰을 받으니 “가벼운 위궤양이고 예사로 있는 경우이니 조금 치료하면 나을 것"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젊을 때부터 담배를 피우고 위장이 좋지 않아 노신(원래 명칭 뇌선. 하얀색의 해열진통제)을 자주 드셨다. 그렇게 살아오셨으니 당연히 그러려니 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났다.      


2달이 지나가는데도 어머니의 복통은 계속되었다. 그제야 ‘아차! 이것 무슨 일이 있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부산대학병원에 가서 긴 줄을 선 많은 환자들이 대기하고 있는 뒤에 이어 섰다. 속으로 ‘아무런 일도 없겠지! 그냥 약만 조금 먹으면 될 것’이라는 의사의 말을 내게 빙의하여 나 자신에게 말을 했다. ‘그냥 예사로운 병일 거야!’ 그래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순서가 되어 손으로 진찰해 본 나이 많은 의사가 “아무래도 간암인 것 같다”라고 하며 정밀 검사를 받아 보자고 한다. 하늘이 노랗게 변하는 절망감이 엄습했다. 검사를 위해 순서를 기다리며 근처 여관으로 가서 쉬면서 차례를 기다렸다. 검사 결과는 간암이었다. 하늘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이 일을 어떻게 하나’ 그 시절에는 간암은 사망진단이었다. 대학병원에서 어머니가 아침에 드실 죽을 사기 위해 토성동 시장으로 걸어가면서 깨어나면 '아무 일도 아닌 차라리 꿈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기원을 몇 번이고 하였다.      


집에서 부산대학병원까지 멀고 병시중하기도 힘들어 일단 수정동 집으로 퇴원하였다. 보건소에 근무하는 학원의 제자에게 부탁하여 진통제를 소개받고 사서 아내가 근육주사 놓는 방법을 배워 집에서 주사를 놓았다. 입원비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복수가 차고 힘들어 견디지 못할 상태가 되었다. 다시 고관 입구 집 근처의 침례병원으로 입원하였다. 

계속해서 복수는 차오르고 어찌할 수 없는 병으로 고통스러워하시는 어머니를 옆에서 지켜보는 하루하루가 쓰라리게 괴로웠다. 치유 불가능한 병은 절망감을 주어 곁에 있는 가족도 병들게 한다.


학원에서 수업하고 있는데 총무 아가씨가 급히 뛰어와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라고 알리며 그녀도 당황하여 울었다. 급하게 병원으로 가자 아내가 “조금 전에 돌아가셨다”라고 한다. 

참지 못할 고통 속에 시간을 견디시더니.......


한 사람의 인생, 한 하늘이 무너져 버렸다. 한 번도 만족스레 꽃피지도 못하고 늘 가난과 걱정 속에 평생을 허덕거리며 살다가 쓸쓸히 인생을 마감해 버렸다. 운구차가 석계로 가는 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다. 마지막 길마저 아들을 생각해 주시는 어머니 마음 같아 서양 미루나무 뒤로 길 따라 흐드러진 코스모스를 보며 통곡했다.      


1985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몇 달이 지났다. 그 해 처음 실시하는 사립학교 임용고사 원서를 접수하고 시험일이 되어 아내가 어서 시험 치러 가라고 깨운다. 공립임용고사를 빠지지 않고 응시했지만 계속 낙방이었다. 이불속으로 도로 머리를 처박아 넣으니 억지로 깨워 다녀오라며 어깨를 밀었다. 옷을 챙겨 입고 가야고등학교 정문을 들어섰다. 긴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는 응시생들의 뒤에 붙어 섰다. 시험에 관한 이야기를 여자 응시생끼리 나누고 있었다. 질리는 느낌이었다. ‘저 사람들은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을까?’ 하는 나름의 짐작을 했다.      


온갖 기억을 짜내어 시험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이후 시험 결과는 잊고 학원 생활에 전념하고 있었다. 1986년도 1월 아침에 고등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면접을 오라고 하였다. ‘내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지? 임용시험에 합격한 것이구나!’ 하는 직감이 느껴져 학원에 출근하며 아내에게 “가야고등학교에 가서 확인해 봐요”라고 했다. 학원으로 전화가 왔다. 전화기 너머로 아내가 흥분된 목소리로 “시험에 합격했다고 담당 직원이 축하한다고 말해주었다”라고 한다.      


갑자기 “내 죽으면 네가 잘 풀릴 것이다”라고 하던 어머니 말씀이 떠올랐다. ‘그래! 어머니의 염원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다!’고 생각하였다. 이후로 꽉 밀려있던 인생의 한 부분이 물꼬가 트이니 성큼성큼 큰 발걸음을 옮기며 나아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학교로 임용되고 해직, 복직을 거쳐 2015년도 퇴직을 하였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 문을 두드려야만 기회도 잡을 수 있나보다. 고관입구 집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학교에 임용되고, 어머니가 그렇게 기다리시던  소중한 첫 아이를 낳았다. 인생의 한 굽이를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이 집에서 내 인생에 가장 의미 있고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휘몰아치며 지나갔다.


고관 입구 그 집에 작년 11월에 가보았다. 장애인 보장구를 만들던 1층은 음식점으로 바뀌어져 있으나 2층과 3층은 옛날 그대로였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그때 집주인 아주머니가 흰머리가 많이 나 있었지만, 얼굴은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인사를 하니 모르는 눈치이다. "84년쯤 이 집 3층에서 살았던 사람인데 모르시겠습니까?" 하고 물으며 표정을 읽으니 치매에 걸린 듯 멍한 모습이다. 한참을 옛날 이야기를 하자 어렴풋이 기억난다면서 모호한 표정을 짓는다. 인사를 하고 나오면서 인생이 참 허망하다.

대티고개의 내력벽(@흔희)

 산과 바다가 함께 어우러져 있는 부산에는 유난히 구비구비 높은 고개가 많다. 두 다리로 걸어다니는 것이 이동의 전부였던 시대에 도보꾼들은 험준한 산을 타기가 힘들어 고개를 찾아다녔다. 비탈진 곳을 넘어다닌 사람들의 발자국들이 모여 길이 났고 그 길은 고개가 되었다. 부산에는 대티고개, 영선고개, 문현고개, 만덕고개 등 험준한 지형만큼이나 다양한 고개가 머리를 치들고 있다. 고개는 지름길인 동시에 마을과 마을을 구분해주는 경계선이 되기도 했다는데 그 중 대티고개는 내가 신혼의 첫 둥지를 튼 곳이기도 하다. 대티고개는 부산의 서쪽 길목에 자리잡고 있다. 그 옛날, 부산진에서 하단에 서는 장에 가기 위해 아낙네들은 재첩을 머리에 이고 대티고개를 넘었다. 대티고개 주변의 마을인 괴정과 하단의 사람들은 대티고개를 ‘재첩고개’라고 부르기도 한다.


처음 마련한 신혼집은 대티고개의 중턱에 자리 잡고 있던 아파트였다. 도로길 옆의 큰길을 따라 비교적 완만하게 둘러 집까지 올라갈 수도 있었지만 성격이 급한 남편과 나는 지름길을 찾아 그 길로 자주 다녔다. 산 비탈길을 계단처럼 깎아 터를 닦은 곳에 주택들이 밀집되어 있었다. 우리가 찾은 지름길은 그곳에 난 계단길이었는데 계단의 턱도 높고 가팔라서 자칫 발을 헛디디면 그대로 굴러 떨어질 법한 곳이었다. 길을 따라 내려가면 버스 정류장이 있었고 횡단보도를 건너면 간단하게 시장을 볼 수 있는 작은 동네 마트가 있었다. 당시 차가 없었던 우리는 그 길을 따라 장을 보곤 했다. 하루는 집들이를 준비하기 위해 등에 배낭을 짊어지고 시장을 봤다. 둘이서 손을 꼭 잡고 가파른 비탈길을 올라가는데 남편 가방에서 짤랑짤랑 소리가 들려왔다. 소주병이 부딪치며 나는 소리였다. 등에 짐을 메고 헉헉거리며 올라가는 남편이 영락없는 봇짐장수 같아 웃음이 터졌다. 내 웃음에 덩달아 남편도 웃음이 났던 모양이다. 둘이서 그렇게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웃었다.


결혼한 지 7개월 만에 아기가 찾아왔다. 뱃속에서 잘 놀고 있는지 병원에서 아기를 확인하고 돌아오던 길도 늘 그 비탈길을 올라 다녔다. 남편은 검진일마다 함께 병원을 다녀와주었다. 아기를 보고 싶은 마음도 있고 혼자 병원에 보내기에 안쓰러운 마음도 있어서 그렇다고 했다. 더운 여름날엔 아이스크림을 서로 입에 하나씩 물고, 배가 무거워 뒤뚱이는 나를 남편이 뒤에서 받쳐주며 비탈길을 오르내렸다. 10개월이 지나 아기는 태어났고 친정에서 몸을 풀고 돌아온 곳도 대티고개의 아파트였다. 남편은 집을 말끔하게 치워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기 침대에 이제 겨우 50일을 넘긴 아기를 눕혀 놓았다. 혹시나 깰까 봐 숨죽이며 아기가 자는 모습을 둘이서 바라보았다. 그렇게 우리는 둘이서 시작한 곳에서 셋이 되었다.


아기가 태어나니 몸도 마음도 힘들었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아기를 안고 나는 밤마다 전쟁을 치러야 했고 호르몬과 피로감에 날카로워진 나를 받아내야 하는 남편도 지쳐갔다. 그중에서 제일 내가 힘들었던 것은 고립감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여 활발하게 했던 사회생활이 단절되었다. 13살 때부터 결혼하기 전까지 살았던 동네를 떠나와 정착한 대티고개에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남편이 직장에 나가 있는 동안 나는 말 못 하는 아기와 함께 하루를 보내야 했다. 언덕이 가팔라 유아차를 끌고 어딜 나갈 수도 없었다. 잠깐 낮잠이 든 아기를 누이고 나면 빈 적막감이 집을 가득 메웠다. 앉아서 흰 벽을 바라보고 멍하니 있을 때가 많았다. 가족들이 보고 싶었고 친구들이 보고 싶었다. 어른과의 대화가 그리웠다. 약속을 잡고 있는 친구들의 대화 메시지를 볼 때마다 이렇게 잊혀지는 것 같아서 허무했다. 점점 인간관계가 쪼그라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식을 만들기 위해 채소와 고기를 곱게 다져놓아도 그것은 아기의 입맛에 달린 일이었다. 내가 열심히 노력한다고 그것이 좋은 결과로 반드시 이어지지 않는다는 세계의 진리를 나는 육아를 통해 배웠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아무리 노력한들 상황이 뒷받침되어주지 않으니 만남에는 한계가 있었다.


에티오피아의 겔라다개코원숭이들은 털손질을 통해 사교적인 관계를 맺고 유지해 나간다. 털 속에 숨어 있는 진드기를 골라주는 행위를 통해 그들은 청결을 관리함과 동시에 서로의 우정을 다져나간다. 곤경에 처한 원숭이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기꺼이 도움을 주는 다른 원숭이는 그 원숭이에게 털손질을 오랫동안 받아온 원숭이일 확률이 높다. 이런 원숭이의 사교계에서도 소강상태가 찾아오는 시기가 있다. 바로 출산과 양육의 시기이다. 새끼에게 모유를 주기 위해 어미 원숭이는 관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털손질이라는 노동을 잠시 접어두고 돌봄에 집중한다. 털손질을 받을 뿐 자기가 친구에게 털손질을 해 줄 시간은 없다. 그러다 새끼가 젖을 떼고 나면 어미 원숭이는 사교계에 복귀한다. 그동안 친구가 자신에게 털손질을 해준 것보다 더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 친구의 털을 손질해 준다.


한정된 시간 속에서 나는 그때그때 우선순위에 올라와있는 것들을 먼저 다뤄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티고개의 적막감 속에서 아이와 덩그러니 하루를 보내던 나에게 이따금씩 빛과 소리를 몰고 찾아와 주는 이들이 있었다. 내가 아니면 대티고개의 ‘대’자도 몰랐을 거라던 친구는 대티 근처에 있던 신상 카페를 물색하여 아기띠를 멘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주곤 하였다. 물론 그마저도 노키즈존이라는 벽에 부딪혀 쫓겨나기 일쑤였지만 쫓겨났다는 황망함보다 옆에서 같이 열을 내어주던 네가 있어 훈기가 도는 시간들이었다. 출장 나온 길에 들러 딸기 박스를 던져주며 힘내라고 슬쩍 윙크를 건네던 친구도 있었고 더운 여름날 땀을 뻘뻘 흘리며 초인종을 누르고 찾아와 다시는 올라오지 못할 고개라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던 친구도 있었다. 새끼에게 모유를 먹이고 있는 친구의 털을 골라주는 행위가 비단 원숭이의 것만은 아니었다. 얼굴을 비칠 수 없는 나를 보기 위해 하루라는 시간 중 한 켠을 선뜻 내어다 주는 친구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내게도 있었다. 인간관계의 반경이 좁아지긴 했지만 원 안의 관계는 더 단단해져가고 있었다.


안으면 부서질 것 같이 작고 연약하던 아이는 작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하였고 이제 막 9살이 되었다. 낯선 세계에 발을 들이는 아이를 위해 나는 작년 1년 동안 육아휴직을 하였고 오는 3월에 복직을 앞두고 있다. 그 사이에 더욱 가까워진 친구도 있고 서로를 찾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소원해진 친구들도 있다. 아이가 어느 정도 크고 나니 친구들과의 만남에 다시 얼굴을 내비치는 일이 늘어났다. 멀어지는 관계를 일부러 잡아둔다고 잡히는 것이 아니지만 오고 가던 시간들 속에서 끊어졌던 인연이 다시 이어지는 순간도 드물게 맞이하였다. 지금은 대티고개를 떠나 또 다른 곳에서 새 둥지를 텄지만 지나가다 문득 대티 주변을 지나게 될 때면 가슴이 선덕인다. 떠나올 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탈출하듯 나온 곳이었는데 돌이켜 보면 힘들었던 기억보다는 출발의 설렘이 먼저 떠오른다. 대티고개에서 느꼈던 고립감이 설렘으로 덮일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내 곁을 묵묵하게 지켜줬던 이들 덕분일 것이다. 


건물을 허물고 다시 지을 때도 건드리지 않는 벽이 있다고 한다. 기둥과 함께 건물의 무게를 지탱하는 것이기에 그 벽을 남겨두는데 그것을 내력벽이라고 부른다. 허물어져 가던 내 인간관계에서 내력벽을 추려낼 수 있었던 시기가 대티고개에서의 시간들이었다. 고통은 사람을 생각하게 만든다. 사색이 깊어질수록 시련은 감당할 만한 것이 되고 우리는 그 속에서 나름의 의미를 채굴해 낸다. 삶은 그럭저럭 꾸려진다. 대티고개에서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좁아져가는 원안에서 드러나던 내력벽이 단단해져 가던 그 시절이 그러했듯이.

오래도록 기억할 푸른 뱀의 포구(@아난)


갑갑할 때는 눈을 감고 ‘푸른 뱀의 포구’를 떠올린다. 이 포구의 가장 큰 매력은 포구로 넘어가는 언덕길에 있다. 양 옆으로 높이 솟은 아파트들을 끼고 오르막길을 걷는다. 내리막길이 시작되는 고개 지점에서 푸른 뱀의 포구, 청사포가 시작된다. 갑자기 새파란 바다와 나지막한 어촌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방금 전까지 분명히 아파트 숲에 있었는데 다른 차원의 세계로 들어가는 듯한 그 순간의 상쾌함이 좋다. 내리막길 끝에 있는 바다를 향해 달려가면 바닷속으로 풍덩 빠져버릴 것 같은 풍경이 펼쳐져 몇 번을 봐도 좋다. 내려가는 골목에는 시골에서 장작 피울 때 나는 나무 타는 냄새가 마을을 가득 에워싼다. 낮은 돌담이 이어진 동네 골목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빨래 더미와 미역줄기가 널브러져 있다. 길 끝에는 탁 트인 바다가 펼쳐지고 하얀 등대와 빨간 등대 사이로 윤슬이 부서진다. 방파제에는 낚시꾼들이 하염없이 세월을 보내고 물가에 고깃배들이 줄줄이 넝실거린다. 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어촌의 비릿한 공기에서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파도 부서지는 소리만 울리는 그 조용함이 빠르게 돌아가는 도시에서의 긴장감을 녹여준다. 고개 하나만 넘으면 이렇게나 다른 세계가 숨어있다니 그곳에서 나는 마음의 짐을 훌훌 털어내고 온다.      


푸른 뱀의 포구는 애틋한 이야기를 품고 있어 더 특별하다. 어린 시절 방학 숙제로 나는 청사포를 주제로 한 동네 신문을 만들었다. 나는 ‘청사포는 왜 청사포인가?’라는 질문을 갖고 집 뒤를 향했다. 포구의 오른쪽으로 쭉 걷다 보면 구불구불 큰 소나무가 감싸고 있는 사당이 나온다. 어린 나는 소나무가 보호하고 있는 듯한 사당에 신비로움과 호기심을 느끼며 다가갔다. 사당의 표지판에는 청사포를 둘러싼 전설 하나가 적혀있다. 이 마을에는 사이좋은 부부가 있었는데 어부였던 남편이 궂은 날씨에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를 알리 없던 아내는 남편을 기다리며 밥도 먹지 않고 소나무를 심고서 그 아래 바위에서 남편이 무사하기를 기도했다. 이에 감동한 용왕이 푸른 뱀을 보내어 아내를 용궁으로 데려와 남편과 만나게 해 주었다. 그러나 남편은 이미 죽은 몸이 되어 둘은 함께할 수 없게 되자, 마을 사람들이 아내의 소나무와 바위를 기리며 마을의 이름이 청사포가 되었다. 절로 신비로워지는 이야기에 청사포를 떠올리면 푸른 뱀이 물살을 가르고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모습이 상상된다. 이 푸른 뱀의 포구가 간직한 전설처럼 따뜻하면서도 어딘가 애틋하고 아련한 느낌의 청사포가 좋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조용한 어촌, 푸른 뱀의 포구는 사라졌다. 어느새 슬쩍 청사포(靑蛇浦)의 이름이 푸른 뱀이 아닌 ‘맑은 모래의 포구(淸沙浦)’로 바뀌었다. 마을 이름에 ‘뱀’이 들어가는 것이 부정적이다는 의견 때문이라고 한다. 모래라고는 없는 몽돌 해변인 청사포에 깨끗한 모래의 포구라는 아무 의미 없는 이름이 붙었다. 있는 그대로의 청사포는 존중받지 못하고 깎이고 재단당하며 관광객 입맛에 길들여졌다. 청사포에는 블루라인 파크, 스카이 캡슐이라 불리는 관광객을 위한 열차가 마을 중심에 자리 잡았다. 멀리서 봐도 눈에 걸리는 것 없이 하늘과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던 푸른 뱀의 포구는 사라졌다. 대신 거대 자본이 투자한 대형 카페가 즐비하고, 건설사의 해변열차가 길게 놓여 포구의 단아한 신비로움이 증발되었다. 관광객이 많이 찾아오는 게 좋지 않느냐고 하지만 배 불리는 이들은 건설사와 자본가들 뿐이다.


10대에서 30대를 거쳐오면서 청사포는 늘 내가 기억하고 싶은 비움의 공간이다. 저녁밥을 먹고 나면 집 뒤 고개를 넘어 청사포로 가 산책을 한다. 등대 앞 조용한 둔턱에 앉아 고민과 걱정을 털어낸다. 청사포를 걸으면서 배부름이든 걱정이든 뭐든 비워낸다. 그렇게 청사포에서 한껏 바닷바람을 맞고 뒤돌아서면 마을을 둘러싼 높은 산들이 늘어서 있다. 그 산 위로 고층 아파트들이 툭툭 밉게 튀어나와 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자며 오르막길을 이제 오르고 또 올라간다. 길 중간에는 어릴 적부터 마음속 이정표이자 쉼터였던 플라타너스 나무가 있었다. 물놀이 뒤 오르막길에 지칠 때 큰 나무 그늘 아래서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 소리에 등을 대고 반대편 바다를 보며 쉬어가던 곳이다. 그런데 어느 날 나무는 베어지고 의미 없는 새 모양의 바람개비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우리는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아름다운 것들을 너무 빠르게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없애버린다. 그 길을 지나갈 때마다 씁쓸함이 온 마음에 돈다. 청사포 고개 너머부터 개발이라는 이름의 병이 스멀스멀 들어오는 것 같아 안타깝다. 어느새 깜깜해진 언덕길을 넘으면 양 옆 위아래로 무질서하게 차들이 내려오는 길 한 복판에 서게 된다. 차가 오지 않는지 고개를 바삐 돌려 확인하며 다시 도시의 세계로 넘어온다. 한적한 시골에서 번잡한 도시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청사포를 원래의 이름 그대로 '푸른 뱀의 포구'라고 기억하고 싶다. 지금의 청사포는 자기가 누군지도 모른 채 사람들이 좋다고 여기는 것을 덕지덕지 걸친 어른 옷을 입은 아이 같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고민해 본 적 없이 타인들이 좋아할 만한 것으로 채워졌다. 세상이 원하는 것으로만 칠해지고 있는 청사포에 계속해서 외치고 싶다. 네 원래 이름은 푸른 뱀의 포구였다고. 소박하고 애틋한 푸른 뱀의 포구였던 걸 마지막까지 내가 꼭 기억하겠다고 말하고 싶다.

💌 지난 호 구독자 후기 (#10. 1년 중 가장 좋아하는 달)
앙듀님 : 아난님의 글에 공감을 많이 했습니다. 저도 매직 아워를 정말 좋아합니다. 특히 해질녘의 분홍 하늘을 볼 때면 늘 감상에 젖으며 하루 온종일 긴장했던 근육이 탁 풀어지는 느낌을 늘 받습니다. 마지막 광안대교를 전경으로 분홍 하늘 배경은 제가 부산에서 가장 사랑하는 공간이자 시간이라서 한참 바라봤습니다.
🍯 땡비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 소개
 - 못골👨🏻‍🎨 : 한 평생 아이들을 가르치고 사진을 찍어왔다. 한계를 넘어 뭐든 끝까지 가는 남다른 의지력을 지녔다.
 - 흔희👩🏻‍🎤 : 눈치를 보지않아 '인간 사이다'로 불리나 K장녀로 은은히 돌아있다. 직업 때문에 생계형 낱말수집을 한다.
 - 아난👩🏻‍🍳 : 목구멍 보이게 웃는 큰 리액션과 미친 에너지 때문에 '어린 짐승'으로 불렸다. 빵을 굽는 방구석 빵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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