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 전, 어느 폭설이 내리던 날. 낭독회가 끝나고 시인들 몇이 모여 늦도록 술자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돌아가면서 노래를 부르게 됐고 우리는 모두 자기가 아는 한 가장 한 맺힌(?) 노래를 불렀습니다. 비애와 그리움, 후회와 절망이 담긴 노래를 한 곡씩 불렀고 분위기는 점차 무겁고 어두워졌습니다. 세상의 모든 슬픔과 우울은 그 자리에 다 있는 듯했습니다.

그러다 일순 분위기가 바뀌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한 시인의 차례가 됐고 흰색 뿔테 안경을 쓴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네모의 꿈>이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가볍게 몸까지 흔들면서 말입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불렀던 노래와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네모난 아버지의 지갑엔/ 네모난 지폐/ 네모난 팜플렛에 그려진/ 네모난 학원/ 네모난 마루에 걸려 있는/ 네모난 액자와/ 네모난 명함의 이름// (.....) 주윌 둘러보면/ 모두 네모난 것들뿐인데// (.....) 우리 사는 지군 둥근데/ 부속품들은 왜 다/ 온통 네모난 건지 몰라/ 어쩌면 그건 네모의 꿈일지 몰라"

이 노래를 부른 시인은 오은이었습니다. 일순 웃음이 터졌고 모두 노래를 따라 불렀습니다. 술자리의 장르가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두 심해로 갈 때 누구 한 명쯤은 가볍게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도 좋겠다.' 오은은 그런 시인입니다. 비애의 시인이 아니라 경쾌함의 시인이고, 눈물의 시인이 아니라 웃음의 시인이며, 어제의 시인이 아니라 바로 오늘의 시인입니다. 제 사견입니다만 이것만으로도 그는 오롯한 좌표를 가진 현대 시인입니다.

오은의 시 중 제가 좋아하는 시는 「물질」이라는 시입니다.

보통의 시인들이 시적 대상물과 하나가 되어 죽어갈 때 오은은 끝까지 바라보면서 그 대상물들을 살려냅니다. 다른 시인들이 소멸의 시를 쓴다면 그는 생환의 시를 씁니다. 엎질러진 물감에서 실패와 파탄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전환된 가치와 생명을 봅니다. 엎질러진 물감을 기꺼이 너로서 후원하겠다는 대승적 판단은 매력적입니다. 오은의 자리는 그래서 더욱 빛납니다.

그러고 보니 오래전 제가 입원했던 병실 문을 박차고 들어오면서 "형 이게 모야 재미없게! 빨리 나와"라며 꽃을 내밀던 날의 일화도 떠오릅니다. 그에게는 모두가 고개를 떨굴 때 혼자 고개를 치켜드는 긍지가 있습니다. 한국에서 보기 드문 유형의 시인이지요. 그가 내놓는 작품에 관심을 갖게 되는 이유입니다.

허연 드림  

문학동네시인선 038 오 은 시집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새로운 시적 규율을 만들어가는 시인이라는 평을 받으며 등장한 오은 시인의 두번째 시집입니다. 범상치 않은 언어 감각, 특유의 블랙유머를 발휘하면서도 자신에 대한 믿음과 긍정을 잃지 않는 시가 펼쳐집니다. "알다시피 볕은 쥐구멍에만 들었다. 나는 구멍을 활짝 열어 선탠을 하기도 했다. 그러니// 얼마나 독한가, 나는"(「래트맨(Ratman)」) 낯설어진 언어가 만들어내는 낯선 현실, 시집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만나보세요.

Q. 시인은 시로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오은의 시론을 듣고 싶다. 


시는 나를 증명하고 존재하게 만든다. 시를 쓸 때 가장 나답다고 생각한다. 잘 쓴 시는 슬슬 읽히고 주제 의식도 있고, 단정하면서 정제된 시를 일컫는 경우가 많은데, 내게 좋은 시는 남들과 다른 시, 그 사람만 쓸 수 있는 시다. 잘 써서 너무 매끄럽기만 한 시보다 자기가 드러나는 시가 좋은 시가 아닐까. 그런 시를 쓰고 싶은 것이 나의 바람이자 포부다.

  • 한동안 우시사 메일을 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어요. 메일함의 메일을 삭제만 하고 말았는데 오늘 아침엔 열어보고 싶어 들어왔더니 일월담의 이야기와 오독에 관한 해석이 좋았어요. 일월담이라는 장소도 처음 보고요. 감사해요!
  • "오독은 종종 미지의 세계로 이끈다." 강화길 작가가 콕 집어준 문장이 좋아 한 참을 곱씹어보다가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는 전설이 되고 이는 미지의 세계가 되어 지구인을 심해로 이끌게 만드는구나! 라는 깨달음을 얻었어요.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다시 또 생각에 잠기게 되는 시의 매력...... 작가님이 발견하신 아름다운 일월담의 이야기를 들려주어서 감사합니다.🩵
  • 심해라는 말은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는 말인 거 같다. 일단 잠깐이라도 발 디뎌보자고, 어차피 내가 죽고 사나 잘도 돌아가고 또다시 울며 태어나고 울며 떠나보내고, 이렇게 쳇바퀴 같은 무익한 시간만 흘러간다. 내가 원하는 곳이 심해로 향하는 길이라도 나는 가라앉을 준비가 되어 있다. 몇 번이고 가라앉아서 이곳이 점점 익숙해진다. 어차피 심해도 또다른 세상일 테니 상관없다.
오늘 <우리는 시를 사랑해>는 어떠셨나요?
여러분의 소중한 피드백은 우시사를 무럭무럭 성장하게 하는 자양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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